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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정신과 영혼을 기려 고향인 정읍 산외면 지금실 마을 입구에 수문장처럼 조성해 놓았습니다.
▲ 김개남 장군 묘역 그의 정신과 영혼을 기려 고향인 정읍 산외면 지금실 마을 입구에 수문장처럼 조성해 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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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을 재촉하는 비가 추적추적 내린 지난 일요일(17일), 혁명가 김개남을 찾았습니다. 그는 전봉준, 손화중 등과 더불어 갑오년 동학농민군 지도자 중 한 사람입니다. 비록 '녹두장군' 전봉준의 그늘에 가려 널리 알려져 있진 않지만, 당시 전주성을 점령한 이후 남원을 중심으로 한 전라좌도를 호령했던 영웅호걸입니다.

호남고속국도 태인 나들목에서 나와 태백준령 못지않은 험한 산세를 자랑하는 진안고원 방향으로 길을 따라 갑니다. 한때 태인은 인근의 정읍이나 김제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큰 고을이었지만 지금은 많이 쇠락해 스산한 느낌마저 듭니다. 스쳐 지나가는 길 새뜻하게 단청을 칠한 호남 제일의 정자라는 '피향정'만이 과거의 영화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의 고향은 두루뭉수리 태인 출신으로 기록돼 있지만, 정확하게는 읍내에서 굽잇길로 족히 20~30분은 더 들어가야 하는 정읍시 산외면 동곡리 지금실 마을입니다. 주소를 알고 찾아가면 모를까 내비게이션에 '김개남'을 입력하면 '김개남장군묘'만 안내합니다. 그런데, 도로도 나 있지 않은 산골 어딘가를 가리키는 통에 한참을 헤매게 되니, 애초에 산외면소재지 근처의 주민들에게 물어 가는 게 좋습니다. 함께 가자고 앞장설지언정 대충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법이 없을 만큼 하나같이 친절합니다.

동네의 웬만한 구멍가게조차 빈틈없이 챙기는 내비게이션조차 잘못 안내할 만큼 김개남에 대한 후세인들의 기억은 흐릿합니다. 전봉준보다 두 살이 더 많았지만 그를 기꺼이 상관으로 추대할 만큼 통이 컸을 뿐만 아니라, 비록 몰락했을지언정 양반 가문 출신이었음에도 신분제의 굴레 속에 억눌리며 살았던 천민들의 삶을 나몰라라 하지 않았던 그였습니다.

혁명을 꿈꿨던 그는 단지 선이 굵었을 뿐입니다. 당시 지배세력인 양반과 중인층까지도 다독이며 끌어들이려했던 전봉준 등과는 달리 오로지 천민을 위시한 민중들의 울분과 강렬한 혁명 의지만을 믿었기에 피아의 구분이 분명했던 겁니다. 기득권에 한 번 안주해 본 계층은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기회주의적으로 행동하고 끝내 변절할 수밖에 없음을 그 누구보다 잘 알았습니다.

그러했기에 그는 봉건세력들과 끝까지 조금도 타협하지 않았고, 후세 사가들에 의해 '강경파'라는 달갑지 않은 낙인이 찍히게 됩니다. 어쩌면 시대를 앞서 사고했고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단호했으며 확신에 찬 실천가였기에 그는 당시 기득권층은 물론 농민군 내부와 후세 사가들에게조차 적잖이 두렵고 꺼려지는 존재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혁명의 동지였던 전봉준과 동학의 교주인 최제우, 최시형 등을 중심으로 동학농민운동이 평가되고 해석되다보니 김개남의 역할과 위상은 종속변수가 될 수밖에 없었고 세월이 흘러 '역사'로 박제화하면서 시나브로 잊혀졌습니다. 이른바 역사 해석을 독점하는 '주류'가 있을진대, 그들의 시각에서 김개남은 늘 예외적 존재로 남을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한우마을'로 꽤 알려진 산외면 소재지에서 옹동면으로 넘어가는 지금재 고갯길 조금 못 미친 곳에 그의 묘역이 조성돼 있습니다. 녹슬고 버려진 경운기만이 마을 고샅길을 지키는 쇠락한 곳이지만, 이 마을의 자랑인 양 수문장처럼 당당하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한양으로 압송되기도 전에 참수되고 곳곳을 돌며 효시되다보니 그의 시신이 수습됐을 리 없고, 곧 고향인 이곳에 그의 정신과 영혼만 담아 가묘를 세운 것입니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가지런하고 푸른 잔디밭 위에 한 쌍의 무인상이 번듯하게 섰고 큼지막한 상석까지 갖췄으니 그런대로 섭섭지 않은 대접을 받고 있는 셈이지만, 여전히 그의 생가터는 폐허로 남아있습니다. '김개남 장군 고택터 0.1km'라는 안내판만 생뚱맞게 크고 새것일 뿐, 정작 안내판만 따라가서는 도저히 찾을 수 없을 만큼 방치돼 있습니다. 생가였음을 알리는 비석은 아예 잡풀더미에 덮혔고, 그의 생애를 적어놓은 철제 팻말이 세워진 곳은 길조차 없는 비닐하우스 뒤입니다.

생가터를 알리는 조그만 비석은 아예 잡풀더미 속에 묻혀있고(사진 왼쪽 아래), 입구 오른편에는 폐가의 지붕이 흉물스럽게 방치돼 있습니다.
▲ 김개남 생가터 생가터를 알리는 조그만 비석은 아예 잡풀더미 속에 묻혀있고(사진 왼쪽 아래), 입구 오른편에는 폐가의 지붕이 흉물스럽게 방치돼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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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길을 두리번거리다 한 촌로의 도움을 받고서야 비로소 찾아간 생가터는 비탈진 마을의 맨 위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대나무 숲이 터를 널찍하게 두르고 있어 집터라고 추측할 수 있을 뿐 그 흔한 주춧돌 하나 남아있지 않고 잡풀만 무성한, 그야말로 폐허입니다. 더욱이 입구 오른편에 버려진 지 족히 십수 년은 됐을 법한 폐가가 흉물스럽게 남아있어 을씨년스러움을 더하고 있습니다.

'수구초심'이었을까요.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 주력이 공주 우금치에서 혈전을 벌이고 있을 즈음, 청주성을 끝내 넘지 못하고 자신이 이끌었던 농민군의 대다수를 잃고 퇴각한 김개남은 이곳 고향 언저리에 머물며 훗날을 도모합니다. 그러나 그의 오랜 친구이자, 후대 항일의병장으로 역사에 길이 남게 되는 임병찬의 밀고로 전라관찰사에게 붙잡히게 됩니다. 비록 친구를 배신했을지언정 면암 최익현의 수제자이기도 한 임병찬에 대해 역사는 대체로 '긍정적' 평가를 내리는 것 같습니다. 이는 곧 그가 버린 혁명가 김개남을 더욱더 불경스럽고 포악한 자로 몰아세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생가터 곁에 큼지막하게 안내 팻말이 서 있지만, 길이 나 있지 않아 접근해 읽을 수가 없습니다. 굳이 읽자면 남의 밭과 비닐하우스를 가로질러가야 합니다.
▲ 김개남 생가터 안내 팻말 생가터 곁에 큼지막하게 안내 팻말이 서 있지만, 길이 나 있지 않아 접근해 읽을 수가 없습니다. 굳이 읽자면 남의 밭과 비닐하우스를 가로질러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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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설에 의하면, 농민군 지도자 중에 가장 먼저 처형돼 효시된 그의 시신은 현장에서 난도질 당했는데, 그를 그토록 증오하고 두려워했던 양반들이 그의 간을 도려내어 돌려가며 씹었다고 합니다. 결국 당대의 역사를 기록하고, 후대 그것을 해석하며 평가하는 모든 '힘 있는 자'들과 척을 질 수밖에 없었던 그는 지금도 여전히 우리 역사에서 적잖이 부담스러운 존재로 남아있습니다.

혁명가 김개남에 대한 지금까지의 역사적 평가가 부족하고 잘못돼 있음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 묘비 '개남장(開南丈)'의 일부 혁명가 김개남에 대한 지금까지의 역사적 평가가 부족하고 잘못돼 있음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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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신념에 지나치게 솔직하고 투철했기에 짧고 굵은 삶을 살다갔고, 역사의 평가 또한 양극단을 달리며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한때 전라도 땅을 넘어 나라 전체를 벌벌 떨게 했던 그였지만, 이곳 고향 지금실과 그가 '영주(永疇)'에서 '개남(開南)'으로 이름까지 바꾸며 새 세상을 꿈꾼 남원 교룡산성 등 몇 곳을 제외하면 현재 그의 자취를 더듬어볼 수 있는 곳은 없습니다.

그의 묘 곁에는 그의 생애를 노래한 시비 '개남장(開南丈)'이 서 있습니다. 여느 묘의 그것과는 달리, 그의 업적보다도 김개남에 대한 역사의 소홀한 평가를 아쉬워하는 내용이 주로 새겨져 있습니다.

우리 역사의 변곡점에서 세상을 뒤집으려했던 위대한 혁명가의 이름이 후세에 의해 아무렇지도 않게 잊히고 지워지는 현실을 꾸짖는 피 끓는 절규 같습니다. 그 비석 앞에서 반성하고 속죄하듯 한참을 서성거렸습니다.

덧붙이는 글 | 제 홈페이지(http://by0211.x-y.net)에도 실었습니다.



태그:#동학농민운동, #김개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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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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