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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바야흐로 2009년 6월. 우리의 각하께서 또다시 구국의 결단을 내리셨다. 많은 이들의 악의에 찬 오해를 무릅쓰고 살신성인의 자세로 특단의 조치를 내세운 것이다. 그 이름하여 바로 <대한늬우스>의 부활!

 

<대한늬우스>. 듣기만 해도 심장이 쿵쾅쿵쾅 거리며 오금이 저려오지 않는가. <대한늬우스>의 전설을 말로만 듣고, 혹은 간간이 TV 자료화면을 통해서만 보아오던 기자가 살아 생 전 <대한늬우스>의 부활을 직접 이 두 눈으로 보게 될 줄이야.

 

<대한늬우스>가 어떤 존재인가. 1960~80년대를 살았던 이들에게 하나의 공감대, 하나의 정체성을 심어주던 통합의 기제 아니었던가. 세대를 뛰어넘어 하나의 공감대를 형성하여 국민통합을 실현하겠다는 현 정부의 눈물겨운 노력이란.

 

정부에게 <대한늬우스>의 부활은 참으로 어려운 결정이었을 것이다. 많은 이들이 언론장악, 공안정국 등을 들먹이며 정치의 복고를 운운하는 이 시점에 <대한늬우스>를 정면에 내세운다는 것은 정말 웬만한 '깡'과 용기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70%의 여론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려 불철주야 노력하는 MB의 뚝심이 아니고서야 어찌 가능한 일이겠는가.

 

그렇다면 정부는 왜 <대한늬우스>의 부활을 결정했을까? 물론 그 대답은 보나마나이다. 봇물처럼 터지는 시국선언에서 하나같이 지적한 사항이 소통부재 아니었던가. 결국 <대한늬우스>는 국민들과 직접적으로 소통하는 것에 목말라 하던 MB의 승부수가 분명하다. 온갖 좌파 매체들 때문에 자신의 선의가 왜곡되는 바, 차라리 직접적인 대국민 설득을 결정한 것이다. 아! 이 얼마나 위대한 결의인가.

 

각하는 아마도 이와 같은 결정을 내리면서 꽤 많은 역사적 사례를 공부했을 것이다. 극장에서 뉴스를 트는 행위가 대중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칠 것인가. 다행히 위 사례는 다양하게 조금 변형된 형태로 적지 않게 역사 속에 산재되어 있다. 히틀러, 무솔리니, 레닌, 스탈린 등이 영화를 체제의 선전도구로 썼기 때문이다.

 

물론 영화 자체를 제작하여 방영했던 그들과 영화 전 뉴스를 통해 정부방침을 이야기하려는 MB가 똑같을 수는 없다. 그러나 전체주의 국가들의 영화나 <대한늬우스>가 방영되는 공간이 모두 극장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터, 정부는 <대한늬우스>를 기획하면서 그 공간의 특성을 감안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극장은 개인적이면서 동시에 집단적인 공간이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스크린을 주시하고 있지만 어두컴컴한 공간에서 각 개인들은 스크린의 메시지를 사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며, 동시에 많은 관객 속에서 집단적인 감동을 느끼기도 한다. 이데올로기를 설파하기에 얼마나 최적의 공간인가. 게다가 커다란 화면과 엄청난 음향효과까지. 이러니 극장에서 상영하는 매체에 권력이 지대한 관심을 쏟을 수밖에.

 

문제는 현재가 2009년이라는 점이다. 같은 공간과 매체라고 하더라도 시대적 조건과 수용자의 수준이 매우 다른 것이 현실이다.

 

20세기가 갓 시작된 이후, 전체주의 독재자들이 영화를 선전도구로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은 대중에게 새로 발명된 영화가 매우 큰 문화적 충격으로 다가갈 수 있었기 때문일 텐데 과연 요즘 누가 영화를 그와 같은 경외의 눈빛으로 바라볼까? 자기가 보려고 했던 영화 상영에 앞서 국가가 홍보물을 튼다고 한들 과연 이 시대 누가 그것을 진지하게 바라볼 것인가.

 

정부도 이를 걱정했는지 최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보기 위해 <대한뉴스>를 <대한늬우스>로, 그리고 형식도 코미디 프로그램 '대화가 필요해'를 패러디해 만들었다고 한다. 그들도 스스로 자신들의 시도가 대중에게 얼마나 어이없게 받아들여질지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쓴웃음만 나올 뿐이다. 뉴스 내용이 이미 국가의 독선적이고 권위적인 것들로 채워져 있을 터, 그 형식만 코미디로 만든다고 뉴스가 가벼워질 수 있겠는가. 

 

그러나 더 큰 문제는 <대한늬우스>를 직접 봐야만 하는 관객들의 수준이다. 지금 현재 극장으로 가는 이들은 불행히도 정부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똑똑하고 영악하다. 그들은 과거 영상물 자체에 목이 말랐던 대중이 아니라,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정보 속에서 자신의 것을 취사선택하며 오히려 그 이미지들을 패러디하며 풍자하는 데 익숙한 이들이다.

 

그런데 그런 그들을 대상으로 정부가 <대한늬우스>를 방영하여 4대강 정비 사업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한다고 한다. 아무리 소통도 좋다 한들 누울 자리 보고 다리 뻗으라 했다고 정부가 이 시대 대중을 너무 쉽게 본 것은 아닌지.

 

하긴 모를 일이다. 설마 우리의 각하가 이와 같은 현실을 몰랐을 리 있겠는가. 많은 이들의 우려를 모두 잠재울 수 있는 한 방이 숨겨져 있을지도. 보던 관객들이 각하의 식견에 탄복하게 되는 바로 그 무엇.

 

<대한늬우스>는 25일 오늘부터 방영된다고 한다. 영화 <트랜스포머 2>보다 기대되는 그들의 역작. 가자 극장으로!

 

P.S : 참, 이와 같은 역사적인 영상물에 그 이름을 올리지 않은 신봉선에게 심심한 위로를 표한다. 부디 그녀에게 아무런 일이 없기를.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유포터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대한늬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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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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