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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일 경복궁 앞에서 영결식을 마친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운구행렬이 노 전 대통령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며 온통 노란색으로 물들인 시민들 사이를 지나 서울광장을 빠져나가고 있다.
 29일 경복궁 앞에서 영결식을 마친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운구행렬이 노 전 대통령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며 온통 노란색으로 물들인 시민들 사이를 지나 서울광장을 빠져나가고 있다.
ⓒ 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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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올 수 없는 먼 길 떠나는 이를 배웅하는 건 쉽지 않다. 제 아무리 '강심장'인 사람이라도 영원한 이별 앞에서는 가슴이 먹먹해지는 게 세상 이치다. 그렇다면 가장 여린 촉수를 세상에 내밀고 있는 시인들의 이별 뒤 감정은 어떨까.

도종환, 안도현, 김진경. 이 세 시인은 지난달 29일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서울광장에서 열린 노 전 대통령 노제에서 안도현, 김진경 시인은 조시를 낭독했고, 도종환 시인은 노제를 이끌어 가는 제관을 맡았다.

수십만 인파는 안도현 시인의 "아무런 호칭 없이 노무현이라고 불러도 우리가 바보라고 불러도 기꺼이 바보가 되어줘서 고마워요"라는 외침을 들으며 가슴을 쳤고, "잘나고 힘 있는 소수가 사실상 모든 걸 결정하고 이끌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은 늘 당신의 존재를 두려워했습니다"라는 김진경 시인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의 빈자리를 실감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제관 도종환 시인의 선창 "노무현 대통령님, 당신을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를 따라 외치며 광장에서 노 전 대통령을 놓아줬다.

시인으로서 같은 광장에서 같은 인물의 넋을 위로했던 이들에게는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바로 1980년대에 국어교사로 일하며 해직을 겪었다는 점이다.

가장 선배인 김진경 시인은 서울 양정고등학교에 재직 중이던 1985년 이른바 '민중교육지 사건'으로 구속돼 1년 2개월간 수감 생활을 했다. 이후 교육 운동에 투신해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초대 정책실장으로 일했다. 해직 15년 만인 2000년 교단에 복직했고, 2005년에는 청와대 교육문화비서관으로 일하기도 했다.

도종환 시인은 1977년 청산고등학교에서 국어교사로 교직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1989년 전교조 활동으로 해직됐다가 1998년에 복직했다. 안도현 시인 역시 1985년 2월 이리중학교 국어교사로 교직을 시작했으나 1989년 8월 전교조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해직을 당했다. 그는 1994년 교단에 복직했다.

또 세 시인은 현 한국작가회의의 모태인 자유실천문인협의회에서 활동하며 친분을 쌓았다. 노 전 대통령 노제 총감독을 맡은 김명곤 전 문화관광부 장관은 "세 시인이 다른 누구보다 훨씬 진지하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추모를 할 것으로 봤다"며 "같은 해직 교사 출신인지는 전혀 몰랐다"고 말했다.

세 시인 역시 "공교롭게 그런 공통점을 갖게 됐다"며 옅게 웃었다. 1일 전화와 이메일로 세 시인의 노제 이전과 이후 이야기를 들어봤다.

▲ [안도현 조시]고마워요 미안해요 일어나요
ⓒ 오마이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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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현 시인] "이명박 정부 들어 표현의 자유 망가져"

노무현 전 대통령 노제 때 수십만 군중 앞에서 쏟아낸 안 시인의 육성이 아직도 생생하다.

"저 가증스런 낯짝의 거짓 앞에서 슬프다고 말하지 않을래요
저 뻔뻔한 주둥이의 위선 앞에서 억울하다고 땅을 치지 않을래요
저 무자비한 권좌의 폭력의 주먹의 불의 앞에서 소리쳐 울지 않을래요"

시인은 "울지 않겠다"고 외쳤지만 많은 사람들은 눈물을 쏟았다. 그리고 가슴을 쳤다. 뙤약볕 아래 광장에 선 사람도, TV로 지켜본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눈물바다'라는 표현의 실제 상황이 무엇인지 많은 사람들은 그날 직접 체험했다.

시인이라고 눈물이 없어 그리 쓰고 외친 게 아니다. 그건 오히려 지독한 역설이자 자신을 위로하기 위한 안간힘이었을 것이다. 사실 안도현 시인은 조시 낭독에 앞서 "오래도록 마음을 가라앉혀야"만 했다. 시인은 1일 당시의 심정을 짧게 정리해 메일을 보내왔다.

"조시를 읽을 때, 시보다 눈물이 앞서가면 어떡하나, 마음을 오래 가라앉혔습니다만, 잘 안되더군요."

노제에 앞서 노 전 대통령 장의위원회는 "대통령께서 평소 그의 시를 좋아했다"며 안도현 시인의 조시 낭독 배경을 설명했다. 하지만 시인은 "노 대통령이 제 시를 좋아하신 것보다 제가 노 대통령을 더 좋아했을 겁니다"라고 고백했다. 

시인은 지난 3월말 전주막걸리와 홍어를 사 가지고 봉하마을을 찾았다. 시인과 전직 대통령은 밥과 술을 들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굳어버린 남북관계, 봉화산에 얽힌 어린시절의 추억, 그리고 안도현 시인이 추진하고 있는 북한 사과나무 보내기 운동 등.

시인은 "노 전 대통령 목소리에 열정이 있었지만, 당시에도 심란해 하는 분위기를 느낄 수 었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시인은 지난달 23일 노 전 대통령 서거 소식을 듣고 지인들과 술을 한 잔 나눴다. 그때 시인은 이미 불귀의 객이 되어버린 노 전 대통령 몫으로 술 한 잔 따라놓고 눈물을 쏟았다. 시인은 지금 현업으로 돌아와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지만 여전히 마음이 좋지 않다. 떠나간 이에 대한 슬픔 때문만은 아니다. 시인이 보내 온 메일은 이렇게 끝난다.

"노제 후 인터넷에 오른 글들(제가 쓴 '조시'에 대한)을 보면 저의 신변이 걱정된다는 이야기도 있더군요. 이 정도의 이야기와 표현을 걱정하는 분들이 있는 걸 보면 역시 이명박 정부에서 표현의 자유는 심하게 망가져 있구나, 싶습니다."

노 전 대통령 국민장 내내 봉하마을에는 시인의 시가 적힌 현수막이 5월 바람에 펄럭였다.

"연탄재 발로 함부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 <너에게 묻는다>

▲ [김진경 조시]당신의 아름다운 사랑은 왜 이렇게 말해질 수밖에 없었는가?
ⓒ 오마이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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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경 시인] "노무현의 외로움이 생각나 조시 쓰며 울었다"


"정치인이었지만, 그분 삶에는 시적인 부분이 무척 많습니다."


대다수 사람들이 노 전 대통령 삶을 두고 "극적이다"고 말하지만 그는 "시적이다"는 표현을 썼다. 시인다운 그의 색다른 표현에 순간 고개를 주억거렸다.

김진경 시인은 2005년 5월부터 2006년 5월까지 청와대 교육문화비서관으로 일했다. 이 시기는 노무현 정부와 열리우리당이 이른바 '4대 개혁입법(국가보안법, 사립학교법, 과거사법, 신문법)'으로 한참 고민이 많을 때다.

그래서 김 시인은 노 전 대통령과 함께 힘겨운 시기를 보낸 기억을 고스란히 갖고 있다. 시인과 대통령은 사립학교법 개정에 뜻이 잘 맞았다. 하지만 사립학교 재단의 반발은 예상을 뛰어넘었다.

"사립대학 총장들이 신입생을 뽑지 않겠다고 배수진을 치기도 했어요. 밖에서는 당연히 모르겠지만, 대통령은 무척 외로워하고 힘들어했습니다. 새벽 6시에 대책회의를 소집하기도 했고, 대통령께서 참모들에게 '이럴 때 대통령이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이 뭔지 헌법이든 뭐든 다 찾아서 오라'고 요구하기도 했어요."

김 시인은 "(기득권층의) 말도 안 되는 반발과 저항을 보면서 당연한 상식을 현실에서 실현시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뼈저리게 느꼈다"고 회고했다. 이어 그는 "(개혁 진영이) 정권을 잡았지만 바다 위에 홀로 떠 있는 배 한 척이나 다름없었다"며 "정말 많이 외로웠다"고 밝혔다.

이처럼 김 시인은 "상식"을 세우는 데 따르는 힘겨움과 외로움을 많이 이야기했다. 그래서였을까. 김 시인의 조시 <당신의 아름다운 사랑은 왜 이렇게 말해질 수밖에 없었는가?>에는 유독 상식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당신은 늘 외로운 노무현이었습니다.
그 작고 아름다운 상식을
편리함을 위해 너무도 쉽게 저버리는 우리들 속에서
당신은 늘 바보 노무현이었습니다."

그에게 노 전 대통령은 바보처럼 상식을 지키려다가 죽음으로 내몰린 안타까운 사람이다. 함께 청와대에 있으면서 노 전 대통령이 겪은 외로움의 무게를 알기에, 김 시인은 "조시를 쓰면서 너무 많이 울었다"고 했다. 

▲ [도종환 시인]"당신을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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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종환 시인] "축시 낭독했던 내가 제관을 맡다니"

"그분의 몸은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산산조각이 난 것은 우리 민주주의, 균형발전, 평화로운 나라를 바라는 간절한 소망이 산산조각 난 것일지도 모릅니다."

제관을 맡은 도종환 시인은 50만 군중 앞에서 또박또박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산 자의 마음을 죽은 자에게 전달하고, 죽은 자의 뜻을 산 자의 가슴에 심어주는 힘이 있었다. 그렇게 시인이 이끄는 노제는 호소력이 강했다.

노제를 연 것이 제관의 몫이었다면 닫는 것 역시 그의 책임이다. 도종환 시인은 "슬프지만 보내야 할 시간"이라며 사람들을 다독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순간만큼은 제관의 뜻을 따르지 않았다. 이별은 더없이 더뎠고, 제관은 소리 높여 외쳤다.

"노무현 대통령님, 당신을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군중은 제관을 따라 외치며 비로소 노 전 대통령을 조금씩 놓아줬다. 하지만 정작 누구보다 노 전 대통령을 보내기 싫어했던 건 제관 본인이었다.

이처럼 도종환 시인은 노제에서 힘겹고 중요한 역할을 맡았지만 노 전 대통령과 대단한 인연이 있는 건 아니다. 2003년 노 전 대통령 취임식 전야제에서 축시를 낭독한 게 인연이라면 인연이다.

하지만 그날 이후 도 시인은 "시인이 권력에 욕심이 있다"는 세상의 따가운 눈총을 받아야만 했다. 그는 "노무현이라는 인물이 대통령을 할 만큼 우리 민주주의가 발전했다는 뜻으로 축시를 낭독했지만 세상은 다른 눈으로 봤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도 시인은 노무현 정부 내내 산골에서 지냈다. 세상의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한 선택은 아니었다. 건강이 좋지 않았기에 스스로 도시를 등진 것이다. 도 시인이 건강을 회복하고 다시 세상에 나왔을 때 노무현 정부 임기는 끝이 났다. 그리고 얼마 뒤 노 전 대통령은 고향마을 뒷산에서 스스로 몸을 던졌다.

"축시를 읽으며 참여정부의 출범을 축하해줬는데, 그 주인공의 마지막 길 배웅하는 일을 맡다니···. 참 마음 아프고 기막힌 일이죠."

정부 출범 전날 축시를 낭독한 시인이 마지막 마침표까지 찍은 셈이다. 그의 말대로 참 기막힌 일이자, 쉽지 않은 임무였다. 하지만 도 시인은 그 모든 일을 묵묵히 해냈다. 사실 안숙선 명창, 가수 양희은 등도 노무현 정부 출범 전야제 때 축가를 불렀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노제에서 조가를 불렀다. 시인과 명창의 축하 목소리로 정부를 열었던 노 전 대통령은 다시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떠나갔다.


태그:#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안도현, #김진경, #도종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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낸시랭은 고양이를, 저는 개를 업고 다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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