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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기자가 기사를 써야지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요?"

 

오체투지 순례단 대열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하자 기어코 한 말씀 하신다. 명호 순례단 진행팀장의 눈빛에는 '이 사람, 잘할 수 있을라나?'하는 걱정과 우려가 어려 있다. 그래도 명 팀장은 "천천히 가니까 큰 무리는 없을 거예요"라고 내 어깨를 툭 치며 격려한다.

 

그래, 그의 말처럼 기자는 기사만 쓰면 된다. 잘 쓰면 좋고, '팩트' 하나로 세상을 놀라게 하면 더더욱 좋다.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 기사를 평가하는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기도 하지만, 하루 아침에 철거민과 경찰 6명이 불타 죽는 이 사회의 구체적인 비극은 종종 '글(기사)'을 무기력하게 만든다.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고 했던가. 지렁이처럼 꿈틀대는 가장 낮은 자세로 저 멀리 지리산에서부터 이곳 서울까지 올라온 오체투지 순례단을 잘 기록할 자신이 없었다. 106일 동안 기어온 사람을 고작 몇 시간 지켜본 뒤 '지금 심정이 어떠냐' '무엇을 깨달았나' 등의 무심한 질문을 던질 용기도 없었다.

 

20일, 결국 수첩과 펜을 잠시 내려놓았다. 대신 손에 목장갑을 끼고 무릎에는 보호대를 착용했다. 수첩에 글을 쓰지 않고, 오체투지 순례단에 직접 참여했다. 확실히 아스팔트 위에 온 몸을 쭉 폈다가 다시 일어나는 일은, 수첩에 글을 끄적거리는 일보다 어려웠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잘 관찰하고, 잘 쓸 자신이 없으면 몸으로 뛰어들 수밖에.

 

빠른 걸음에 익숙한 나, 자꾸 엇박자를 내다

 

순례단의 20일 일정은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북문에서 시작됐다. 목표는 명동성당까지. 차  타고 가면 10분이면 족하고, 걸어서도 1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다. 하지만 오체투지로 가려면 한참이다.

 

순례단은 문규현, 전종훈 신부 그리고 수경 스님이 맨 앞에서 이끌었다. 그 뒤로 오체투지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두 줄로 길게 늘어섰다. 옆으로는 '반배'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한 줄로 섰다.

 

오체투지는 쉽지 않았다. 5~6 발자국 걸은 뒤 멈춰 서 무릎을 굽혀 아스팔트에 댄다. 그리고 팔을 뻗어 온몸을 땅에 댄다. 그렇게 약 3초간 누워 있다가 진행팀에서 치는 징소리에 맞춰 일어선다.

 

결국 이런 과정의 반복인데, 빠른 걸음에 익숙한 나는 자꾸 엇박자를 내고 만다. 5~6 걸음 뒤 멈춰야 하는데 무의식중에 계속 전진해 앞 사람의 발을 밟았다. 고작 3초를 견디지 못하고 눕자마자 고개를 쳐들기도 했다. 가만히 명상을 해야 하는데, 입에서는 자꾸 한숨이 터져 나온다.

 

다행히(?) 하늘은 흐렸다. 하지만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처럼 아스팔트는 아침부터 저절로 뜨거워졌다. 그곳에 온몸을 대니 그야말로 몸이 후끈 달아오른다. 얼굴은 금방 땀으로 젖는다.

 

오전 11시 30분이 돼서야 서울역에 도착. 지하철 두 정거장 거리를 2시간 30분에 걸쳐서 온 것이다. 기다렸던 점심시간. 순례단에서 해주는 건 없다. 일반 참가자들은 각자 알아서 끼니를 해결해야 한다. 순례단에서는 노란색 조끼와 장갑, 그리고 무릎 보호대만 지급해줄 뿐이다.

 

그럼에도 이날 순례단에는 약 200여 명의 일반 참가자들이 모였다. 개인 참가자도 있고, 단체 참가자도 있다. 20일에는 한국여성단체협의회 관계자 10여 명, 그리고 정토회 관계자 30여 명이 참여했다. 이들은 애써 오라는 이가 없어도 스스로 찾아와 아스팔트에 온몸을 던졌다.

 

어떤 이는 "모든 생명체에게 참회하는 마음으로 엎드렸다"고 했고, 또 다른 이는 "온 몸을 땅에 대니 마음이 편안하다"고 했다. 그리고 한 여성은 "아스팔트도 장소마다 냄새가 다르다는 걸 알게 됐다"고 말했다.

 

정말 그렇다. 식당 앞 아스팔트에서는 눅눅한 음식 냄새가 났고, 주유소 앞에서는 기름 냄새가 훅 끼쳐왔다. 그리고 공사장 앞에서는 시멘트 가루 냄새가, 하수구 맨홀 부근에서는 그에 걸맞은 '향기'가 났다.

 

"이 나라가 몹쓸 병에 걸렸다, 민주주의는 후퇴했고..."

 

오후 2시부터 다시 오체투지가 시작됐다. 앞 사람의 노란 조끼에 적힌 글귀 '사람, 생명, 평화의 길'을 보고 걷다가 엎드린다. 버스 안 승객들도, 에어컨 바람 쌩쌩한 외제차 안 운전자도 신기한 듯 우리를 바라본다. 길을 가던 사람들도 잠시 멈추고 눈길을 던진다. 휴대전화 카메라로 촬영하는 사람들도 있다.

 

참으로 신기하게도, 이날 순례단에게 불평불만을 하는 사람들이 없었다. 도로 옆으로 간다고 해도 느리게 가는 순례단은 자가용과 버스에게 '방해물'일 것이다. 그럼에도 경적을 눌러대거나 인상을 찌푸리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가장 느리게 온몸으로 기어가는 사람들을 향한 예의인 듯싶다.

 

세상은 '빛의 속도'로 빠르게 움직이고 있지만, 오체투지의 속도는 깜짝 놀랄 정도로 느리다. 너무 빨리 가다가 "사뿐히 지나가는 고양이 한 마리도 못 보고" 그 생명을 차로 치어서 죽이는 세상을 오체투지 순례단은 온몸으로 꾸짖는 듯했다.

 

오후 5시 돼서야 명동성당에 도착. 빛의 속도에 익숙한 몸은 느리게 걸으니 오히려 피곤함을 느낀다. 고작 하루 참여했으면서도 온몸이 쑤신다. 나 같은 사람을 106일 동안 기어온 문규현 신부와 수경 스님이 "고생했습니다"라며 위로한다. 두 순례자의 얼굴은 새까맣게 탔다. 하지만 눈빛은 밝고, 미소는 살갑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센스'는 여전히 녹슬지 않았다. 이들은 오후 5시부터 순례단 정신을 경배하는 미사를 열었다. 김인국 신부가 입을 열었다.

 

"전쟁은 이라크와 팔레스타인에서만 벌어지는 게 아닙니다. 지금 우리 인생이 전쟁터가 됐다. 순례단이 한 걸음 한 걸음 작두 위를 걷는 것처럼 고통스럽게 여기까지 왔습니다. 순례자들 때문에 이 세상에서 숨을 쉴 수 있었습니다. 힘과 돈이 있는 자는 기도하지 않습니다. 힘없는 자의 간절한 기도, 그리고 정의의 기도는 하늘을 진동케 할 것입니다."

 

이어 김인국 신부는 "이 나라가 몹쓸 병에 걸렸다, 민주주의는 후퇴했고, 독재는 극성이며 남북으로 연결된 길에는 잡초가 무성하다"며 "죽어가는 것들을 추모하고 죽어서도 잠들지 못하는 영혼들을 위해 참회하자"고 말했다.

 

김 신부의 '말씀'에서 위로가 느껴졌다. 문득 작년 촛불집회 마무리 시기 때 사제단이 대규모 시국미사로 국민들을 위로했던 기억이 겹쳤다.

 

고작 하루 참여하고선 구구절절이 말이 많았다. 오체투지를 마무리하며 장갑과 무릎 보호대를 벗는 순간. 김인국 신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것' 없어도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이, '이것' 없으면 죽는 사람들의 것을 빼앗아 갑니다. 초록으로 치장해 가난한 사람을 수탈하고 생명을 죽입니다. 모두에게 고통스런 시간, 차라리 정직한 절망이 세상을 이롭게 합니다."

 

오체투지 순례단은 이런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세로 참회하는 이들이다. 오체투지 순례단의 최종 목적지는 북한 묘향산이다. 21일에는 시청역에서부터 조계사까지 대규모 순례 행사를 벌일 예정이다.

 


태그:#오체투지, #순례단, #문규현, #김인국, #수경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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