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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운사 숲 길가에 있는 차나무 밭과 뒤로 보이는 동백나무 군락
▲ 차나무 밭과 동백나무 군락 선운사 숲 길가에 있는 차나무 밭과 뒤로 보이는 동백나무 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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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본 꽃무릇, 술로 출렁이던 정수리에 냉수가 쏟아지는 느낌

고창 선운사에 와 본 것은 약 20 여 년 전이었다. 대학에 갓 입학하여 학과 동기생들과 답사라 치고 처음으로 찾았던 곳이 선운사였다. 철없는 새내기 시절 뭣도 모른 채 선운사 주변을 어슬렁거리다 숙소에서 친구들과 잔뜩 술이나 퍼마시다 간 게 기억의 전부인 듯한 곳이 이 곳 선운사였다.

어느새 강산이 두 번 하고도 더 많이 변해버려 20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다. 짧지 않은 시간이 훌쩍 지나가버린 지금 그 때 그 시절을 생각하며 기억을 더듬어 보지만 딱히 떠오르는 아련한 기억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잊혀지지 않는 기억을 꼽을라치면 단연 꽃무릇에 대한 신비한 느낌이다.

나는 선운사 숲의 뜰에서 군데군데 한 줄기 꽃대로 처연히 솟아 낭자한 선홍빛으로 피어난 꽃무릇 무리를 난생 처음으로 보았었다. 그 꽃무릇을 본 순간 밤 새 마신 술로 출렁이던 정수리에 차가운 냉수가 쏟아지는 느낌이었다. 가녀린 바람이 잔잔한 물결로 일렁이는 도솔천 옆 숲길을 흔들거리며 걷다 우연히 보았던 꽃무릇 군락의 신비로움은 정말이지 환상적이었다.

나이 사십이 넘어 이제서야 다시 찾아온 도솔산(선운산) 선운사. 그 때 기억은 희미하지만 지금 내 옆구리에는 아내가 팔짱을 끼고 있고, 한 손에는 아빠와 딸로 맺어진 부녀지간의 따스한 체온과 인연이 있다. 그래서 오늘의 선운사행은 강산이 변한 증거일 것이고, 나에겐 한 페이지 새로운 삶의 역사로 남을 하루가 되는 셈이다.

살다보니 어느새 남편이 되었고, 아빠가 되어 아내와 자식들을 데리고 찾아온 선운사와의 해후는 편안했다. 시집살이에 지친 며느리가 오랜만에 친정집에 찾아오는 느낌이랄까. 선운사 일주문에 발을 들여 놓으면서부터는 더욱 그런 느낌이었다. 왠지 모르는 심신의 안정감과 친숙함, 낯설지 않은 설렘 그런 것들을 물씬 느낄 수 있었다. 

크고 작고, 중하고 가벼우며 소소한 모든 것이 서로 어우러지다

도솔산 선운사로 들어가는 관문
▲ 선운사 일주문 도솔산 선운사로 들어가는 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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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문은 여전히 묵묵한 자세로 선운사 입구에 서서 뭇 사람들을 마중하고 있었다. 굳이 승과 속의 경계를 구분하려는 경직된 표정도 없이 불자들, 산행 객, 나들이객 할 것 없이 모든 이들을 차별 없이 맞이하는 듬직한 모습이었다. 두터운 일주(一柱)로 지붕을 받쳐 서 있는 나무는 자신이 딛고 선 주춧돌에 최대한 몸의 윤곽을 밀착하여 맞추는 '그랭이 기법'으로 세워져 있었다. 주춧돌부터 기둥을 거쳐 공포와 지붕으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건축미학을 마음껏 과시하고 있는 일주문의 직립은 퍽 인상적이었다.

크고 작고, 중하고 가벼우며 소소한 모든 것이 꼭 필요한 곳에 각자의 쓰임에 맞도록 서로 어우러져 조화를 이룬 절묘한 균형과 비례는 그 자체로 훌륭한 작품이었다. 나는 일주문을 유심히 바라보며 생각했다. '하나의 건축물을 통해서도 공존과 상생의 의미를 깨닫도록 가르치는 의미가 담긴 것이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일주문을 지나서 느티나무, 왕벚나무 등이 양쪽으로 나란히 선 채 자연스럽게 앞으로 나아가도록 인도해주는 그늘진 자갈길을 걸었다. 길가 옆에는 수량(水量)은 줄었지만 여전히 맑은 빛으로 고요하게 흐르고 있는 도솔천이 송사리 떼들의 한가로운 유영을 허락하고 있었다. 몇 발짝 걸음을 걸으니 얼마 지나지 않은 오른쪽에 빽빽한 아름드리나무들 사이로 부도 밭이 나타났다.

부도와 비석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 선운사 부도 밭 부도와 비석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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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모양으로 생긴 부도와 연좌 위에 조각된 부도, 하얀 백색의 알처럼 생긴 부도 등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만들어진 부도와 비석들이 즐비했다. 각각 덩치와 크기도 다를뿐더러 키 높이와 돌 표면의 피부색도 약간씩 다르게 만들어진 것들이 모여진 숲 속의 공간은 너무도 조용했다. 다만 가끔씩 고요한 적막을 깨곤 하는 이름 모를 산새들의 노랫소리만이 들려올 따름이었다. 장대 같은 나무들 사이로 구멍처럼 뚫린 공간을 통해 투명하게 내리쬐고 있는 햇빛은 내가 그 어느 곳에서 보았던 햇빛보다도 그 명도가 높았다.

초록의 숲 향기가 자욱한 부도 밭을 나와서 앞서 걷는 딸내미들을 졸래졸래 따르니 어느새 선운사의 천왕문에 도착했다. 천왕문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서니 별다른 기억도 떠오르지 않았던 처음과는 달리 이상하게도 어렴풋이 가물거리는 오래 전 기억들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천왕문 앞 돌 계단에 올라서 무심코 좌우를 살피고, 뒤를 돌아 건너편 돌다리 너머 자욱한 숲의 화음에 귀를 종긋했던 기억의 상이 살며시 다가오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선운사 천왕문
▲ 천왕문 선운사 천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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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왕문은 2층의 맞배지붕으로 지어져 아래층에는 그 천왕문을 위층 누마루에는 범종루를 올린 독특한 구조를 가졌다. 천왕문 누마루 아래를 지나는 곳에서 좌우를 쳐다보니 더 이상은 부처님 도량의 경건과 엄숙을 깨뜨리는 것들의 출입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사천왕상의 다소 위협적인 얼굴이 보였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해탈의 도량에 잡귀들의 범접을 막고자 부리부리한 눈으로 노려보며 음녀와 잡귀들을 깔아뭉개고 있는 사천왕상의 모습은 해학적이고도 익살스러운 맛이 났다.

천왕문을 들어서서 하얀 백색의 햇빛이 충만한 너른 마당을 보았다. 마당의 정면에는 웅장하고 큼지막하게 자리 잡은 강당 '만세루'가 기다리고 있었다. 외형으로 보이는 만세루의 풍모는 기교와 허세를 부린 흔적이 별로 없어 보이는 질박한 모습이었다. 점잖게 늙으신 너그러운 인상의 고매한 어르신이랄까, 그럴 정도로 친근하게 보였다. 허나 아름드리 굵은 통나무를 다듬지 않은 채 그대로 기둥을 쓰고, 대들보로 삼은 걸 보면 또 한편으로는 건물이 가진 격의 배포와 두둑한 뒷심이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선운사 만세루
▲ 만세루 선운사 만세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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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세루 대들보 위에 두 갈래로 나뉜 나무를 걸어 용머리로 익살맞게 조각해 놓았다.
▲ 만세루 천장 위의 용머리 만세루 대들보 위에 두 갈래로 나뉜 나무를 걸어 용머리로 익살맞게 조각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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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에 더 기막힌 자연주의적 아름다운 갖춘 만세루 안 천장

만세루 누마루 바닥으로 올라 시원한 선운사의 공기 한 모금을 마셨다. 이 곳은 마치 심신의 피로를 씻으려 찾아온 중생들을 위해 마련해 준 휴식과 요양의 공간처럼 넓고도 여유로웠다. 나는 아내와 딸내미들과 함께 누마루에 잠시 누워 허리를 펴고 큰 숨을 내쉬며 평화롭게 휴식했다. 그러던 중 시선이 자연스럽게 천장을 향해갈 무렵, 나는 순간적으로 바닥에서 머리를 벌떡 일으켰다.

만세루 안 천장의 모습은 바깥에서 바라보았던 외모보다 그 내부에 더욱 기막힌 자연주의적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었다. 오랜 참선과 인고의 시간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내적(內的) 아름다움에다가 기교와 치장을 거부한 채 제 생긴 모습 그대로를 맨 얼굴처럼 자신 있게 드러낸 '무기교의 기교' 같은, 고전적이면서도 힘찬 모습은 압권이었다. 끝이 두 갈래로 나뉜 나무를 대들보 위에 조각해서 걸어놓은 용머리는 '내가 뚝심과 배짱만 있는 무뚝뚝한 존재가 아니라 나에게도 익살과 유머가 있다'라는 듯 귀여운 캐릭터의 표정으로 깜찍하게 내려보고 있었다.  

만세루 기둥에 등을 기대고서 대웅보전 마당 안 공중 위에 꽃 색으로 걸린 연등을 감상했다. 이틀 앞으로 다가온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하는 불자들의 정성과 신심이 파란 하늘을 뒤덮어 마치 천상의 놀이동산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연등이 화려하게 걸린 대웅보전 마당 아래에는 세상의 모든 이치가 그런 것처럼 화려함을 돋보이게 하는 그늘이 있었고, 그림자도 있었다.

대웅보전 앞마당에 걸린 찬란한 연등
▲ 오색 연등 대웅보전 앞마당에 걸린 찬란한 연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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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보전 앞 마당에서 사람들이 버린 휴지나 종이조각을 쉴 새 없이 줍는 행자승의 모습은 '성자가 된 청소부'를 생각나게 했다.
▲ 휴지를 줍는 행자승 대웅보전 앞 마당에서 사람들이 버린 휴지나 종이조각을 쉴 새 없이 줍는 행자승의 모습은 '성자가 된 청소부'를 생각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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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화려하고 찬란한 마당에서 행자승 한 분을 우연히 볼 수 있었다. 그 분은 허리를 숙이고, 무릎을 구부린 채 마당을 돌아다니며 연신 무언가를 줍고 있는 모습이었다. 가만히 보니 사람들이 버리거나 흘리고 간 휴지조각이나 쓰레기를 줍는 모습이었다. 짙은 밤색(검붉은 생활한복)의 행자복장을 하고서 수행정진을 통해 스님이 되고자 '입산출가'한 그 행자승의 선행(禪行)을 바라보며 나는 잠시 흐뭇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얼마 후 엉뚱할지는 모르지만 <성자가 된 청소부>라는 책의 제목이 순간적으로 떠올랐다.

대웅보전 앞 울타리 안에는 6층 석탑이 서 있었다. 고려시대 석탑으로 원래는 9층 탑이었던 것이 현재는 6층만 남아있다고 한다. 그런데 가만 보니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9층이었던 탑이 6층만 남아 탐의 몸돌과 지붕돌을 그에 맞추어 올렸다는 설명이 과연 옳은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왜냐하면 6층으로 쌓아진 현재의 탑의 비례와 모양은 아무리 보아도 별로 어색한 감이 없어 보이는 평범한 균형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맨 아래 '기단부'부터 맨 위 상륜부까지 '어쩌면 저렇게 적당히 균형이 잡혀있을까'하는 궁금증을 지울 수 없었다. 만일 안내문의 설명대로 9층이 6층으로 다시 쌓아졌다면 중간 부분에 사라진 3개 층이 없어진 상태라는 말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그렇게 균형이 알맞게 조화로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혹시 다른 이유가 있지는 않을까'라는 생각이 몹시 들었지만, 어쩔 수 없이 그에 대한 궁금증을 한 동안 미루어 두기로 했다. 나는 달랑 안내문 하나의 설명밖에는 확인할 길이 없는 상황이 아쉬웠기에 나중에라도 그 이유를 꼭 확인해 보기로 마음을 먹고서 대웅보전 계단 위로 걸음을 살짝 올려놓았다.

선운사 대웅보전 앞 마당에 있는 6층 석탑(# 원래 9층 탑이었다고 하나, 현재의 비례와 균형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 대웅보전 앞 6층석탑 선운사 대웅보전 앞 마당에 있는 6층 석탑(# 원래 9층 탑이었다고 하나, 현재의 비례와 균형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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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보전을 한 바퀴 돌아가며 감상했다.
▲ 선운사 대웅보전의 옆 뒷모습 대웅보전을 한 바퀴 돌아가며 감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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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보전 안에서 목탁을 두드리며 간절한 염불을 올리는 모습
▲ 염불을 올리는 스님 대웅보전 안에서 목탁을 두드리며 간절한 염불을 올리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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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면 5칸, 측면 3칸에 다포계 맞배지붕을 얹은 대웅보전은 규모도 컸을 뿐 아니라 길면서도 안정감 있는 자태를 취하고 있었다. 기둥과 기둥 사이의 간격은 넓었고, 배흘림과 민흘림기둥이 혼합된 듯이 매우 자연스러운 자세로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모습은 너그러워 보였다. 전체적으로 정연한 질서가 차분하게 엿보이는 대웅보전은 대사찰 선운사를 대표하는 주지 스님처럼 깊은 내공이 담긴 건물이었다. 

나는 여느 때나 다름없이 대웅보전을 한 바퀴 빙 돌아보며 건물에 밴 오래된 시간의 역사와 가람의 향기를 유유히 음미했다. 건물 곳곳에 수많은 고승들, 불자들의 참선과 염원의 축축한 땀방울이 고귀하게 얼룩진 듯한 건물의 거친 살결을 관찰했다. 나는 그렇게 때 묻은 마음을 닦았고, 혼탁한 영혼을 정화할 수 있었다. 그리고 늘 그랬던 것처럼 대가람의 평온한 대웅전 뜰 안에서 스스로를 낮추고, 매사의 욕심을 비우는 수행을 훈련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흡족한 만족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대웅보전 법당 안에서 부처님께 혼신을 다하여 염불을 올리는 스님의 뒷모습을 몰래 훔쳐 감상하고서는 옆에 있는 관음전과 영산전을 차례로 둘러보았다.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하나도 바쁠 것 없는 걸음을 걸어 명부전을 들렀고, 불전사물이 있는 전각 앞에서 잠시 그늘에 묻힌 채 꿀맛 같은 휴식의 추억을 나누기도 했다. 나와 아내, 내 새끼들은 그렇게 소탈하게 선운사에서의 평온하고 맑은 가람의 향기에 온몸을 내 맡긴 채 심신을 닦는 목욕을 했다.

도솔암으로 오르는 길 옆 도솔천 위를 가로 지른 다리
▲ 선운산 도솔암으로 오르는 중에 만나는 다리 위에서 도솔암으로 오르는 길 옆 도솔천 위를 가로 지른 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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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년 된 소나무, 단정한 모습생 같은 모습

우리는 다시 천왕문 밖으로 나와서 도솔쉼터 삼거리를 지나 비교적 평탄하게 나 있는 길을 따라 도솔암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가는 도중 도솔천 좌우에 조성된 녹차 밭에서 한 줄기 바람을 타고 날려 오는 은은한 차의 향기를 코끝으로 맡으니 머리가 더 없이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걸으면서 마음껏 지지배배 종알종알 거리는 딸내미들의 이야기를 충분히 들어주었다. 평소 아빠와 딸들 사이에 모자랐던 진지한 대화의 결손이 충분하게 채워지도록 그들의 웃음소리 하나에도 맞장구를 쳐주고 싶었다.  

도솔암으로 오르는 도중의 길은 한 편의 시에 등장하는 '숲 속의 길'이었다. 어린 단풍 나뭇가지가 연두와 초록빛 이파리로 팔을 뻗쳐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었고, 근육질의 서어나무도 새 순으로 피어난 푸른 이파리로 하늘을 덮으며 몸을 비틀고 있었다. 조용하고 한적한  숲 속의 길에는 고요한 평화가 고즈넉하게 깔려 있었고, 산소처럼 맑고 상쾌한 신선함이 있었다. 우리는 그 길을 따라 걸으며 많은 것을 이야기하기도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스스로가 필요로 하는 것들을 아무런 제약 없이 각자의 가슴에 넉넉히 담길 만큼 채우자고 했다.       

시처럼 아름다운 숲 속의 길을 한 동안 걷노라니 어느새 눈앞에 커다란 소나무가 나타났다. '장사송(長沙松)'이라는 수령이 약 600년이나 된 소나무였다. 천연기념물 제 354호로 지정되었다는 이 걸출한 고송은 얼핏 보아도 그 품새가 예사롭지 않았다. 오랜 나이를 먹어 늙었지만, 여전히 고고한 기품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세련된 격이 있었다. 평소 수령이 오래된 보호수들을 꽤나 여럿 보아왔지만, 그것들이 오랜 세월을 살며 휘어지고 뒤틀려 품고 있는 자연스런 멋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뭐랄까,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단정한 모범생 같은 모습이랄까? 꼭 그런 외모였다.

신라 진흥왕이 수도를 했다고 설화가 전해진다.
▲ 진흥굴 신라 진흥왕이 수도를 했다고 설화가 전해진다.
ⓒ 이성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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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이여, 이 시대 유약한 남성들을 널리 구원하소서

장사송 뒤편으로 조르르 돌계단을 따라 올라 암벽에 커다랗게 뻥 뚫린 구멍 하나를 볼 수  있었다. 바로 '진흥굴'이라고 하는 천연 석굴이었다. 아래에서 볼 때보다 훨씬 큰 규모로 뚫린 굴 앞에 다가서니 싸늘한 한기가 느껴질 정도로 시원했다. 요즘도 기도를 올리는 행자들이 머물며 오가기도 하는지 굴 안에는 몇 대의 양초가 불을 밝히고 있었다. 타오르는 불꽃은 미세한 요동도 없었고, 누군가 번뇌를 씻기 위해 소리 없이 눈물 흘리며 간절히 염원했을 흐릿한 흔적만이 가물거리는 듯 했다.

진흥굴은 신라 진흥왕이 이 곳에 와서 수도했다는 설화가 얽힌 굴이라고 한다. 설화에 따르면, 불교에 심취한 진흥왕이 왕위를 버리고 도솔왕비, 중애공주를 데리고 선운사에 와서 이 굴에서 수도하였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꿈에 미륵삼존이 바위를 가르고 나타나 자기에게로 왔다고 해서 열석굴(裂石窟)이라 부르기도 한단다. 나는 별 특별할 것 없는 이 설화를 떠올리며 생각하는 중 한 순간 실없는 웃음이 절로 났다. '불교에 심취해 왕위도 버리고 굴에 들어와서 수도할 양반이 웬 마누라와 딸내미를 옆에 끼고 오셨담?' 나 같은 범인들의 생각으로는 아무리 봐 줄라고 해도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 코미디 같은 설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 나라면 저 계단 아래 벤치에서 쉬고 있는 마누라와 딸내미들을 데리고 산 속의 석굴에 들어올 생각을 꿈에라도 할 수 있을까?' 당장 '헤어지자, 이혼하자, 못 살겠다 갈아보자' 꼴이 나지 않을까 생각하며 나는 시시한 웃음을 참지 못했다. 물론 옛날의 설화일 테이니 그럴 법은 하겠지만, 설화에서나 지금이나 남자들은 여자들 없이 살 수 없는 참 불쌍한 중생들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요즘도 신부가 모자라 1년에 만도 수 천 명의 외국인 신부를 수입해오는 이 나라의 현실이 눈앞에 겹쳐지며 마음속에선 저절로 이런 주문이 튀어나왔다. 여성들이여, 이 시대의 시시하고 유약한 남성들을 부디 자애롭게 널리 구원 하소서! 나무 관세음보살...

진흥굴을 나온 후 얼마 되지 않아서 나뭇잎 사이로 저만치 위에 거대한 절벽이 드러나는 게 보였다. '낙조대'였다. 선운산을 찾은 사람들에게 우람한 덩치의 형상으로 이국적이면서도 절묘한 풍광을 제공해주는 산이자 암벽이었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신기하고 멋진 감흥을 흠뻑 느낄 수 있는 비경이었다. 봄날의 푸른 새 순 이파리에 파묻힌 듯 우뚝 서 있는 낙조대의 모습을 보노라니 이번에는 청순한 소녀들의 틈에 둘러싸인 야성미 넘치는 '훈남'의 모습이 연상되니 사람의 마음은 역시나 간사한 모양이다. 늦은 오후라면 석양이 지는 낙조대의 아름다운 노을을 마음껏 감상하고 싶었지만, 시간을 앞당겨 끌고 올수 없으니 그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낙조대의 잘 생긴 이마가 보이는 언덕을 쉬엄쉬엄 오르며 도솔암으로 향했다.  

도솔암에 오르자마자 바로 입구에 있는 샘에서 흘러나오는 약수 한 모금을 시원하게 마셨다. 한 모금의 약수는 일주문을 지나 이 곳 도솔암에 오르기까지 내내 참았던 목마름을 한꺼번에 사라지게 할 정도로 달콤하고 맛있었다. 나는 표주박에 담긴 물 한 모금을 천천히 마시며 도솔암 마당에 서서 앞으로, 아래로 훤하게 트인 주변의 산과 하늘과 그 밖의 모든 것들을 자유롭게 감상했다. 순수의 초록빛이 만연한 봄날의 선운산(도솔산)을 마냥 실컷 감상했다.  

선운산(도솔산) 중턱에 있는 도솔암
▲ 도솔암 선운산(도솔산) 중턱에 있는 도솔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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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솔암 요사 채 위에 단아한 미인처럼 정좌하고 있다.
▲ 도솔암 극락보전 도솔암 요사 채 위에 단아한 미인처럼 정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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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준 높은 미인처럼 미모를 갖춘 극락보전

도솔암에는 단청 없이 소박한 요사채가 한 채 딸려 있었고, 축대 위로 올라선 기단 위에는 단아하게 정좌한 '극락보전'이 있었다. 새색시처럼 예쁘고 깔끔하게 단청으로 화장하여 단장하고, 머리는 신부처럼 감아올려 마치 그 위에 족두리를 얹은 것처럼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한 눈에 보아도 반할 정도로 다소곳한 미모를 갖추고 있는 극락보전은 꽤나 수준 높은 미인처럼 예뻤다.

극락보전에서 굽어진 언덕을 휘어감아 오르니 산길 위 나무 그늘 아래 조그맣게 '나한전'이 나타났다. 극락보전에 비해서도 그 체구가 더욱 작은 아담한 규모인데, 봄날의 비교적 따가운 햇볕을 피해 그늘 속의 휴식을 취하고 있는 듯 편안한 모습이었다. 그 앞을 지나쳐 왼쪽으로 몇 발치 걸으니 드디어 거대한 암반인 칠송대(七松臺) 절벽 아래 한 면에 동불암 마애불이 결가부좌한 자세로 놀랍도록 큰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었다. 어림짐작을 해봐도 대략 30~40 미터는 넘는 깎아지른 절벽에 새겨진 이 암각여래상은 첫 인상이 결코 원만하거나 부드럽지 않았다. 완고하고 도발적인 인상에다가 위압감마저 주는 것 같은 원시적 미소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칠송대 절벽 아래 마애불 앞에 서서 그와 정면으로 대면하는 순간 이유를 알 수 없는 희열을 느낄 수 있었다. 거칠고 장대한 마애부처님을 알현하는 순간 지금껏 어디서도 체험해보지 못했던 쿵쾅거리는 가슴의 두근거림이 있었다. 그저 놀라움과 신비로움이 교차하는 찰나의 감흥이었다. 백제 천 년의 미소라 불리는 서산마애불의 미소와는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동불암 마애불의 표정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나는 한참동안 그 앞에 서서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샅샅이 살펴가며 요모조모를 세밀하게 관찰하고 감상했다.

선운산 칠송대 절벽의 한 면에 조각된 마애불상 앞에서
▲ 동불암 마애불 선운산 칠송대 절벽의 한 면에 조각된 마애불상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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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불상은 머리 부분에는 암벽을 깊게 파서 새기고 어깨와 허리를 거쳐 내려오면서는 깊이가 얕은 선각으로 조각을 한 모습이었다. 각이 진 얼굴에 가는 눈과 앙다문 입은 그야말로 단호해 보였으며, 일말의 여지를 허락지 않는 강단이 담겨 있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멋들어져 보였으며 원초적으로 아름다웠다.

불상의 머리 위로는 네모진 구멍들과 드문드문 틈에 끼여 있는 부러진 목재, 쇠못 등을 볼 수 있었다. 이는 누각식으로 된 지붕(닫집)이 달려있던 흔적이 남아 있는 모습이었고, 명치쯤인지 배꼽쯤인지 근처에 있는 네모난 구멍(함)은 무언가로 뚜껑을 닫고 시멘트 같은 것으로 막아 놓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자료에 따르면 이 네모난 구멍에는 부처님을 봉안할 때 불경과 시주한 사람의 이름 등을 적은 것을 넣었다고 하는데, 오랜 세월을 거치며 온전히 보존되지 못하고 훼손되었을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듯했다.

나는 꽤 오랜 시간동안 마애불과 눈을 마주치며 심연의 대화를 나누었다. 신라와 백제시대, 고려시대 그리고 동학혁명이 일어났던 시대와 당시 인간들의 삶에 대해 혼자 얘기하고 물었다. 천 년의 세월을 뛰어넘는 인간의 역사를 간직한 마애불은 그렇지만 아무 말 없이 침묵으로만 대답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마지막 메시지를 나에게 주었다.

"너와 내가 반갑게 만날 수 있었다면 다행일 뿐, 그저 그 뿐이다. 이제 그만 너의 일상으로 돌아가 다시금 너와 네 가족이 맞닥뜨린 삶의 역사 앞에 기꺼이 충실하라!"  

덧붙이는 글 | 지난 5월 1일 답사여행 다녀와서 쓴 글입니다.



태그:#고창 선운사, #도솔암, #만세루, #동불암 마애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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