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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일 백마고지에서 만난 노병들 주선태, 원유철씨
 현충일 백마고지에서 만난 노병들 주선태, 원유철씨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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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생각해도 너무 끔찍한 전쟁이었지요, 다시는 그런 전쟁 또 일어나면 절대 안  됩니다."
"어디 이 백마고지뿐이겠어요? 얼마나 많이 죽었는데요. 너무 참혹해서 기억하는 것도 끔찍합니다."

지난 6월 6일 현충일에 백마고지에서 만난 노병들과 나눈 이야기다. 현충일을 맞아 6·25 한국전쟁 당시 가장 치열한 공방전으로 피아간에 수많은 젊은이들이 피를 흘리고 죽어간 강원도 철원에 있는 백마고지를 찾아보았다.

서울에서 아침 8시에 출발했지만 도로가 많이 막히는 바람에 백마고지 전적지에 도착해보니 정오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시간이 늦어 전적지에서 열린 추모행사는 이미 끝나고 행사에 초대되었던 백마고지의 옛 노병들도 대부분 돌아간 뒤였다.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충혼비와 위령비, 그리고 기념관이 있는 위쪽으로 올라가다가 나이 들어 보이는 두 사람의 노인을 만났다. 혹시나 하여 물어보니 한 분은 당시 7시단 소속이었던 주선태(82) 노인과 2사단 17연대 수색중대 소속이었던 원유철(82) 노인이었다.

주선태 노인과 원유철 노인도 현충일을 맞아 모처럼 백마고지를 찾았다가 우연히 만난 생면부지의 사이였다. 그러나 노인들은 같은 시기에 전쟁에 참여했다가 어렵게 살아남은 노병들이어서 오랜 지기를 만난 듯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함께 입대한 친구들 중에 살아남은 친구가 많지 않아요, 아마 반은 죽었을 거예요."
"내 친구들도 그래요. 나도 살아남으리라는 희망은 거의 포기하고 싸웠는데 정말 우연히 살아남은 거예요."

노인들은 50여 년 전의 끔찍한 기억을 떠올리기가 괴로운지 눈을 감았다가 뜬다. 나이가 같은 82세인데도 주 노인은 거동이 불편한 원 노인과 달리 매우 건강한 모습이었다. 주 노인은 원 노인에게 건강관리 잘 하라며 어깨를 감싸 안아 주고 자리를 떴다.

추모비와 위령탑
 추모비와 위령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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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으로 오르는 길 중간쯤에 있는 높다란 조형물 사이에 있는 기념관에는 당시의 전투경과를 상세히 기록해 놓은 게시판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 유명한 백마고지 전투는 1952년 10월 6일 밤에 첫 전투가 시작되었다.

당시 이 백마고지는 제9사단 30연대가 지키고 있었다. 1952년 10월은 막대한 전쟁피해로 더 이상의 전쟁수행능력이 한계에 도달한 북측의 요청으로 휴전협상이 진행되고 있던 시기였다. 따라서 휴전협상이 성사되면 당시의 상호 군사접촉선이 군사분계선이 될 것이었기 때문에 한 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려고 전투는 더욱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이러한 전쟁 상황 속에서 1952년 9월 이후에는 수도고지, 지형능선, 불모고지 일대에서 서로간의 막대한 인력 손실을 고려하지 않은 혈전이 벌어졌다. 더구나 10월에 들어서자 북측은 이곳 백마고지를 탈취하기 위해 당시 중국 모택동으로부터 '만세군'이라는 칭호를 받은 중공군 정예군단인 제38군 3개 사단을 투입했다.

백마고지는 철원평야를 품에 안은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중공군 3개 사단과 아군 9사단 사이에 벌어진 전투는 1952년 10월 6일 밤 첫 전투를 시작으로 10월 12일까지 12차례에 걸친 공방전이 벌어졌다.

기념관 벽에 걸려 있는 백마3용사 부조
 기념관 벽에 걸려 있는 백마3용사 부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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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고지를 뺏고 빼앗기는 쟁탈전은 피아간에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여 해발 395미터인 작고 나지막한 산 전체를 피로 물들이고 시체가 산을 뒤덮었다. 바로 이 전투에서 우리 전쟁사에 명성을 남긴 '백마 3용사(강승우 소위, 오귀봉 하사, 안영권 하사)의 신화가 남겨지기도 했다.

10일 동안 12차례 쟁탈전을 벌인 치열한 전투는 국군이 발사한 포탄 21만9954발, 중공군이 발사한 5만5000발 등 총 27만4954발의 포탄이 작렬하여 중공군 1만여 명이 죽거나 포로가 되었고, 아군도 34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나지막한 작은 산에서 벌어진 이 전투는 세계 전쟁사에서도 유례가 거의 없는 치열한 전투였다. 이 전투로 산 전체가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없는 민둥산이 되었고, 하얗게 헐벗은 모습이 누워있는 백마의 모습과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 백마고지가 된 것이다.

기념관을 둘러보고 언덕 정상에 오르니 둥그런 광장에 종이 매달려 있는 정자 하나가 나타난다. 상승각이었다. 상승각에서 바라보니 바로 아래 작은 들을 건너 나지막한 산이 바라보인다. 바로 백마고지였다. 우리가 오른 전적지는 실제 전투가 벌어진 백마고지가 아니었던 것이다.

백마고지는 휴전선 가까이 군이 주둔하고 있는 곳이어서 민간에 개방되지 않고 있었다. 대신 남쪽으로 작은 들을 건넌 이곳에 전적지를 만들어 6·25 한국전쟁 당시 가장 치열했던 전투를 벌이며 지켜낸 백마고지를 기념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적지에서 바라보이는 작은  들건너 백마고지
 전적지에서 바라보이는 작은 들건너 백마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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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전적지 아래 들녘은 모내기가 끝나 파릇파릇 자라나는 벼가 푸른빛을 더하고 있는 모습이 평화롭기 짝이 없는 풍경이었다. 그 평화로운 풍경 어느 곳에서도 50여 년 전 그때의 포성과 총성, 그리고 죽음이 뒤덮였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일행들과 함께 주변을 살펴보고 있을 때 역시 거동이 조금 불편해 보이는 노인 한 분이 다른 두 사람의 부축을 받으며 올라오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혹시 하는 마음에 노인에게 다가가 인사를 드린 후 당시 이곳 참전 노병이 아닌지 물어보았다.

"나도 6·25때 전쟁에 참가하긴 했지만 이곳은 아니야. 내가 싸운 곳은 화천 금성지구였어, 나는 8사단이었거든, 그곳 전투도 중공군이 인해전술로 밀고 내려오는 것을 막는 싸움이었는데 참 대단했지."

김아무개(84) 노인은 당시 상황을 떠올리는지 잠깐 상념에 젖는 모습이었다. 노인이 겪은 가장 치열했던 전투도 역시 휴전협상이 진행되고 있던 시기였다고 한다. 강원도 화천지역인 금성전투도 중공군을 맞아 매우 치열하고 참혹한 전투를 벌였다고 했다.

"그런데 요즘 보면 전쟁이라도 날 것 같던데 이곳에 와보니까 오히려 조용하네."
"왜요? 또 전쟁이 날까봐 걱정되세요?"
노인이 전쟁 걱정을 하는 표정이어서 노병의 의견을 듣고 싶어 물어보았다.

"아, 그렇잖아? 북한에선 핵실험이다. 미사일이다. 하고 겁을 주고, 남한에선 해볼 테면 해봐! 하는 것 같은데 이러다가 잘 못하면 전쟁 나는 것 아녀?"

노인은 숨이 가뿐지 조금 헐떡거렸지만 발음은 매우 정확했다.

"그러면 안 되지. 전쟁을 안 겪어본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전쟁 그거 다시 또 나면 큰일 나, 나라 망해. 북한이 미쳐 날뛴다고 덩달아 날뛰면 되나?  나야 살 만큼 산 사람이지만, 전쟁 나면 다 죽을 텐데, 그러면 되나, 어르고 달래야지. 그렇게 서서히 통일로 가야지, 전쟁이라도 나면 어쩌겠다는 거야?"

북쪽으로 뚫린 논둑길, 저 길이 언제쯤 압록강까지 자유로운 길이 될까?
 북쪽으로 뚫린 논둑길, 저 길이 언제쯤 압록강까지 자유로운 길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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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은 상당히 격앙된 표정이었다. 숨소리가 거칠어지고 얼굴도 붉게 상기되고 있었다. 노인이 흥분하는 것을 본 아들들이 걱정이 되는지 아버지를 진정시키며 부축하고 자리를 떴다. 백마고지를 찾은 사람들은 대부분 노인들이었는데 그들 노인들 중에는 아직도 그 참혹했던 전쟁을 기억하며 진저리를 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전쟁은 절대 안 된다고.

"옛날에는 이곳에 민간인들이 쉽게 들어올 수 없는 곳이었는데 많이 달라졌구먼."

40여 년 전에 근처에서 군복무를 했던 일행은 감회가 새로운가 보았다. 몇 년 전부터 일반 민간인들에게도 자유롭게 개방되었다는 백마고지 전적지는 오후가 되면서 찾는 발길이 뜸해져 내려오는 길은 매우 한산한 모습이었다.

덧붙이는 글 | 찾아가는 길: 의정부에서 43번 국도를 따라 동송읍까지 간 후 백마고지 전적기념관 안내판을 따라가면 된다.
이 기사는 유포터뉴스에도 송고합니다



태그:#현충일, #전쟁, #백마고지, #이승철, #노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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