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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에서 <성장친화형 진보>의 역자 홍종학 교수와 최재천 변호사의 '진보, 성장을 말하다' 대담을 생방송합니다.

"성장친화형 진보정책은 '진보는 무능력하다'는 선입견을 불식시킬수 있는 전략"이라고 주장하는 홍종학 교수와 "정책적 뒷받침이 되는 새로운 가치와 비전, 진보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최재천 변호사가 대담을 갖습니다.

'진보, 성장을 말하다' 대담은 오는 6월 9일 오후 4시에 오마이뉴스 스튜디오에서 열리며, 오마이TV를 통해 생중계됩니다. 많은 시청 바랍니다. <편집자말>

1. 홍종학 교수의 담대한 기획

 

홍종학 교수(경원대 경제학)는 고민이 많다. 지난 수년간 홍 교수는 "한국 경제의 성장엔진을 재점화 할 수 있는 진보개혁적 정책"을 모색해 왔다. 진보개혁 진영의 과제가 막중함을 깨닫고 대안을 찾으려 애써왔다. 진보의 꿈을 재구성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그는 '진보개혁적 정책전문가'로서 "울트라 토건국가의 전략만을 구사하는 현 정부 이후에 우리가 지향해야 할 정책"은 무엇인지를 고민했다. 세계적으로 공감대가 형성된 성장전략을 찾아 나섰다.

 

담대한 기획의 하나로 미국 민주당에서 경험을 찾았다. 그 결과,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경제보좌관을 지낸 진 스펄링(Gene Sperling)의 <성장친화형 진보(Pro-growth Progressive)>라는 책을 번역해 우리 사회에 내놓았다. 책의 제목이 모든 걸 말하고 있지만, 부제 또한 그의 의도를 분명하게 강화시켜 준다. '함께 번영하는 경제전략(An Economic Strategy for Shared Prosperity)'. 이것이야말로 홍 교수의 정책적 비전이다.

 

홍 교수가 추구하는 '성장친화형 진보' 전략은 이렇다. "보수의 칼을 들고 보수가 점령하고 있는 진영에 들어가 승부를 결정짓는 정면돌파"다. 성장친화형 진보는 "성장을 추구하는 일반 대중의 욕구를 무시한 채 분배만을 강조했던 수세적인 자세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대에 맞는 진보의 전략을 제안하는 발상의 전환"이다.

 

홍 교수의 전략은 자신이 역자 서문에서 거론했듯, 2000년 유럽 정상들이 합의한 '리스본 전략'에 맞닿아 있고, 2006년 미국 민주당의 중간선거 전략인 '해밀턴 프로젝트'와 연결된다.

 

'리스본 전략'은 ① 일자리 창출과 사회통합을 기반으로 하여, ② 지속가능한 경제성장을 달성할 수 있는, ③ 최고의 경쟁력을 갖춘 역동적인 지식기반경제를 구축하는 것이다.

 

미국판 리스본 전략이 '해밀턴 프로젝트'다. '해밀턴 프로젝트'의 3대 원칙은 ①폭넓은 계층의 국민을 포괄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경제성장은 더 견고하고 지속가능하다 ②경제적 안정성과 성장은 상호 상승작용에 의해 강화된다 ③효율적인 정부는 경제성장을 촉진할 수 있다는 것으로 정리된다.

 

'해밀턴 프로젝트'는 오바마노믹스(Obamanomics)로 연결된다. 미국의 진보진영은 오바마 시대를 위해 어떤 사회경제정책을 준비했을까. 세계화 시대 진보진영이 추구해야 하는 경제정책은 어떠해야 할까. '이명박 이후'를 예비하는 대한민국의 진보개혁 진영은 이런 세계사적 흐름과 공인된 정책으로부터 무엇을 빌려오고, 무엇을 고쳐 써야만 하는 것일까.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번역이 아니다. 기획이다. 정책의지다. 홍 교수가 진보개혁 진영을 자임하는 사람들에게 싸움을 걸어왔다.

 

2. 진 스펄링의 새로운 협약, "시장개방을 통해 정치․경제 개혁을 확대하자"

 

미국 민주당 경선 후보였던 힐러리 클린턴은 '친글로벌화'를 표방했던 남편의 입장과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느꼈다. 그래서 미 민주당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었던 리처드 게파트를 '반글로벌화' 세력의 지도자로 영입한다. 그렇다고 힐러리는 '친글로벌화'를 결코 배제할 수는 없었다. 결코 거부할 수 없는 흐름이었기 때문이다. 그 정책 자문그룹 속에 진 스펄링이 포함됐다.

 

"스펄링은 여전히 '친글로벌화' 입장을 고수했지만, 글로벌화된 시장이 야기한 불안과 걱정을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데이비드 스믹, <세계는 평평하지 않다.(The World is Curved)>, 326면)

 

힐러리 클린턴의 고민이나 지금 우리 사회 진보진영의 고민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글로벌화'가 곧 신자유주의일 수는 없다(물론 신자유주의화와 세계화는 서로 분리가 불가능하다는 입장도 있고[알프레두 사드-필류․데버러 존스턴 편저 <네오리버럴리즘>] '신자유주의글로벌화'라는 용어의 조합을 통해 문제를 지적하는 학자도 있다). 그렇다고 대한민국 일부 계층이 주장하듯, '반글로벌화'가 곧 반미가 될 수는 없다.

 

이런 식의 극단적 낙인이 창조적 토론을 저해한다. 이럴 때면 필자가 즐겨 사용하는 말이 있다. "글로벌화는 우리가 알고 있는 민주주의 제도와 혼인제도, 이 두 제도와 매우 비슷하다. 두 제도 모두 동시에 문제가 있지만, 대안은 더욱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저자는 양극단으로 나뉘어진 세계화에 대한 찬반논쟁을 넘어서는 새로운 협약을 주창한다. 자유무역의 성과를 솔직하게 논하고, 현실을 인정한 다음, 시장개방을 통해 정치․경제 개혁을 확대하자고 제안한다(이 책이 들고 있는 대표적인 사례가 중국이다. 중국과의 자유무역이 중국의 개혁개방을 촉진시켜 왔다는 논리이다).

 

새로운 협약은 보호무역의 피해자들에 대한 선제적 지원방안, 촘촘한 사회적 안전망, 단순하면서도 폭넓은 구조조정 적응지원 시스템, 고용주가 다른 경제적 대안이 없을 때만 일자리를 없애도록 하는 것 등이 그 내용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 정도의 내용은 특별히 새로울 것이 없다. 극단적 자유무역주의에 대한 국내적 보완조치로 이 정도라면 충분히 고려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세계무역기구(WTO) 틀 내의 범위를 벗어날지 여부에 대해서는 검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다만 이 책이 씌어진 시점(2005년)과 번역된 시점 사이의 세계사적 변화에 대해선 한마디 언급해야만 한다. 얼마 전 <파이낸셜타임즈>(FT)는 "정치와 시장 사이의 영구적인 갈등 속에서 지금은 의문의 여지없이 정치가 우위에 있다"라고 선언했다. 국가가 되돌아왔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했다. 그때만 해도 그랬다. 그 권력이 시장에서 국가로, 시장에서 정치로, 재벌에서 정치로 되돌아오고 있는 중이다.

 

신자유주의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던 글로벌화가 중대한 이론적 기반의 한 축을 잃어가고 있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글로벌화와 새로운 이념의 시대의 글로벌화가 어떤 차이를 가지게 될지에 대해선 예측할 수 없다. 하지만 새로운 세계사적 조류에 맞는 새로운 글로벌화의 기준과 가치는 좌표를 조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저자가 이 책을 쓸 때만 하더라도 이 부분에 대한 문제의식은 예상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한 가지만 더. 대한민국은 2008년 기준으로 GNI 대비 수출입 비율이 110.6%이고, GDP 대비 무역의존도는 83.5%에 이른다. 그렇다면 다른 나라의 글로벌화와 대한민국의 글로벌화는 다른 기준과 별개의 지향을 가져야 한다. 그 개방은 전략적이어야 한다.

 

이를테면 대한민국 헌법은 국가차원의 주택개발정책을 규정한 세계 유일의 헌법체계다. 이런 나라가 한미자유무역협정(FTA)에서는 투자자-국가소송제(ISD) 편에서 '저소득층을 위한 주택정책 등 부동산가격 안정화정책'만 제외하고는 몽땅 내주었다. 그 부분에 대해서만 국가정책의 주도권을 투자자 소송의 예외로 남겨놓은 것이다.

 

잘 알다시피 대한민국 헌법은 미국 헌법에 전혀 없는 경제질서조항을 가지고 있다. 헌법 제119조 제2항은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고 했다. 이 찬란한 모순의 증표가 한미FTA요, 그 중에서도 ISD요, 그 중에서도 압권은 사실상 부동산정책을 포기해 버린 일이다.

 

국가의 정책주도권을 결코 내놓지 않는, 선량한 국가의 정책조정권한을 유보해 놓는 전략적 개방으로서의 세계화에 대한 한국식 새로운 협약은 분명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협약에 대한 문제의식은 전적으로 동의하되, 각론 차원의 검토는 도리어 전면적이어야 한다.

 

3. 잘 먹고, 잘 쉬고, 잘 일하는 사회가 '성장친화형 진보'의 기초

 

스펄링은 이 책을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했다. 두 번째 부분이 앞서 본 세계화 부분이고 세 번째 부분이 인력, 네 번째 부분이 저축이다. 역시나 첫째 부분은 자신이 제시하는 '성장친화형 진보'에 대한 개념 구성이다.

 

저자가 생각하는 진보의 가치는 이렇다. "자기 삶의 책임을 다하는 사람은 경제적 품위를 누려야 하고, 경제적 지위상승의 기회를 얻어야 하며, 출신성분이 평생의 결과를 과다하게 결정하지 않도록 공정한 출발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진보의 3대 가치는 경제적 품위, 사회적 지위상승의 기회, 공정한 출발의 세 가지로 요약된다. 그 가치를 위해 저자는 '성장친화형 진보'를 주장하는 것이다.

 

이런 자신의 입장을 저자는 "(민주당도 공화당도 아닌) 제3의 당 노선"이라 표현한다. 그리곤 잠시 겸양을 깔아 그 당에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겸손당"이라 했다. 그러나 당명은 겸손이되, 주장은 오만이다. 자신의 입장을 정립하기 위해 좌우 양편과 싸울 수밖에 없었다.

 

먼저 우파에 대한 비판. "우파에 속하는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역동성 경제가 던지는 이런 도전들에 대해 작은 정부가 경제성장을 촉진한다는 이데올로기적 전제를 깔고 접근한다. 그렇게 해서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다음은 좌파에 대한 비판. "좌파에 속하는 많은 사람 역시 근로가구를 도우려면 일자리를 지키거나 임금 등의 혜택을 보전하고자 경쟁을 제한해야 한다는 전제로부터 시작한다."

 

앞서 본 글로벌화에 대해서도 양쪽을 싸잡아 비판한다. 글로벌 경쟁으로 위협받는 노동자와 지역사회 문제에 관해서 "보호무역주의자들은 미래에 대한 비전이 없고, 자유무역주의자들은 현재에 대한 비전이 없다"는 식이다. 비판을 통해 차츰차츰 자신의 입지를 확보해 나가는 슬기로움이여. "이러니 시장의 힘을 존중하는 동시에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우리의 진보적 가치들을 희생시키지 않고 성장을 일궈내는 정책에 관한 심도 있는 논의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가 제시하는 새로운 접근법은 "진보주의자들이 역동적인 경제현실에 실용적으로 접근해야만 하며, 최대한 성장 친화적인 대안을 찾아 진보적 목표를 달성"하자는 것이다. 이런 논법을 통해 제시하고자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성장친화형 진보'다.

 

이쯤 되면 뻔한 비판이 따라붙게 된다. 좌우의 절충에 불과한 '제3의 길'이 자칫 장점의 통합이 아닌 단점들의 집합이 될 수 있다는 논리가 그것이다. 그에 대한 저자의 선공은 이렇다.

 

"성장친화적인 진보주의자란 진보적 가치를 타협한다거나 맹탕인 중도주의나 공화당 닮은꼴로 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진보적인 가치와 경제성장을 구현하는 계획들을 갖춘다는 것을, 그리고 두 가지 목표는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이라는 것을 깊이 이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여튼 미국의 현실 속에서 스펄링의 '제3의 길'이 오바마를 통해 실현가능한지를 지켜보는 것도 제법 흥미로울 것 같다. 우리의 준비가 '이명박 이후'이기에 그래도 시간은 우리 편일 수 있다. 오바마의 시행착오가 우리의 경험이 되어야 한다.

 

역동성 경제의 노동력에 대한 핵심적 제안은 '근로장려 모델'을 확대하는 일이다. 지원과 근로를 연계시켜 개인에게 혜택이 가도록 하는 '근로장려 모델'을 제시한다. 연방정부 차원의 '근로장려 세제'를 확대하고, 지방단위에서도 '근로장려 세제'를 도입하는 한편, 새로운 장애노동자 근로장려 세제(Disabled Worker Tax Credit, DWTC)까지 제안한다.

 

가난한 집일수록 교통비, 육아비, 교육비가 많은 현실은 미국이나 한국이나 똑같은 모양이다. 강력한 대안을 요구한다. 우리의 생각과는 정반대로 가족휴가를 늘리자고 한다. 유급휴가도 대폭 확대하고, 신생아휴가세액공제라는 지극히 낯선 제안도 있다. 대학교육개혁, 취학전 교육개혁, 소수민족 청소년들에 대한 지원과 보호, 장애인들의 잠재력을 살려나가는 일, 기초연구 투자에 대한 제안 등이 '성장친화형 진보'의 인력정책이다. 공정한 출발, 이른바 잘 먹고, 잘 쉬고, 잘 일하는 사회가 기초다.

 

이명박 행정부의 최대임금정책과는 정반대다. "적정한 최저임금 상승은 직장에서 품위 있게 일할 수 있어야 한다는 진보의 목표를 달성하면서도 노동 유연성을 제한하거나 일자리 손실을 가져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네 개의 장 중 마지막 제안은 '함께 저축하는 나라가 함께 성장한다'라는 것이다.

 

"성장친화형 진보는 저축과 부의 창출이 경제전략의 결정적 요소임을 인정해야 한다. 첫째, 우리가 국가적으로 새로운 비용 분담의 사회적 협약에 동의한다 할지라도, 많은 가족은 불가피한 혼란에 대비한 완충장치로서 추가적인 저축이 필요할 것이다. 둘째, 임금이 정체되는 기간에 생산성 향상이나 자산가치가 상승하는 것을 고려할 때, 보통 노동자들이 늘어난 저축과 투자를 통해 이익을 공유할 수 있다."

 

부자들을 위한 세금감면에 대해서는 비판적이다. 특히, 상속세의 폐지는 "경제적 성공이 출생이라는 우연의 결과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근면에 의해 결정되는 미국의 비전에 반한다"라고 주장한다. 이런 맥락에서 세금감면에 대한 진보측 입장을 이렇게 정리한다.

 

"이제 진보는 세금감면에 대한 공급 중심자들의 이념적 집착으로 말미암아, 연방정부의 정책이 중산층의 근면을 존중하는 미국인의 전통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어야 한다."

 

저자의 염려는 한국적 현실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한국 사회는 특유의 이분법 사회라서 더욱 그렇다.

 

"그러나 논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진보진영은 부에 '대립하는 것으로서의' 노동에 찬성하는 견해를 취하는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유념해야 한다. 성장친화형 진보는 우리가 저소득과 중간소득 미국인의 노동을 존중한다는 점, '그리고' 우리가 이 나라의 중추를 이루는 근면한 수천만 미국인들의 부의 창출과 경제적 지위 상승을 위해 온갖 노력을 할 것이라는 점을 명확히 하는 메시지와 정책 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4. 민주당에게 '한나라당 이중대'라는 말은 결코 억울하지 않다

 

이제 미국을 떠나 한국의 현실로 되돌아 올 때다. 이명박 행정부가 죽을 쑤어도 결코 한나라당의 지지를 대체하지 못하는 민주당이 있다. 그 민주당이 최근 '뉴민주당 선언' 초안을 내놓고 토론을 시작했다.

 

비전1은 '온정적이며, 유능한 정당', 비전2는 '성장과 기회의 정당'이다(당장 용어의 불편함을 숨기기가 쉽지 않다. 온정주의는 미국 공화당의 상징 아니었던가. 유능한 정당? 스스로의 무능을 반성하고 자인하는 셈이라고 치자). '뉴민주당 선언'의 기본 입장은 "보수와 진보의 낡은 이분법을 뛰어 넘는 '제3의 길'이 있다"는 것이고, 이는 "좌우의 일차적 직선이 아니라, 이를 뛰어 넘는 '새로운 꼭지점'에 존재한다"는 것이다.(뉴민주당 선언 설명자료)

 

그렇다면 이런 민주당의 선언은 스펄링이 주장하는 '성장친화형 진보'와 어떤 유사점을 찾아볼 수 있을까. 혹은 지난 시절 앤서니 기든스의 '제3의 길'과 사실상 같은 것으로 이해해도 될까.

 

미국을 향해 저자는 말한다. "적자를 폭증시키는 세금감면의 원래 의도는 기업이 무제한적인 자유를 누리도록 하자는 것이 아니라 정부라는 괴물을 억제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세금감면은 이런저런 부작용을 피하거나 제거하기 위해 필요한 정책을 집행할 정부의 능력을 깎아먹음으로써 오히려 열린 무역과 활력 넘치는 시장, 건전한 경쟁을 저해할 수 있다."

 

2009년 한국에는 '감세', '규제완화', '작은 정부'라는 신자유주의적 기조를 결코 벗어나지 못하는 행정부가 있다. 그리고 사실상 이에 동조해 온 민주당이 있다. 분명한 차이다. 

 

보수언론과 뉴라이트가 좌파라고 지칭하는 순간 스스로 좌파가 되어버린 정당이 있다. 법인세를 내리고, 소득세 인하를 통해 국민소득 3만 달러를 달성하려는, 이명박 행정부의 747공약에 버금가는 철저한 성장위주의 전략을 추구했던 정부와 정당이 있었다. 이들이 이제 와서 '저는 좌파입니다. 저는 반기업적입니다. 저는 반부자적입니다'라고 고백한다. 그리곤 좌파인 양 하며 지금까지의 반성을 토대로 좌우를 뛰어 넘는 '제3의 길'을 모색해 보겠다고 한다.

 

무능을 고백하면서, 유능을 지향하지만 시민들은 믿지 못한다. 왜냐하면 입으로만 정책을 노래했을 뿐 제대로 된 정책을 가져본 적도, 정책과 현실을 일치시키기 위해 노력해 본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민주당은 애초부터 좌파적 성격도, 좌파적 정책도, 본래적 의미의 분배와 복지를 지향해 본 적도 없다. 그랬다면 대한민국의 복지 관련 지출비율이 결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최하위일 리가 없을 것이다.

 

그랬던 이들이 '제3의 꼭지점'에 대한 비교정치적 근거를 슬그머니 미국 민주당과 미국 민주당 소속 이론가들의 정책에서 끌어오는, 터무니없는 태도를 연출한다. 지극한 편의주의다. 이미 미국 민주당도, 오바마 행정부도 '성장친화적 노선'을 선택했다며 무작정 끌어다 붙인다. 다리를 어깨에다 이식하는 꼴이다.

 

민주당에 대한 비판적 입장 때문에 혹여 이 책의 가치에 흠집이라도 날까 염려스럽다. 미국식 저술의 특장이 그러하듯, 이 책 또한 철저히 실용적이고 실제적이다. 예를 들어보자. 인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방편의 하나로, 취학 전 교육의 중요성을 제시한다.

 

그 대목은 이런 식의 논리로 구성된다. 먼저 아동을 위한 보육지출 비용 1 달러가 4~7달러의 수익이 발생한다는 연구결과를 제시한다. 클린턴 대통령은 취학 전 교육의 질적 개선을 위해 1993년 28억 달러에서 2001년 62억 달러로 보육지출을 두 배 이상 증가시켰다는 정책적 경험을 얘기한다. 하지만 부시정부는 그렇지 않았다며 선명하게 대비시킨다. 그런 다음 새로운 현실에 적합한 대안을 제시한다.

 

다시 민주당을 보자. 대한민국 '뉴민주당 선언'에선 이런 논리를 찾아보기 어렵다. 보육 예산의 확대를 위해서 지난 참여정부가 어느 정도의 노력을 기울였는지, 무엇을 잘못했는지, 그리고 이명박 행정부의 정책과는 무엇이 다른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 그저 '선언'일 뿐이다.

 

굳이 한 가지만 더 예로 들어야겠다. 노무현 행정부의 방과후 학교와 이명박 행정부의 방과후 학교가 어떤 차이가 있고, 어떤 정책적 지향이 다른지에 대해 반성도 비판도 없다. 스펄링은 방과후 학교는 본래 방과후 보육 프로그램의 일환이었음을 분명히 제시하고 이를 통해 여성들이 마음 놓고 일자리에 나설 수 있고, 그래서 진보진영에서도 성장에 친화적인 역동적 경제를 구축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저자의 정책은 '실용'이되, 민주당의 선언은 그저 '선언'일 뿐이다. 이 책의 미덕은, 다시 강조하거니와 어떠한 정책적 주장도 자신의 백악관 경험과 예산을 다루었던 경험과 의회를 설득했던 경험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난 8년간의 클린턴 행정부 시절의 구체적 경험을 통해 회고와 대안을 이야기한다.

 

미국 민주당은 지난 부시행정부 8년 동안 정책과 비전을 가다듬고 새로운 인물을 준비했다. 이 책 또한 정권탈환을 위한 미 민주당 사람들의 정책활동 중의 하나였다. 미국 정치의 미덕은 여기에 있다. 민주당 사람들은 민주당 사람들대로 새로운 시대를 예비하는 책과 정책을 준비하고 쏟아냈으며, 공화당 사람들은 공화당 사람들대로 부시 이후를 준비했다. 물론 시대와 비전과 정책과 인물은 미국 민주당의 편이었다.

 

오늘의 오바마는 이런 안정된 토대 위에서 등장했다. 개인기만으로 대통령이 되고, 결국 그 개인기로 인해 실패하고 마는 (누군가의 표현을 빌자면, 한국의 대통령들은 자신이 성공해 온 방식 그대로 실패했다) 우리와는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 사회는 탄광의 카나리아가 목이 찢어져라 울고 있다. 하지만 그 소리는 듣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만 들려온다.

 

정신적 자유는 규제의 늪에 빠져 있되, 재산과 소유와 토지와 재벌의 자유는 자유방임형이다. 대외의존도는 갈수록 높아져 간다. 노동시장의 비정규직 비율은 OECD 국가 중 2등이라면 서럽다. 사교육비도 마찬가지다. 내 집 마련 비용도 그렇다. 자살률 또한 그렇다. 인간다운 삶과는 갈수록 멀어져 간다. '정글자본주의'는 오늘의 대한민국 사회를 황폐화시키고 있다. 남북관계는 시대를 역행한다. 냉전과 악의적 무시의 길로, 남과 북 모두 서로가 서로의 위험을 강화시킨다.

 

그렇다면 한국 사회의 진보적 가치는 어디에서 출발해야 할까. 민족적 측면에서는 통일지향적인 '평화프로세스'다. 정치적 측면에서는 '강화된 민주주의'다. 경제적 측면에서는 '지속가능한 발전'과 '공공성 확보'다. 그리고 이들 사이의 견제와 균형이다. "민주주의나 시장이나 그 기본 원리는 견제와 균형이다."(홍종학 외, <한국경제 새판짜기>, 59쪽)

 

'한나라당 이중대'라는 말은 결코 억울하지 않다. 왜냐하면 "경제성장을 최우선 정책 목표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를 경제정책의 기조로, 재벌과 대기업을 성장의 중심동력으로, 노동자 농민 등 사회적 약자를 소외시키는 쪽으로 한나라당과 민주당 공히 똑같은 정책목표"(최장집)를 엄격히 지켜왔기 때문이다. 사회경제적 정책의 차별성은 없다. 다만, 민족 문제에 대한 접근 방식과 영호남이라는 지역대표성의 수준 차이가 한국형 보수와 진보의 가르마다.

 

그래서 새로운 진보는 필요하다. 새로운 가치와 비전이 선행되어야 한다. 정책적 뒷받침이 따라야 한다. 가치와 정책 중심으로 세력이 재편되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다음 시대를 예비하는 리더십이 창출되어야 한다.

 

홍종학 교수가 기획하고 진 스펄링이 출연한 '성장친화형 진보'는 이러한 진보의 재구성에 때로는 귀감으로, 때로는 반면교사로 늘 우리 곁에 있어야만 한다. 그보다 더한 가치가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정치서평은 지난 5월 22일에 작성한 것입니다.


태그:#홍종학, #진 스펄링, #성장친화형 진보, #뉴민주당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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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무법인 한강 대표변호사, 김대중평화센터 고문으로, 연세대 의과대학 외래교수, 이화여대, 영남대, 전남대 로스쿨 및 광운대 겸임교수로 재직중입니다. 홈페이지는 www.e-sotong.com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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