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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한국전쟁 사진들은 필자가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NARA,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5층 사진자료실에서 수집한 것입니다.



피란민들이 부서진 대동강 철교를 곡예하듯 넘어 남하하고 있다.
▲ 1950. 12. 평양 대동강 피란민들이 부서진 대동강 철교를 곡예하듯 넘어 남하하고 있다.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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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1월 14일
국군이 평양에 들어가서, 또 기타의 이북 지역에서 약탈과 강간을 함부로 하여 이북 동포들의 커다란 실망을 사고 있다는 소문이 들려온다. 가슴 아픈 소문이다. 제발 소문에 그치고 사실이 아니기를 빌고 바란다.

1950년 12월 4일
중공군의 대량 참전이 전해지고 UN군의 평양 철수가 소문에 그치지 아니한 어제오늘 원자탄을 쓰느냐 않느냐 하는 문제가 항간의 이야깃거리로 되어 있다. 서울 신문은 하루빨리 원자탄을 써야만 한다고 강경히 주장하고 있다.

남이 만들어놓은 원자탄을 우리 땅에 제발 써주십사 하는 태도는 그래도 명색이 일국의 대신문으로서 취할 바 태도가 아닐 것이다. 아무리 사세가 다급하기로서니, 이는 동족상잔의 전쟁을 버르집음과 그 마음씨에 있어서 다를 바 없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될 수만 있다면 원자탄 같은 건 다시는 살인의 무기로는 쓰지 말았으면 하는 것이 세계의 양식일 것이다. 그것을 하필 우리 땅에 던져서 동족상잔의 무기로 써줍소사 하는 마음보는 이해하기 어려운 노릇이다.

1951. 3. 한국전쟁 중의 서울역
▲ 서울역 1951. 3. 한국전쟁 중의 서울역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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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2월 13일
우리도 마침내 피란 짐을 꾸리었다. 어디로 가야 좋을지, 가서 안접할 곳이나 있을는지도 모를 일이며, 또 어디 가서 안접할 곳이 있기로서니 서울을 밀어버린 중공군이 천리길을 멀다 해서 부산은 그냥 둘 것인지 기필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격렬한 시가전이 예상되는 이 거리에 아이들을 데리고 그냥 배겨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1950년 12월 18일
오늘 오후에야 비로소 늦게 길을 떠날 수 있었다. 마침 함박눈이 쏟아지듯 내리고 있었다. 그처럼 떠나기 힘들어서 애태워하던 서울이나 막상 차 위에 올라앉아서 눈보라 속으로 사라지는 서울의 거리를 돌아다보니 일말의 감회 없을 수 없다. 그야말로 시원섭섭한 감상이었다. … 서울아, 잘 있거라.

1950년 12월 23일
부산에 닿았다. 바다가 바라보이는 조선의 남쪽 끝이다. 손발은 꽁꽁 얼고 얼굴은 때투성이가 되어 피란 보퉁이를 안고 부산바닥에 내렸으나 당장 오늘 하룻밤을 드샐 곳이 없다. 차를 끌고 낯선 거리를 밤늦게까지 헤매었으나 하룻밤 들어가 쉴 여관방 하나 얻을 수가 없다.  우리의 도착이 이미 늦기 때문에 방이란 방은 모두들 꽉 차 있다고 한다. 그러나 서울선 이 부산을 향하여 들이미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지 모르는데.

1951년 4월 8일
삼월 삼짇날. 거센 항구의 바람 속에서 꽃은 피고지고. 피란꾼이 고달픈 살림살이 속에서 봄을 맞이하였다. 아내와 더불어 앞으로 할 일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힘써 아이들에 관한 책을 읽고 번역하고 그러는 중에 우리도 붓을 들어서 적어도 아미치스의 <사랑의 학교>에 비길 만한 작품 하나는 후세에 거두자고.

- 김성칠 지음 창비 '한 사학자의 6 ․ 25 일기' <역사 앞에서>에서 뽑음

1950. 7. 29. 경북 영덕에서 인민군 병사가 수로에서 엎드린 채 죽어 있다.
▲ 인민군 병사의 시신 1950. 7. 29. 경북 영덕에서 인민군 병사가 수로에서 엎드린 채 죽어 있다.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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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 11. 14. 함흥 덕산에서 학살된 시신더미에서 아들을 찾고 있는 아버지.
▲ 사무치는 부정(父情) 1950. 11. 14. 함흥 덕산에서 학살된 시신더미에서 아들을 찾고 있는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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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의 포화에도 숭례문은 버티고 있다.
▲ 1950. 3. 숭례문(남대문) 한국전쟁의 포화에도 숭례문은 버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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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무렵에 부쩍 늘어난 구두닦이 소년들
▲ 구두닦이 소년들 한국전쟁 무렵에 부쩍 늘어난 구두닦이 소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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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된 시신더미들
▲ 1950. 9. 전주 학살된 시신더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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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 김성칠 선생은 당시 서울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한국전쟁 중인 1951년 10월 8일 고향 영천에서 한 괴한의 저격으로 작고하셨습니다.

* 매우 아픈 마음으로 연재 마무리합니다.



태그:#한국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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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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