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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1일부터 대한민국은 사실상 경찰 계엄 상태다. 5월 1일과 2일, 촛불집회 때 241명이 연행된 데 이어 5월 16일 대전 노동자대회에서 457명이 연행되었다. 여기다 한 술 더 떠 정부는 20일 관계부처 장관회의를 열고 '폭력시위가 우려되는 도심 대규모 집회를 원칙적으로 불허 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민생민주국민회의, 전교조, 아고라, 촛불시민 연석회의 등 20여개 시민, 네티즌 단체를 "불법좌파 단체"로 규정하고 "상습 시위꾼" 2500여 명을 검거하기로 했다는 경찰의 비밀문건도 공개되었다.

 

그런가 하면 수십 년간 통일운동을 해왔던 단체 인사들이 국가보안법으로 잇달아 구속되고 있고 평택 미군기지 반대투쟁, 뉴코아-이랜드 투쟁 등 이미 사법처리가 마무리된 사건들을 다시 끄집어 내 체포하고 구속시킨다. 하기야 술기운에 어떤 시민이 경찰에게 말을 걸면서 대통령 흉을 좀 봤다 해서 잡아가는 세상이니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요즈음엔 경찰이든 교도소든 정부기관을 찾아가 인권이 어떻고 이야기하면 들으려고도 않는다. 저들은 늘 저들 나름대로의 고정된 관점과 논리가 있다. 사실관계만이라도 왜곡하지 않으면 다행일 뿐이다. 그러고 나서 명령한다. 마치 국민에겐 정부의 명령을 따를 의무만 있지 요구할 권리는 없는 것처럼.

 

지난 5월 4일, 나는 경찰청 앞에서 '메이데이 촛불집회' 강제연행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에 참석했다가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 이틀 동안 유치장 신세를 졌다. 내가 왜 그 고생을 해야 했는지, 지금 생각해봐도 잘 모르겠다. 그 자리에서 내가 한 거라곤 기자회견 장소를 내주지 않기에 무슨 근거로 그렇게 하냐고 경찰 간부에게 따진 것, 그들이 지정해 준 장소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데도 "정치적 발언" 한다면서 "불법집회"라고 해산을 명령하기에 "기자회견 방해하지 말라"고 소리친 것뿐이다. 그런데 돌아온 건 "현행범" 긴급체포다.

 

경찰은 이제 의사 표현의 구체적인 방법, 내용까지도 통제하고 있다. "정치적 발언"의 경계는 어디까지일까? 오로지 경찰만이 알 수 있다. 기자회견을 할 때마다 내 주장이 어디까지가 "정치적"인지 따져가며 자기 검열을 할 수밖에 없다. 정치로부터 소외된 서민들이 기자회견(기자도 별로 오지 않지만)을 하는 것 자체가 정부나 정치인들에게 국민의 준엄한 목소리를 알리고자 함인데, 그런 발언을 하지 말라니? 차라리 옥외에선 '절대 기자회견 금지'라고 밀어 붙이는 게 더 솔직하겠다.

 

그건 그렇고 집회가 뭐 범죄행위라도 되나? 현행 집시법 아래서, 경찰이 집회 '허가권'을 쥐고 흔드는 한 언제든 범죄행위로 치부될 수 있다. 이것은 누누이 지적돼 왔지만 언론, 출판, 집회, 결사에 대한 허가 제도를 인정하지 않는 헌법 21조를 위반하고 있는 것이다. 

 

정부나 경찰은 '평화적이고 합법적인 집회는 최대한 보호하겠지만 불법폭력 집회는 엄단 하겠다'며 입버릇처럼 떠든다. 경찰이 보호(?)해주는 합법적이고 평화적인 집회, 어떤 것일까?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한적한 곳, 경찰버스 차벽과 전경들로 삥 둘러쳐진 고립된 공간에서 열심히 구호를 외치며 노래도 불러보지만 집회장 밖에 있는 사람들은 무얼 하고 있는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그나마 언론을 타기라도 하면 다행일 텐데 쉽지가 않다. 돈 없고 힘없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서 여론을 형성해 보자는 게 집회·시위의 목적인데 이렇게 하고나면 별 효과도 없기 때문에 참가자들은 맥이 빠져 버린다. 물론 관제 행사나 보수 우익 단체들의 집회는 예외가 된다.

 

5월 16일 대전에서 노동자들이 죽봉을 들고 시위 좀 한 거 가지고 난리다. 나도 그날 현장에 있었지만 이명박 정권의 광기가 어떤 것인지 재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날 집회는 대한통운 택배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다 산화해간 고 박종태 열사를 추모하고 특수고용직 노동자들의 노동3권 보장을 촉구하는, 숙연한 분위기의 집회였다. 게다가 비까지 내렸다. 대전 정부청사 앞 광장에 모인 화물연대 조합원들은 파업을 결의했고 연대하러 왔던 많은 노동자, 시민들이 뜨거운 박수로 지지를 보냈다. 물론 합법적인 집회였다. 그런데 경찰이 허용한 행진 코스는 정말 이상했다.

 

보통 행진은 어느 목적지를 정해놓고 집회현장에서부터 걸어가는 게 일반적인데 이 날은 그게 아니었다. 1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차량을 타고 이동해서 대전 도심에서 벗어난 중리 사거리(신탄진 방면)에 내려 열사의 시신이 안치된 대전 중앙병원까지 약 1.7km 정도만 행진하도록 허용한 것이다. 경찰은 표면적으로는 "도심교통방해"를 우려해서 그렇게 했다지만 비도 내리는데다가 이동 차량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일대 교통은 더 혼잡스러워졌다.

 

그날 병원 앞에서 대한통운 물류기지까지 1.7km 더 가는 게 문제 해결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될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도 그랬고 집회에 참석했던 사람들 대부분 그렇게 하는 게 최소한의 도리라고 생각했다. 죽어라고 부려먹기만 하다가 운송료 30원 더 올려 달랬다 해서 문자 메시지로 78명의 택배 노동자들을 해고해 버리고 열사를 끝내 죽음으로 몰아넣은 대한통운 앞에 가서 고함이라도 한 번 질러보고 싶었던 것이다. 대한통운은 아직도 이명박 정권의 빽을 믿고 뻔뻔스럽게 버티고 있지 않은가?

 

경찰이 행진을 더 이상 막을 명분도 없었다. 그곳은 비교적 한적한 곳인 데다가 먼저 신고 된 집회는 열리지 않았으니까 만약 경찰이 집회 참가자들의 이런 요구를 허용했다면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경찰의 대응은 우리가 상상한 것 이상이었다. 4차선 도로에 차벽을 쌓아 놓고 색소와 최루액을 섞어 물대포를 쏘아댔다. 초장부터 부상자가 속출했다. 내가 아는 어떤 여성 사진기자는 전경의 방패에 코뼈가 부러져 들려나왔다. 노동자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경찰 저지선이 뚫렸고 우리는 대한통운 앞에까지 갈 수 있었다. 집회 대열이 전경들의 수보다 더 많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들뜬 기분도 잠시, 날이 어둑해질 무렵, 방송차에 올라간 사회자가 집회 종료를 선언하자마자, 경찰병력이 쏟아져 나왔다. 긴 몽둥이를 휘두르면서 최루액을 발사했다. 쫓겨 가다 넘어지면 압사까지 우려되는 상황, 뒤처진 사람들은 경찰의 군홧발에 짓밟히며 난타를 당했다. 그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닥치는 대로 아무거나 집어 들어 사람을 팼다. 150여 명의 부상자가 그렇게 해서 발생했다. 나와 함께 갔던 한 여성 활동가는 인도에서 토끼몰이를 당한 후 방패에 어깨를 맞고 쓰러졌는데, 전경이 죽봉으로 배를 찌르면서 확인 사살(?)까지 했다고 한다. 세상에 그런 악귀들이 따로 없었다. 당시 노동자들이 '죽창을 든 폭도'라고?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다. 1980년 5월, 광주를 그렇게 매도하고 고립시키면서 학살로 몰아가지 않았던가? 

 

집회의 자유는 언론, 사상, 표현의 자유 등과 더불어 민주주의의 척도이고, 민주주의를 가능케 하는 원동력이다. 그런데 이명박 정권은 지금 민주주의를 절단 내고 있다. 왜?

 

900만이 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무더기로 해고되고 있고 실질 실업자가 340만 명이 넘어가는 상황임에도 "노동시장 유연성 확보"가 "한 치도 늦출 수 없는 중요한 과제"라며 밀어붙이고 있는 저들의 정책 속에 잘 드러나 있다. 인권을 위해 필요한 법 절차는 간단히 무시해 버리는 저들과 '죽창이냐, 죽봉이냐' 따위의 논쟁을 벌이기엔 시간이 너무 아깝다. 그 사이 죽어가고 있는 서민들의 숫자는 늘어만 간다. 이제는 당장 살기 위해서, 뭐든지 들어야 할 때다. 대규모 집회와 강력한 파업 그리고 필요하다면 죽창까지도!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를 쓴 이광열씨는 현재 구속노동자후원회 사무국장으로 재직중입니다. 이 기사는 인권연대 웹진 주간 <사람소리>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경찰 게엄, #집회 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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