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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목욕가세요."

"싫어. 나 목욕했어. 어제 했어."

"에이~ 어제 목욕 안 했잖아요. 제가 등 밀어 드릴께 목욕가세요."

"글쎄 너나 다녀와. 난 어제 목욕했다니까."

 

목욕 가기 싫다는 할아버지를 어르고 달래며 30분 넘게 실랑이를 하는 아들을 보니 20년 전 목욕 가기 싫다는 손주를 어르고 달래시던 아버지 모습이 떠오릅니다.

 

아버지는 젊은 시절부터 대중탕 목욕을 특히 즐기셨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일주일에 한번 목욕탕을 찾던 40년 전에도 아버지는 매일 가벼운 새벽운동 후 대중목욕탕에 들르는 것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지금 오십을 바라보는 남동생의 어린시절 추억 속에도 아버지와의 목욕탕 장면은 꼭 등장합니다.

 

"목욕하기 싫다고 떼쓰고 우는 날 억지로 깨워서 질질 끌고라도 꼭 데려가야 직성이 풀리셨다니까. 그래도 그 시절 목욕 후에 아버지가 사주신 우유 한잔의 맛을 잊지 못해."

 

아버지의 첫 사위인 남편의 추억 속에도 아버지와의 목욕은 빠질 수 없습니다.

 

"일요일이라 늦잠 좀 늘어지게 자려고 하면 꼭 새벽에 전화가 오잖니. 목욕가자고. 정말 죽기보다 싫은데 아버님 호출이니 싫다고도 하지 못하고 꾸벅 꾸벅 졸면서 기어나가곤 했지. 아마 우리나라에 장인하고 나만큼 같이 목욕 많이 해본 사위도 없을 거다."

 

젊은 시절 일분일초를 아끼며 살아오셨던 아버지에게 목욕은 건강을 지켜주는 유일한 운동이었으며, 유일한 취미셨습니다. 아버지에게 목욕은 그저 몸을 닦는 시간만이 아니라 스트레스를 풀고 마음을 가다듬으며 동시에 건강까지 챙기는 의미있는 시간이었던 것이지요.

 

그래서인지 아버지는 당신이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 친해지고 싶은 사람과는 꼭 목욕을 함께 하십니다. 당신이 목욕을 하면서 느끼는 즐거움을 주변과 나누고 싶은 생각 때문이지요.

 

하지만 아버지의 생각과는 달리 아버지와 목욕을 함께 가야 하는 아들이나 사위는 여간 귀찮은 것이 아니랍니다. 집에서도 충분히 샤워를 할 수 있는데 꼭 탕에 몸을 담가야 한다면서 새벽 다섯 시에 목욕 가자며 호출을 하시는 아버지를 이해하는 자식은 거의 없었거든요.

 

제 아들이 태어나고 난 후 아버지는 더 신이 나셨습니다. 손주 녀석 데리고 목욕 다니는데 재미를 붙이신 것이지요. 하지만 그 재미는 몇 년 못가 깨지고 말았습니다. 말 못하고 놀아주는 것만 좋아하던 서너 살 이전엔 무조건 할아버지가 안고 가면 따라나서던 녀석이 다섯 살이 넘어서면서부터는 반항을 시작하는 겁니다.

 

"할아버지 나 목욕가기 싫어. 나 더 잘 거야."

"할아버지가 우유도 사주고 주스도 사줄게 가자."

"싫어 우유 안 먹어. 주스도 싫어. 안 갈 거야."

"그래도 이눔이? 그럼 할아버지가 장난감 안 사준다."

 

울고 보채는 녀석을 어떻게든 어르고 달래서 돼지 몰듯 목욕탕 앞으로 몰아가시던 아버지를 보면서 속으로 뭐 그리 대단한 목욕이라고 우는 애를 억지로 데려가시냐며 툴툴거리기도 했지만 막상 목욕을 마친 후 볼그래한 얼굴로 깡충깡충 달려오는 녀석을 보면 고집 부려 데려가신 아버지가 고맙기도 했었답니다. 

 

참으로 이해 할 수 없는 것은 몸 상태가 좋으셨을 시절에는 하루라도 목욕을 하지 않으면 온몸에 가시가 돋을 정도로 목욕을 즐기시던 아버지가 치매 증상을 보이신 후로는 대중목욕탕은커녕 집에서 목욕을 하는 것조차 싫어하신다는 겁니다. 

 

자신이 씻는 것은 물론 다른 사람이 씻겨주는 것도 싫어하시는 아버지. 그러다보니 집에서 샤워라도 한 번 하려면 온 식구가 어르고 달래다 못해 결국 엄마가 화를 내고 호통을 쳐야만 간신히 당신 몸을 씻기도록 내버려 두실 정도입니다.

 

더구나 수치심과 자존심이 강하게 남아계셔서 딸들에게는 몸을 내어주시지 않아 엄마 혼자 아버지를 씻겨 드릴 수밖에 없는데 그러다보니 엄마 역시 여기저기 아프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몸이 많이 상했습니다.  

 

그래서 지난해는 노인요양보험의 혜택을 받아 목욕봉사를 받아 보았지만 그것도 여의치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의 요양복지사가 아버지의 목욕을 위해 일주일에 한번씩 방문을 했지만 요양복지사가 대부분 4,50대의 중년 여성들이다 보니 아버지가 편히 몸을 맡기시지 못하셨던 것입니다.

 

요양복지사들의 목욕 봉사는 두 달을 넘기지 못했고 결국 아버지의 목욕은 다시 엄마 몫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니. 아버지가 저렇게 불편해하시고 싫다고 하시는데. 아버지가 저러니 복지사들도 시원하게 닦아드리지도 못하고 대충 물만 바르다 나오게 되니… 차라리 힘들어도 내가 해드리는 게 낫겠다. 냄새만 안 나게 하면 되지 뭐."

 

상황이 이렇다보니 일년에 몇 번 미국 사는 아들이 한국을 방문할 때나, 사위와 함께 온천을 찾을 때가 아니면 뜨끈한 탕에 몸을 담그고 시원하게 묵은 때를 벗겨낼 기회는 거의 없는 것이죠.

 

물이 닿는 것도, 씻는 것도 싫어하시는 아버지는 이런 상황이 너무 좋으시겠지만 그런 아버지를 바라보는 엄마나 자식들은 어떻게 하면 한 번이라도 더 아버지를 씻겨드릴까를 늘 고민하게 된답니다.

 

그런데 제 아들도 할아버지가 목욕을 가실 때가 지났다는 것을 느꼈던지 할아버지에게 목욕을 가자고 조르더니 드디어 할아버지 손을 잡고 문을 나섭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부엌에서 할아버지와 손주의 실랑이를 숨죽여 지켜보고 있던 엄마와 저는 "손주가 약이구나!!" 하며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손주를 끔찍이도 사랑하시는 아버지시기에 결국 손주의 간청에 못이기는 척 손을 잡고 따라 나서신 것입니다.

 

"엄마, 목욕 다하고 지금 옷 입혀드리고 있어요. 할아버지가 좀 지치신 것 같으니까 데리러 와 주세요."

 

아들의 전화를 받고 목욕탕 앞에 차를 댔습니다.

 

멀리 두 손을 꼭 잡고 차로 걸어오는 할아버지와 손주의 모습이 보입니다. 축 쳐졌던 아버지의 두 볼에는 홍조가 가득하고 갈라져 떡이 되었던 백발은 햇살을 받아 반짝이며 바람에 날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고 사랑스러운데 저는 왜 자꾸 가슴이 미어지고 눈물이 나려 하는지요. 바보같은 딸은 고개를 들어 하늘만 쳐다보았답니다.


태그:#목욕탕, #아버지, #치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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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아줌마가 앞치마를 입고 주방에서 바라 본 '오늘의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요? 한 손엔 뒤집게를 한 손엔 마우스를. 도마위에 올려진 오늘의 '사는 이야기'를 아줌마 솜씨로 조리고 튀기고 볶아서 들려주는 아줌마 시민기자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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