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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정부는 국가인권위와 시민사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가인권위 직제령을 개정해 조직 및 정원을 21% 감축하는 계획을 강행했습니다.  

인권위는 "입법, 행정, 사법 3부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독립기관이라서 '정부 차원의 조직개편'의 대상이 되는 행정부처가 아닐뿐더러 조직 축소는 독립성을 훼손시킨다"고 반발하고 있습니다. 이에 인권위는 직제개편을 단행하는 한편, 국무회의에서 확정된 조직 감축안에 대한 대통령령 효력정지가처분신청과 권한쟁의심판을 헌법재판소에 청구한 바 있습니다.  

시민단체는 정부의 이번 조치가 인권위가 지난해 촛불집회에서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인한 인권침해가 있었다는 결정을 내린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봅니다. 촛불 노이로제에 걸린 이명박 정부가 인권위를 길들이기 위한 '힘 빼기' 차원에서 조직을 축소한 것이라는 시각입니다. <오마이뉴스>는 인권위의 핵심 가치 및 제자리 찾기를 조명하는 법학 교수들의 릴레이 기고를 연재합니다. <편집자말>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를 최고 가치로 하는 헌법국가이다. 헌법은 국가의 존재이유와 그 권력발동의 한계를 분명히 선언하고 있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보장하기 위해 존재한다(헌법 제10조). 국가는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국가안전보장, 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으나 그 본질적 내용은 침해하지 못한다(헌법 제37조 제2항). 이러한 헌법의 기본정신은 지난 20년의 민주화와 자유화를 통해 상당 부분 현실이 되어 왔고 우리는 대내외에 으스대며 그 성취를 자랑스러워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의 출범 1년은 지난 20년의 성과를 한순간에 되돌릴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잉태하고 있다. 이제는 너무나 당연해서 누구도 건드리지 못할 것으로 보였던, 자유민주주의를 지탱하는 견고한 인권과 민주주의의 질서가 그 기초부터 흔들리고 있다. 민주주의의 적을 빙자하여 스스로 민주주의의 적으로 나서는 망동주의자들이 자유민주주의의 이름을 참칭하고 국가의 근본을 흔드는 일을 법과 질서의 이름으로 자행하는 일이 낯설지 않은 일상이 되고 있다.

 

이명박 출범 1년, 인권위 조직축소 파동으로 확인된 반동의 흐름

 

사정이 이런데도 불구하고 대표적 진보 문예인으로 알려진 소설가 황석영씨가 도대체 무슨 근거로 이 정부를 '중도' 정부라고 평가하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최소한 인권정책에 관한 한 황씨의 진단은 옳다고 보기 힘들다. 인권위의 조직축소 파동으로 확인된 반동의 흐름에 둔감한 탓이다. 이명박 정부가 내세우는 궁색하기 짝이 없는 '작은 정부론'이나 얄팍한 행정쇄신론의 밑천은 이미 드러나 있기에 새삼 되풀이할 필요도 없다.

 

헌법체계론상 삼권으로부터 독립된 법률상의 독립기관은 위헌이라는 빈정거림도 마찬가지다. 인권보장을 최고의 가치로 추구하는 헌법체계에서 인권보장의 실질화를 위해 입법권을 가진 국민대표기관이 국가권력의 통제를 목적으로 독립된 국가기관을 설치하는 것을 헌법의 이름으로 부인하는 것은 어떤 헌법정신에 바탕한 해석론인지 의문이다.

 

정부가 대표적으로 내세우는 인권위법에 대한 해석론도 법기술자들의 얄팍한 율법주의적 해석론에 불과하다. 인권위법상 법에 규정된 사항 외에 위원회의 조직에 관하여 필요한 사항을 대통령령으로 정하도록 하였으므로 정부가 일방적으로 인권위의 조직을 축소할 수 있다는 해석론은 법적 권한이므로 권한의 소지자가 자의적으로 행사하는 것이 허용된다는 식의 논리 비약에 불과하다.

 

법은 상식에 기초한 것이어야 하고 법의 실질은 문언에만 있지 않고 그 운용에 있음을 간과한 것이다. 인권위의 탄생 배경과 과정, 인권위 창설 이후의 관행, 인권위의 국제법적 지위나 위상, 다른 국가기관과의 관계나 형평성, 헌법상의 지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절차적․실체적 합리성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인권위는 존재 자체만으로 이명박 정부의 국제위상 면에서 득

 

설령 헌재의 권한쟁의심판에서 이런 류의 법리공방이 정부의 해석론대로 결말지어진다고 하더라도 인권위의 조직축소가 가져온 엄청난 국내외적 위상의 추락을 정당화하지 못한다. 바로 여기에 이번 인권위 파동으로 우리가 겪어야 할 아픔과 슬픔이 있다.

 

애꿎게 헌재의 권한쟁의심판을 기다리게 되었지만 이번 심판은 사실은 불필요했어야 할 과정이다. 왜 꼭 그래야만 했는지에 대해 국민 대다수의 공감을 얻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논란의 여지는 없지 않지만 인권위의 존재 자체나 그 실적만으로 우리 사회의 민주화와 국제사회에서의 위상 면에서 득이 되면 되었지 실이 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인권위는 인신의 구금·보호시설을 포함하여 검찰, 경찰 등 국가기관을 통제하는 국가기관이다. 신체의 자유를 비롯하여 국민의 기본적 인권을 직접적으로 침해할 위험이 높은 시설이나 기관의 활동에 의한 인권침해를 시정하는 기관인 것이다. 인권위의 설치 이후 국가권력의 높은 장벽에 쌓인 인권의 사각지대에 부족하나마 희망이 싹이 돋아나 우리 사회의 편견과 무지의 장막을 걷어내 왔다.

 

그러나 "인권위 축소는 '식물기구화'이자 '유전자변형'"이라는 김승환 교수(전북대 법학전문대학원)의 지적처럼 이번 인권위 조직 축소조치를 통해 별정직과 계약직을 중심으로 구조조정이 이루어지고 일반직 공무원들의 일반조직으로 인권위의 '유전자변형'이 발생할 때 그나마 인권위를 통해 쌓아온 희망의 싹은 고사의 위기에 처하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 결과는 인권사각지대의 부활이요, 인권의 보장기관을 자임하는 사법집행권력의 전횡이다. 우리가 이런 후퇴를 왜 감수해야 하는가.

 

인권위 축소의 국내적 효과는 국제적 위상의 추락과 병행된다는 안타까운 사실도 익히 알려진 바이다. 민주화의 상징으로 인권위가 세계인권운동의 중심축으로 발돋움하면서 쌓아온 국제적 신뢰가 물거품처럼 사라질 운명이다. 인권선진국이라는 상징성은 경제대국에 못지않은 국가경쟁력을 제공한다. 소프트 파워의 중요성이 갈수록 강조되는 세계화의 시대에 무형의 국가적 자산으로 인권보장은 날로 그 진가가 증대되고 있다. 인권위 축소 파동으로 그 자원의 상실이 우려되는 상황인 것이다.

 

인권위를 불온시하는 정부는 자유민주주의를 일탈한 정부

 

인권위를 불온시하는 정부나 사회의 일부 시각은 우리 헌법의 기본정신인 자유민주주의의 중심에서 벗어나 있다. 하나의 생각, 하나의 관점만이 지배하는 사회는 우리가 경원해 마지않는 전체주의 사회의 모습일 뿐이다.

 

우리가 서로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에서부터 자유민주주의는 시작된다. 우리 헌법이 전체주의 사회에서 사회의 동질성을 해치는 존재로 터부시되는 정당을 강하게 보장하고 복수정당제도를 부인하는 국가권력의 발동을 금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다름을 인정하는 출발점은 혹 우리 사회의 다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소수자라 할지라도 불합리한 차별이나 인권의 침해를 받지 않도록 배려하는 관용의 정신이다.

 

관용(tolerance)과 승인(endorsement)은 구별되어야 한다. 우리 사회에 독버섯처럼 번지고 있는 극단주의자들은 관용이 마치 서로 다른 생각을 '승인'하는 것인 양 견강부회한다. 다수와 다른 사상이나 성적 편향을 가졌다고 사상이나 성적 편향이 지배하지 않는 일상생활에서 불필요한 차별을 받거나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인권이 무시당해서는 안된다.

 

그런 소수의 인권에 관심을 가지고 배려한다고 하여 인권위 스스로가 그러한 소수자의 특별한 사상이나 성적 취향을 승인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누군가가 일방통행식으로 다수의 이름으로 국가권력을 남용하지 못하도록, 또 그런 취약한 지위에 있는 소수의 국민이 최소한 몸과 마음을 의탁할 곳을 마련해 주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러나 일부 극단주의자들은 스스로가 심판자가 되어 법과 원칙의 이름을 남용하여 소수자의 인권을 단죄하려 들 뿐만 아니라 그런 불관용의 전횡을 지적하는 인권위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경향이 있다.

 

인권위 강화가 오히려 MB정부가 표방하는 법치에 부합

 

그러나 지금이라도 완전히 늦은 것이 아니다. 이명박 정부는 지난 재보선에서 드러난 민심의 일각은 인권위 파동에 기인한 것은 아닌지 숙고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진정한 법과 원칙이 지배하는 법치사회는 오히려 인권정책의 강화를 통해서만 그 실효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인권정책의 강화는 이명박 정부의 법질서 강화정책이 단순한 공안통치가 아님을 증명하는 반증이 될 수 있다. 인권에의 감수성을 확고히 보여주는 정책의 개발과 지원은 한반도의 평화와 안전을 담보하는 안전판 역할을 할 수 있다. 북한의 인권을 논하기 위해서는 더욱 한국의 인권이 발전하고 있는 모습을 드러내 보여야 한다.

 

따라서 인권위를 축소하기보다는 오히려 강화하는 것이 이 정부가 표방하는 법치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재보선으로 흐트러진 민심을 다질 수 있는 대안은 법무부를 비롯하여 정부부처에 흩어져 있는 인권관련 업무를 인권위 중심으로 재편할 수 있는 전향적 방안을 고민해 보는 것이라고 진언한다면 지나치게 이상적인 몽상에 불과한 것일까.

 

그러나 단언하건대 이런 상식적 셈법을 무시한다면 이명박 정부식의 법치의 파산은 시간문제다. 그 오랜 권위주의의 터널을 거쳐 오면서 우리가 체득한 것이 무엇이었던가? 힘으로는 일시적인 굴종을 강요할 수는 있어도 국민의 동의를 얻어내지 못한다. 국격(國格)은 추락하고 우리는 세계무대에서 지도적 발언권을 행사할 기회를 스스로 저버리게 될 것이다.

 

이명박 정부에 다시 한 번 촉구하고 싶다. 이 정부가 황석영씨가 '중도'라고 진단한 정체성의 씨앗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인권정책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인권위를 인권정책의 중심으로 다시 세우는 용단이 공안통치의 유혹에 빠져 총체적 난국으로 빠져드는 이 정부의 미래를 건져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김종철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의 글입니다. 


태그:#인권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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