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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62년 공업특정지구로 지정된 이후 울산은 말 그대로 조국 근대화의 기수가 됐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저임금과 인권침해, 공해라는 부산물이 깔려 있었다.

 

지방의 조그마한 농어촌이던 울산에는 그후 수십 년간 대규모 공장들이 속속 들어섰다. 아름답던 해변가엔 세계 최대 조선소와 자동차 공장이, 밭과 들에는 정유공장이 들어섰다.

 

하지만 조근 근대화의 기수라던 노동자들은 저임금과 임권침해를 고스란히 감수해야 했고, 수 많은 노동자들이 일을 하다 죽어갔다. 

 

지난 1987년 노태우의 소위 6.29 선언이 있자 노동자들은 그동안 억눌렸던 자아를 한꺼번에 쏟아내기 시작했다. 현대중공업을 위시한 울산의 대단위 공장들은 1987년 노조를 만든 후 몇 년간 노동자 권리 찾기에 나선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노동자 대투쟁 시기라고 부른다.

 

당시 그 중심에는 현대중공업이 있었다.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은 1988년 1백28일이라는 사상 초유의 파업을 이어가며 온 나라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그 때 인권변호사이자 막 부산 동구에서 국회의원 뱃지를 단 정치초년생 노무현 전 대통령이 울산을 방문한다.

 

파업 현장을 방문한 노 전 대통령은 2만 현대중공업 노동자들 앞에서 "지금 파업은 불법이지만, 법은 정당할 때 지키고 정당하지 않을 때는 지키지 않아야 한다. 악법은 국민의 손으로 철폐시켜야 한다"면서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그런 사회를 위해 우리 다함께 노력하자"고 열변을 토했다.

 

그후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권리찾기는 몇 년을 이어갔다. 노 전 대통령은 1990년 그 유명한 현대중공업 골리앗 투쟁 현장을 다시 찾았다. 조선소 노동자들은 82미터 높이 골리앗에서 다위이 돼 절박성을 외쳤다.

 

당시 골리앗 투쟁을 벌였던 이갑용 전 동구청장은 "노 전 대통령이 골리앗에 올라와 다치지 말아라, 합리적으로 해결하도록 중재하겠다고 말했다"며 "1988년 '법을 초월해 투쟁해야 한다'고 했을 때에 비해  중재자의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고 말했다.

 

울산국립대 약속을 지키기 위한 노력

 

지난 2002년 3월, 당시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선 노무현 후보는 울산에서 "꼭 국립대를 설립하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해 12월 19일 노무현 후보는 대통령에 당선됐다. 하지만 울산시민이 학수고대하던 이 공약은 지연돼 시민들은 3년간 애간장을 태워야 했고, 이 3년동안 노 전 대통령은 자신의 공약을 관철하기 위해 정부 관료들과 싸웠다.  

 

당시 기자는 시민단체인 '울산국립대설립범시민추진단' 사무국장으로 있으면서 60만 서명운동 등의 실무를 맡았다.

 

울산시민의 논리는 이랬다. 산업화로 인구 110만 대도시로 발전한 울산이 정작 교육 수준-특히 고등교육 기관 부족-은 타 도시에 비해 현저히 떨어진다는 것. 4년제 대학이라곤 울산대 하나뿐이고, 2년제도 울산과학대학과 춘해대, 기능대학(현 폴리텍대학)이 전부인 현실이 이를 반영했다.

 

울산에서 매년 1만3000여명의 대학 진학 희망자가 나오는 데, 지역내 대학 정원을 합쳐봐야 6000여명에 불과했다. 니머지 7000여명은 원하지 않아도 타 도시로 진학해야 했고, 하숙비 등 학부모의 교육비 부담은 컸다.

 

이런 연유로 울산시민들은 4년제, 그것도 학비 부담이 적은 국립대 설립을 강력히 원했고, 노무현 후보는 이를 공약으로 약속했다.

 

결과적으로 울산과학기술대(울산국립대)는 국내 최초의 특수법인화국립대라는 기형적인 모습으로, 그것도 시민들이 바라던 지역 학생의 고등교육 기회 여망을 저버린 채 올해 3월 개교했다.

 

울산과기대는 전국 5% 상위권 학생이 대부분인 5백명의 정원으로, 이들에게 전액 장학금으로 제공하면서 울산시민이 원하던 바와는 판이하게 출범한 것이다. 

 

기자는 당시 범시민추진단 사무국장으로 울산시청 담당 공무원과 함께 울산국립대 설립과 관련한 노무현 대통령의 행보를 하나하나 모니터링했다.

 

당시 교육부는 노 대통령의 수 차례 지시에도 "대학구조조정이 진행되고 있는 상태에서 울산에만 대학이 들어서면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논리로 대통령의 뜻을 반대했다.

 

노 전 대통령은 이후 "대학구조조정을 똑같은 틀로 봐서는 안된다. 울산에 꼭 국립대를 설립하겠다"고 수차례 공언했다. 전 열린우리당 고위 당직자에 따르면 노 대통령의 이같은 지시에 교육부 관료들이 매번 반대 논리를 폈다고 한다.  이후 노 대통령과 교육부 관료들의 줄다리기는 수년간 계속됐다.

 

노 전 대통령은 인수위 시절인 2003년초 전국 순회토론회에서 "울산의 국립대학은 이전이든 신규 설립이든 교육에 불편이 없도록 협의하겠다"고 했고, 그해 4월 11일 울산 방문에서는 "울산 대학문제 대책을 강구하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노 대통령은 2003년 9월 열린 부산 울산 경남지역 언론사 합동인터뷰와 12월에 열린 전국 시도의회의장 초청 오찬에서도 "적극적이고 설립가능한 방향으로 울산국립대 설립을 검토하라"고 배석한 참모들에게 지시했다. 하지만 교육 관료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자 다음해인 2004년 1월 29일 지방분권 및 국가균형발전시대 선포식에서 노 전 대통령은 "교육부 장관은 국립대 설립 불허방침에 따라 절대 불허한다고 하지만 대통령은 울산에 국립대를 설립하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다시 2004년 7월 인천지역혁신발전 5개년 토론회에 참석한 노 전 대통령은 "(교육부 관료가) '전국적으로 대학생 수가 줄어 정원이 축소되고 있는 데 어떻게 대학을 늘리느냐'고 하길래 지역마다 수요가 다른 데 국가라는 한 통속에 넣고 지역사정을 무시할 수 있느냐" 고 말했다.

 

전 열린우리당 당직자는 "대통령은 '농촌이 폐교한다고 도시에 학교를 새로 안 지을 수 있나'며 '110만도시 울산에는 국립대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사실을 시민에게 알려도 좋다'고 약속했었다"고 전했다.

 

그로부터 1년 뒤인 2005년 9월 16일 교육부와 울산시는 '울산국립대설립을 위한 양해 각서(MOU)를 체결함으로써 마침내 울산국립대 신설이 확정됐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이같은 발언들은 문서로 고스란히 남아 있다.

 

2009년 5월 23일 노무현 대통령은 스스로 몸을 던져 서거했고, 울산에서는 울산대공원 동문광장과 종하체육관, 동구청, 정토사, 민주당 울산시당사, 울산대학교에 각각 분향소가 차려져 많은 시민들이 조문했다. 특히 울산대공원에서는 조문하려는 시민들의 행렬이 29일 새벽까지 이어졌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시사울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울산국립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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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지역 일간지 노조위원장을 지냄. 2005년 인터넷신문 <시사울산> 창간과 동시에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활동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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