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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역 앞 광장에 설치된 시민 분향소에서 시민들이 절하고 있는 모습
▲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평택역 앞 광장에 설치된 시민 분향소에서 시민들이 절하고 있는 모습
ⓒ 박소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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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명 '여명의 황새울'. 지난 2006년 5월 4일, 미군 부대 확장에 반대하면서 마을을 지키려던 사람들은 경찰의 곤봉과 방패에 포위됐고, 포크레인이 지나간 자리엔 무너진 대추초등학교의 잔해만 남았다. 그 때 청와대와 국방부 앞을 문턱이 닳을 정도로 찾아가 항의했던 대추리 사람들은 "그때 대통령이 미안하단 말 한마디 했다면…" 하는 여한을 안고 있었다.

원망도 할 법 했다. 하지만 죽음 앞에서 그들은 맺힌 마음을 풀었다. 이주민들의 임시거처인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송화리의 '대추리 마을회관'에 모여 있던 할머니들은 "불쌍하고 안됐다"고 입을 모았다.

"곧고 민주화에 힘 쓴 사람이었지. 원망도 몇 천 번 했는데, 그래도 불쌍해. 죽지 말고 살아서 해결했어야지."

한 할머니가 목소리를 높이자, 옆에 있던 다른 할머니가 거들었다.

"잘했든 못했든 큰일 한 사람인데 너무 아까워. 대추리에 있을 땐 엄청 욕도 했지만…난사람이었어. 그때 일은 그때 일이고 아까운 사람이야."

옆에 앉아 있던 송재국(72) 할아버지도 "우리가 설움 겪을 땐 싫었고 욕도 나오고…그런 게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안됐어"라고 말했다.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을 대하는 대추리 주민들의 마음이 '안타까움'이라면, 평택역 앞 광장에 설치된 시민 분향소를 찾은 조문객들의 마음은 '슬픔'이란 두 단어가 대신하고 있었다.

26일의 태양은 유난히 강했다. 그 열기만큼이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대하는 추모 열기 또한 뜨거웠다. 전날 막 설치된 분향소에는 이틀 동안 약 4천명이 다녀갔다.

밤늦도록 추모 행렬은 계속 됐다.
▲ 편히 쉬소서 밤늦도록 추모 행렬은 계속 됐다.
ⓒ 박소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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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 방소라 양은 "어제도 오고 오늘 또 왔다"며 "영정사진이 쓸쓸해 보여서 마음에 걸렸다"고 말했다.

아이의 손을 꼭 잡고 분향소를 찾은 부모들도 많았다. 두 딸과 함께 헌화, 분향한 뒤 나오던 김순희(35세, 안성)씨의 눈가는 촉촉히 젖어 있었다.

"아이들은 잘 모르겠지만, 함께 기도해주고 싶었어요. 지금은 우리 민주주의에 아픔이 있지만 성숙해지고 상생하는, 더 나은 민주주의가 되었으면 합니다. 이 분의 죽음이 그저 지나가는 과거가 아니라 정치권이 더 성숙해지는 계기가 되어야 해요. 이렇게 보내선 안 되잖아요…."

해가 지고 바람이 불었다. 밤이 이슥해질수록 사람들의 발길이 점점 늘어났다. 추모행렬은 대한문이나 봉하마을과는 비교도 안 되는 3~4m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끊이질 않았다. 학생과 청년들은 조문 자체가 어색해 절을 하면서 옆 사람을 힐끔힐끔 쳐다보곤 했다. 모두 검은 정장을 갖춰 입고 분향하는 가족도 있었고, 말없이 조문객들과 노 전 대통령의 영정을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50대 조 모씨는 조문 행렬을 바라보며 말했다.

"평택은 개방적이면서도 정치적으론 굉장히 보수적인 도시입니다. 그래서 각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시민들이 이렇게 분향하는 걸 보고 '아직 의식이 죽지 않았구나'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모두가 위선을 깨닫고 진실을 바라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밤이 깊어질수록 향내음이 짙어졌다. '노무현'이란 한 사람이 떠난 곳에는 그를 그리워하고, 그가 남긴 우리 사회의 과제를 되새기는 '사람들'이 남았다. 과거의 원망을 잊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추모곡 노랫말처럼 '밝은 해가 뜨는 그날 우리 다시 만나자'고 기원하는 사람들이.

덧붙이는 글 | * 박소희 기자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대학원생



태그:#노무현, #평택, #분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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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정치부. sost38@ohmy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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