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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철 대법관
 신영철 대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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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사태로 사법부 내부에서 재판에 대한 간섭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오해의 빌미를 제공하고 … 법원에 크게 누를 끼치고 말았다는 생각에 내내 괴로웠습니다." (신영철 대법관)

"'오해의 빌미'를 제공하신 게 아니고, (신 대법관이) 재판에 대한 간섭을 하신 것입니다. 도대체 누가 뭘 어떻게 오해한다는 건지, 재판 관여나 사법행정권 남용이 아닌데 국민들이나 일부 판사들이 오해를 하고 있다는 건지, 저는 잘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서울중앙지법 김예영 판사)

지난 8일 대법원공직자윤리위원회가 신 대법관에 대해 경고·주의 촉구를 권고하고, 이용훈 대법원장이 13일 '엄중 경고'를 내리면서 작년 서울중앙지법 촛불재판개입 사태에 관한 법적인 처리가 다 끝난 듯 보였다.

하지만 이 무렵 판사들은 그동안 참을 만큼 참았다는 듯 거침없이 말을 쏟아냈다. 공개적으로 발언한 판사들만 20명에 가까웠다. 글을 모아 한 권의 책을 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지난주(11일~15일) 법원 내부 통신망에 쏟아진 판사들의 분노와 좌절, 그리고 희망을 들어본다.

"'보석에 신중하라', 판사들 듣는 순간 무얼 주문하는지 안다"

판사들의 주된 심정을 낱말로 표현하자면 당혹감과 분노 그리고 자괴감이었다. 법원에서 공정성의 상징이자 존경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대법관이 연일 비난의 화살을 받는 상황, 게다가 경고처분으로 이번 사태를 마무리하려는 사법부 내부의 움직임을 판사들은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반응이었다. 

"'보석에 신중을 기하라'는 말의 의미, 특정한 사건에 대하여 특정 재판부를 배제하고 특정 재판부에 배당하는 것의 의미, 너무나 지당하신 '재판을 신속히 하라'는 의미, 우리 법관 사회는 그것이 무엇을 주문하는지 듣는 순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행위들이 결론적으로 '사법행정권 행사의 일환'이고 '직무상 의무 위반 행위에 해당한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이라니. 저는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아 가슴만 답답합니다." (서울중앙지법 이옥형)

"어젯밤 운동 중에 발목 인대가 찢어지는 부상을 입었습니다. 하지만 찢어진 발목 인대보다 이번 재판권 침해사태에 의해 찢기고 있는, 법관으로서의 양심과 자긍심 때문에 더 고통스럽습니다." (정읍지원 박재우)

"대법관은 그 자체로 만인의 우러름을 받아야하는 살아있는 justice(정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뒷문으로 출입하는 justice를 본 적도,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믿음이, 자부심이 깨지고 있는 지금의 상황이 너무 슬프고, 힘듭니다." (안산지원 이정훈)

"대법관직 유지하는 한, '이메일 재판' 오명 붙어다닐 것"

14일 오후 서울중앙지방법원 소속 판사들이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신영철 대법관 관련' 단독판사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회의장에 들어서고 있다.
 14일 오후 서울중앙지방법원 소속 판사들이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신영철 대법관 관련' 단독판사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회의장에 들어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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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들은 재판 간섭 행위를 하고도 '사퇴 없는 사과'로 일관하는 신 대법관과 법원 수뇌부를 비판하기도 했다.

"신영철 대법관님께서 대법관직을 유지하시면서 재판업무를 수행하는 한 전국의 모든 법관들이 매일 수행하는 재판 앞에 이메일 재판, 핸드폰 재판이라는 오명이 항상 붙어 다닐 것입니다. 신영철 대법관님의 사과가 아니라 사퇴가 필요한 일입니다." (정읍지원 박재우)

"(신 대법관의 행위의) 의도가 후배법관을 지도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하더라도 촛불사건의 피고인측으로 하여금 관련 재판 전체에 대한 공정성을 불신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대법원장님과 법원행정처는, 삼국지에 나오는 읍참마속(泣斬馬謖)의 심정으로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서울중앙지법 서기호)

"소신껏 재판함에 있어 극도의 어려움을 느꼈을 판사(촛불재판을 맡았다가 올해 초 사직한 박재영 판사를 지칭 : 기자 주)는 이제 더 이상 법대에 앉을 수 없게 되었는데 그러한 상황을 초래한 분은 자리를 보전하고 계시고, 그러한 상황은 이제 정당성마저 부여받았습니다. 이렇게까지 하여 지켜지고 있는 가치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인천지법 김정아)

"사퇴 거론 부적절? 이념적·정치적 포장 말라"

이용훈 대법원장
 이용훈 대법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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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판사들은 신 대법관 사태를 둘러싼 법원 내부의 공방을 접고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신중론'을 펼쳤다.

"저는 신 대법관에 대하여는 이미 상당한 정도의 심판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법원장들이 신 대법관과 동일한 일을 반복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향후의 노력은 법원 내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이를 적정하게 처리하기 위한 제도적 개선에 집중되어야 합니다." (서울중앙지법 정진경)

그러나 대다수 판사들은 "대법관에 대해 판사가 어떻게 사퇴를 거론할  수 있느냐"는 여론을 의식한 듯 이 부분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반박했다. 법관으로서 정당한 의사표현이라는 것이다.   

"헌법상의 신분보장이 사법부의 독립을 지키기 위한 수단인 이상 사법부의 독립과 국민의 사법부에 대한 신뢰 회복을 위해서도 신 대법관님의 사퇴문제는 우리 판사 모두가 토론할 수 있고 토론하여야 합니다. 이를 이념적, 또는 정치적으로 포장하여 판사의 입을 다물게 할 수는 없습니다." (서울북부지법 변민선)

"많은 분들이 법관의 사퇴를 주장하는 것은 사법독립의 근간을 흔드는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재판의 내용이 아닌 법관 개인의 사사롭지 않은 처신을 두고 진퇴를 말하는 것조차 금지되는 행동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추태를 보인 일부 국회의원들은 물론이요 심지어 형사소추조차 불가능한 대통령마저도 적절치 못한 언행을 이유로 임기 중에 물러나라고 요구하는 국민들에게 유독 법관에 대해서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은 논리의 비약이요 개념법학의 오류입니다." (의정부지법 정원)

"대법관은 신성한 직으로서, 국민 모두는 바람직한 대법관상에 어긋나는 일체의 행위에 대하여 당연히 비판할 권리가 있고, 사법의 독립은 그러한 비판 속에서 강철과 같이 단련되는 것이지, 부당한 행위에 대한 정당한 비판을 피하는 방패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안산지원 이정훈)

"법관독립 노력 부족... 국민 여러분께 깊이 사죄"

한편 이번 사태에 대해 국민들을 향해 사과를 한 판사들도 있었다. 김동현 판사는 "어떻게든 저의 부끄러움을 국민에게 말하고 용서를 구하지 않는 한, 저는 이 부끄러움을 안은 채 재판의 현장으로 향할 수 없다"고 심정을 토로했다. 

"우리는 이번 사태에 대하여 깊은 자괴감을 느끼고, 우리 개개 법관들이 재판의 독립을 지키기 위한 충분한 노력을 기울이지 못한 점에 대하여 국민 여러분께 깊이 사죄합니다. 또한 앞으로 이러한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각고의 노력을 기울일 것을 약속합니다." (서울남부지법 단독판사 회의결과)

판사들에게 분노와 좌절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번 사태에 대해 목소리를 높인 판사들은 법관독립, 사법부 독립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의지와 희망을 드러내기도 했다.

"지금 우리는 국민 여러분께서 부여한 사법권력의 투명성을 지키지 못한 데 대하여 심각한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라도 그것을 지켜나가기 위해 우리의 양심을 걸 생각입니다." (대전지법 김동현)

"민감한 문제에 대하여는 동료 법관들 상호간에도 언급조차 꺼리는 분위기가 언제까지 계속되어서는 사법부의 미래는 어두울 수밖에 없습니다. 일선 법관들이나 직원들이 활력을 가지고 원기 있게 움직여야 사법부가 강해집니다." (서울서부지법 정영진)

"마냥 냉소를 보내거나 절망하거나 가슴만 답답해 하기에는 법원에 대한 애정과 희망이 크지 않으신가요? 사법부의 독립과 재판의 독립은 누군가의 은혜로서 주어지는 지는 것이 아니라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할 때만이 얻어진다는 것이 우리가 역사로부터 배우는 진실이 아닌가요?" (서울중앙지법 이옥형)

재판을 하는 판사들이 법원 내부 사태에 대해 이토록 말을 많이 쏟아낸 적은 없었다. 그만큼 상황이 엄중하다는 방증이다. 대부분 판사들은 "이 상황을 두고 침묵한다는 것은 사법부의 미래, 사법독립을 죽이는 일에 동조하는 것"(서울가정법원 김윤정)이라고 느끼는 것 같다.


태그:#신영철, #촛불재판, #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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