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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모레(21일)면 낮의 길이가 가장 길다는 하지이다. 규표를 세워놓고 막대 그림자의 길이를 재면 가장 짧은 날이기도 하다. 규표를 만들어 세우는 것이 어렵다면, 일정한 시간에 남쪽을 바라보고 섰을 때 그림자의 길이를 보는 것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태양이 남쪽하늘에 떠 있는 높이가 가장 높은 날이니 하지 전후로 태양의 막강한 힘을 우리 생활로 확인할 수 있다. 해가 뜨고 지는 것과 무관할 것만 같은 생활을 하고 있는 현대인이라지만 뜨거운 태양이 주는 더위는 다들 몸소 '체감'하지 않을 수 없다. 뜨거운 하지 무렵부터 나무들은 겨울눈을 준비한다니 천지운행과 호흡을 같이하는 그들의 생명력이 놀라울 따름이다.

 

 

마을과 숲은 밤나무꽃이 한창이다. 밤나무꽃 냄새가 역겹다는 이들이 많은데 올해처럼 밤나무꽃이 만발한 것을 본 것이 처음이라 꽃을 볼 때마다 신기하다. 요즘처럼 기상청이 슈퍼 컴퓨터를 동원해 일기예보를 해주고, 그걸 그대로 의지하는 우리와 달리, 조상들은 온갖 자연의 것들을 살피면서 날씨를 예측하는 지혜를 발휘했다. 개구리나 도롱뇽이 물 한가운데 알을 낳으면 그해 봄에 가뭄이 든다는 것을 깨달은 것과 같은 이치이다. 하지 무렵부터 장마철이 시작되었는데 일반 민중들은 규표 같은 것을 사용해서 하지를 보지 않았기 때문인지 이런 속담을 전하면서 날씨를 예측했다.

 

밤꽃이 질 때면 장마가 시작된다.

원추리꽃이 피면 장마가 오고, 꽃이 지면 장마도 간다.

 

 

정말 만발했던 밤꽃이 질 무렵이면 장마가 시작되고, 원추리가 연노랑꽃을 피우면 비가 내리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런데 기상청이 올해부터는 장마 예보를 하지 않는단다. 기후변화로 우리나라에 '장마철'이라는 자연 현상과 이에 비롯되는 여러 문화적, 사회적 현상이 사라질 것이라는 이야기다. 하지 무렵 원추리꽃과 함께 찾아오는 것으로 기억되던 장마가 사라진다니, 이데올로기적 대립과 민족의 아픔을 장마철에 빗대어 그려나간 윤흥길의 '장마' 같은 소설을 읽는 맛을 우리 자식들은 영영 잃어버리게 되는 것 같아 아쉽기만 하다. 이런 아쉬움을 잠시 접어두고 아이들과 하지 관련된 속담을 찾아보았다.

 

 

하지에 비가 오면 풍년이 든다.

단오에 물 잡으면 농사 다 짓는다.

하지가 지나면 발을 물에 담그고 산다.

하지가 지나면 오전에 심은 모와 오후에 심은 모가 다르다.

오뉴월 발바닥이 사흘만 뜨거우면 가만히 누워서 먹는다.

오뉴월 품앗이는 당일로 갚으랬다.

오뉴월 품앗이도 순서가 있다.

 

대부분 농사일과 관련된 것이다. 하지 무렵이면 장마로 큰물이 들게 되니 하지 무렵 풍년이 든다는 것은 해마다 풍년이 들었으면 하는 바람이 녹아 있는 것 같다. 하지가 지나면 늘상 논물에 발을 담그고 살게 되고 발이 따뜻할 일이 없을 터이니 고단한 삶에서 농사일을 하면서 어떤 삶의 희망을 찾아갔을까 생각하게 된다. 그만큼 바쁠 때 품앗이를 하면서 서로 해야 할 책임에 대한 경계를 담은 속담도 지금 시기 우리들에게 꼭 필요한 내용인 것 같다. 이런 옛 생활에 감이 없는 아이들과 새로운 속담을 지어보았다.

 

하지에 살구 먹는 재미가 좋다.

하지에 벌써 수박 간식 인기 좋다.

감자, 완두콩 쪄 먹는 재미 쏠쏠하다.

 

 

마을 골목 곳곳 살구나무마다 노랗게 익은 살구가 툭툭 떨어진다. 어른들도 선뜻 주워 먹지 않는 것을 우리 학교 아이들은 열심히 주워 먹는다. 어른들은 먹을 거 없던 시절이나 주워 먹었던 거라 생각하시는 것 같다. 학교에서 간식을 준비하면서 되도록 제철 음식으로 하려고 해서인지 아이들은 하지 무렵 캐 낸 햇감자를 쪄 먹는 맛, 완두콩 초록 꼬투리를 벗겨 먹는 맛을 아는 것 같다.

 

하지에 살 탄다.

하지에 선크림 챙겨 바른다.

하지에 냇가 간다.

 

아니나 다를까 오늘 서울 최고 기온은 31.5도였다. 어릴 적 기억만 떠올려도 한 여름, 30도가 넘는 온도를 기록한다는 것 자체만으로 뉴스 거리가 되었는데 이제 한 여름 30도 정도는 그러려니 생각한다. 아이들은 살이 타고 선크림을 바르고 하는 생활 모습을 담아 속담을 지었다.

 

 

하지에 노는 시간 길어진다.

하지에 늦잠 못잔다.

하지에 아침잠 못잔다.

 

낮 길이가 길어지니 자연히 밖에서 놀 수 있는 시간, 놀고 싶은 시간이 길어진다. 어쩌면 놀고 싶은 시간이 길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은 건지도 모르겠다. 한 아이가 이 속담을 말하니, "아니잖아, 우리 학교 시간표는 겨울이랑 똑같은데?"하면서 볼멘소리를 한다.

 

아이들에게 놀 시간은 언제나 부족하다. 이른 새벽 아침부터 동쪽하늘에서 떠오르는 직사광선과 무관한 아침 생활을 하는 이들이 참 많겠지만, 그래도 아이들은 그 빛에 민감해서 일찍 일어나게 되는 모양이다. 늦잠을 자고 싶어도 잘 수 없다고 투덜댄다. 그게 건강하고 좋은 것인데, 우리 어른들은 자연의 흐름에 너무도 멀리 떠나온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장마'라는 수 천년간 우리 생활을 지배했을지도 모를 자연 현상이 이제 우리 기억 속에서 점차 사라질 것이다. 우리 아이들이 '농사'일 고된 것을 모르듯, 먹는 것 귀하다는 것을 모르듯, 그렇게 '장마'가 고어가 되어갈 것이다. 그럼 우리 아이들은 하지 무렵, 마을 골목 곳곳마다 달려있던 노랗고 먹음직한 살구, 한창 피어난 밤꽃의 그윽한 냄새, 갓 쪄낸 햇감자 포슬포슬한 속살, 이런 것은 기억하게 될까? 엄청난 역사적 시기를 통과하면서 또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 행동해야 할 것, 그리고 우리 아이들에게 기억시켜야 할 것은 무엇일까?

덧붙이는 글 | 아름다운마을학교 춤추는방과후배움터는 북한산 자락 인수동에 자리잡은 대안학교입니다. 매주 수요일 절기 공부를 하며 우주와 생명에 대한 감수성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이 절기 공부는 교보생명교육문화재단의 환경교육현장지원 프로젝트에 선정되어 지원을 받고 있는 프로그램입니다.


태그:#하지, #장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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