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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시국선언 정국이다. 촛불 들고 나섰다가 거리에서 잡혀가고 경찰이 휘두른 쇠몽둥이에 맞아가며, 또 범법자 취급을 받아가며 비국민으로 대접받던 그 설움과 분노가 온 국민의 가슴 속에 차곡차곡 쌓여가던 요즘, 각계의 시국선언은 정말이지 속을 시원하게 뚫어주는 소식 아니던가.

 

문화, 예술, 교육, 종교, 노동 등 분야를 막론하고 전국 각계각층의 시국선언에 심지어 더 이상은 못 참겠다며 청소년과 누리꾼들까지도 시국선언에 동참했다. 현재 전국은 '파시즘X'로 불리는 이명박식 막가파 정치에 반대하는 목소리들로 꽉 차 있다.

 

그 출발은 대학 교수들의 시국선언이었다. 민주주의의 죽음을 우려하는, 민주주의의 큰 틀을 지켜야 하는, 질식하는 민주주의를 바라만 보아야 했던 지식인들의 자랑스러운 선언을 지켜보며 가슴이 설렜다. 들끓는 그 목소리를 들으며 가슴을 치며 '이 시대를 통탄하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구나'하는 안도감을 느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벅찬 행렬에 교사들 또한 동참을 선언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는 더 크게 외쳐야 한다.

 

나는 기억한다. 처음 발령받아 아이들 앞에 섰을 때의 그 설렘을. 그 반짝이는 예순 네 개의 눈망울 앞에 서서 떨리는 마음을 간신히 추스르며 '아, 정말 잘 살아야겠구나'하고 생각했던 그 날을. 아이들의 눈은 언제나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때로는 수줍게, 때로는 단호한 눈빛으로 내 행동을, 내 입을 바라보고 있었다.

 

교사는 단순 지식 전달자가 아니다

 

'선생님'이라는 존재는 아이들에게 있어 단순히 수업만 하는 존재가 아니다. 내가 교과서에 담겨있는 생명, 평화, 정의, 그리고 민주주의와 인권을 아이들에게 이야기 할 때 그 말들은 죽어있는 글자가 아니라 살아있는 가치로 되살아났다. 이런 가치가 교사의 삶과 내면에서 살아 움직일 때에야 그것들은 아이들의 마음속에서 다시 살아났다.

 

삶에서 비롯되지 않은 채 입으로만 떠들어대는 것은 죽은 지식이다. 아이들은 겉으로 표현하지 않을지언정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교사들을 정확히 가려낸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그 교사는 '선생님'이 아닌 '선생'으로 받아들인다. 이런 아이들 앞에선 교사가 지식 전달자임을 거부하고 자신의 양심에 따라 움직일 때만이 우리 교사들이 아이들 삶 속에 살아있는 스승이 되리라 나는 굳게 믿고 있다.

 

일제고사로 해직을 당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학교의 가장 큰 어르신이라는 교장 선생님이 들어와 "너희 담임선생님은 큰 잘못을 저질러 학교에서 쫓겨나게 되었다"며 온갖 협박과 회유를 했을 때도, 각종 언론매체에서 '일제고사 거부 교사'라며 떠들어 댈 때에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담임을 믿어주었던 아이들이 내 곁에 있었다.

 

그 추운 겨울, 아침 일찍부터 학교 앞에 나와 함께 노래를 부르고 곁을 지켜주었던 아이들이었다. 그것은 부끄럽지만 함께 하는 동안 내가 아이들에게 보여주었던 삶의 진정성이라 나는 믿는다. 옳지 못한 것에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제 목소리 내는 것이 진짜 삶이라 믿었고 실천했기에 얻을 수 있는 값진 스승의 지위였다. 비록 함께 많은 시련을 겪었을지언정, 그 속에서 내 아이들이 많은 것을 느끼고 깨달아 어느덧 부쩍 자라있음을 나는 직접 보았다.

 

누구를 위한 성실이며 누구를 위한 복종인가

 

 

한 때 교사들이 정권의 충실한 나팔수 노릇을 해야만 했을 때가 있었다. 그 때 교사들은 육성회비를 걷는다며 굶주리고 가난한 아이들의 종아리를 걷어 때리기 일쑤였고, 미술시간에 뿔이 난 새빨간 도깨비를 그리며 반공을 가르쳤다. 힘이 들어, 또는 그 독재의 굴레를 끊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제자들의 모습에도 눈을 감아야만 했다. 그 때 교사는 교사가 아니었다. 그 침묵과 굴종의 세월에 교사들은 영혼 없는 기계이며 로봇이었다.

 

그렇게 부끄럽게 살 수 만은 없었던 교사들은 마침내 모였고, 전교조를 결성했고 그 때문에 1500여명의 전교조 교사들은 학교에서 추방당했다. 그 해 여름의 사건을 사람들은 '교육 대학살'이라 불렀다. 그러나 이제 전교조는 합법화되었고, 전교조도 전교조가 아닌 교사들도 모두 영혼 없는 기계로 살기를 거부하며 양심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지금 당당히 제 목소리를 내고 스승 되기를 외친 시국선언 동참 교사 1만 7천여명에게 교육과학기술부는 해임과 정직, 중징계라는 칼을 빼들었다. 기사를 보고 나는 내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징계의 사유는 복종 의무 위반, 성실 의무 위반 등이었다.

 

지난 12월 일제고사에 반대했던 교사들을 파면, 해임했던 그 조항과 다를 것 하나 없는 똑같은 근거로 이제는 시국선언을 한 교사들의 입을 막으려 하고 있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성실이며 누구를 위한 복종인가? 성실과 복종 의무는 현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양심적인 교사들을 두들겨 패기 위한 만능 도깨비 방망이인가?

 

2차 선언에 참여하겠다고 나선 교사들

 

얼마 전 교사 커뮤니티 게시판에 어느 교사가 옮겨다놓은 도종환 선생님의 '무릎 꿇지 말라, 교사여!'란 글을 읽게 되었다. 

 

깊게 사유하고 당당하게 행동하고 책임져라.

가르치고 꾸짖고 꾸짖은 그 말과 함께 물러서지 말고 서 있어라.

그대는 아이의 일생에 대해 책임지는 사람이다.

자기 생을 던져, 온 몸으로 아이의 일생을 책임지는 사람이 교사다.

그대의 언어, 그대의 행동, 그대의 가르침이 움직이는 교육과정인 것이다.

그대가 온 국민 앞에서 무릎을 꿇으면

이 나라의 교육과정과 교육의 근본이 무릎을 꿇는 것이다.

 

우리 주위엔 우리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진 학부모가 있고, 우리보다 더 훌륭한 지식인들이 있으며, 우리보다 더 큰 힘을 가진 권력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아이가 밥알을 흘리는 어지러운 식탁 옆에 있지 않고,

오줌 싼 바지를 갈아입히는 지린내 옆에 있지 않으며,

힘겨워 하는 산수 공식과 딱딱한 책상 옆에 있지 않다.

아이의 구체적인 고민과 어려움 곁에 있지 않고,

아이의 현재와 미래를 책임지기 위해 아이 옆에서 고뇌하며 있지 않다.

교사는 아이의 현재와 미래를 책임지는 사람이다.

아이의 인격, 아이의 고민, 아이의 성장, 아이의 성공과 실패를 책임지는 사람이다.

그러니 무릎 꿇지 마라, 교사여! (앞 뒤 생략)

 

2006년에 급식지도 문제로 학부모 앞에 무릎 꿇은 교사의 모습이 지상파를 통해 알려진 뒤 쓰인 이 글이 몇 해를 지나 새삼 교사들의 마음에 새로운 울림을 주었다. 아무래도 중징계를 밥 먹듯 퍼붓는 이 정권과 교육과학기술부는 우리 교사들이 조금만 겁을 줘도 찍 소리 못하고 조용해지는 그런 양처럼 순한 존재라 여기나보다.

 

그러나 시국선언 징계의 기사가 뜨자 많은 교사들은 '제 때에 시국선언 함께 하지 못한 것이 너무나 억울하다'며 '2차 선언을 하면 반드시 참여 하겠다'고 외치고 있다. 조용한 듯 보이던 교사들은 이렇게 서서히 마음의 분노를 키워가고 있다.

 

무릎 꿇지 말라, 교사여! 아이들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덧붙이는 글 | 최혜원 길동초등학교 교사는 아이들에게 일제고사 대신 체험학습의 기회를 줬다는 이유로 지난 3월 해임됐다. 


태그:#시국선언, #전교조징계, #일제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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