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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 청산도. 싸목싸목 걸으며 여유를 만끽할 수 있는 곳이다. '슬로시티'로 지정돼 있다.
 완도 청산도. 싸목싸목 걸으며 여유를 만끽할 수 있는 곳이다. '슬로시티'로 지정돼 있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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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5월 11일 오전 8시 완도항 여객선터미널. 안개가 자욱하다. 명사십리해수욕장으로 가는 신지대교는 물론 바로 앞에 있는 섬, 주도 역시 보이지 않는다. 완도항에 있는 주도는 갖가지 상록수와 희귀식물이 많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있다. 지난해 개장해 완도의 새로운 명물이 된 일출공원도 방향조차 가늠하기 힘들다.

청산도로 가는 첫 배에 몸을 실었다. 갑판 위의 바람이 쌀쌀하다. 시원한 바닷바람을 쐬고 싶었지만 금세 몸이 싸늘해진다. 한낮의 날씨는 여름 같지만 아침, 그것도 바다의 아침은 추웠다. 풍광도 전혀 없다. 객실로 들어가 신발을 벗고 온기가 전해지는 바닥에 앉으니 온몸이 나른해진다. 간밤에 잠을 설친 탓에 피로가 밀려온다.

평일이지만 객실에는 여행객들이 여럿 보인다. 그들의 들뜬 마음이 표정으로 드러난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사람들은 벌써 드러누웠다. 나와 같은 목적으로 섬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다. 문상객으로 와서 장지로 함께 가는 이들이다. 우리가 따르는 고인은 몇 년 전 청산도에서 읍내로 나와 살다가 영면을 위해 탯자리로 다시 찾아가는 길이다.

초분이 들어설 곳. 돌로 다진 덕대와 볏짚으로 엮은 이엉, 용마름 등이 보인다.
 초분이 들어설 곳. 돌로 다진 덕대와 볏짚으로 엮은 이엉, 용마름 등이 보인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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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의 장례는 청산도 전통의 풍습인 초분(草墳)을 쓰기로 했다. 초분은 시신을 바로 땅에 묻지 않고 일정 기간 짚으로 만든 가묘(假墓)에서 탈골을 한 다음 뼈만 매장하는 장례법이다. 오래 전 뭍에서도 했지만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서남해안 극히 일부 섬에만 남아 있는 풍습이다.

힘찬 뱃고동 소리와 함께 배가 청산도 도청항으로 들어간다. 완도항을 떠난 지 50분만이다. 하늘이 환하다. 바다도 파랗다. 언제 안개가 끼었는지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산도, 들도 온통 파랗다. 지명 그대로 '청산(靑山)'이다. 가히 여유가 넘쳐나는 '슬로시티' 청산도다.

장례행렬은 고인이 오래 살았던 섬의 바닷가에서 노제를 지내며 이별을 고한다. 유족들은 영정을 앞세우고 고인의 손때가 묻은 동네를 한바퀴 돈다. 그 사이 마을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나와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을 추모한다. "섬에서 아주 멋지게 산 분인데, 말년에 읍내로 나가 고생만 하다가 가신다"며 안타까워한다.

초분을 만들기 위해 관을 멍석을 깐 덕대 위에 올리고 있다.
 초분을 만들기 위해 관을 멍석을 깐 덕대 위에 올리고 있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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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제를 마친 장례행렬은 곧바로 장지로 향한다. 장지는 구장리에 있는 선산. 구장리는 선착장에서 영화 <서편제>와 드라마 <봄의 왈츠> 세트장이 있는 당리를 지나 자동차로 10여 분 거리. 용달차 뒤에 타고 가면서 바라본 황톳길과 돌담길이 정겹다. 돌담길 너머에서 '진도아리랑' 한 소절이 들려오는 것만 같다.

길 양쪽으로 펼쳐진 보리와 마늘은 바람결에 출렁이며 푸른 생명력을 뽐내고 있다. 계단식으로 이뤄진 논에선 모낼 준비를 하는 경운기와 모를 심는 이앙기 소리 요란하다. 농군들의 손놀림도 부산해 보인다. 뭍보다 한발 앞서 섬에선 본격적인 영농철이 시작된 것 같다.

덕대 위에 올려진 관을 비닐로 씌우고 멍석으로 감싸고 있다.
 덕대 위에 올려진 관을 비닐로 씌우고 멍석으로 감싸고 있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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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석으로 감싼 관 위에 소나무 가지를 올렸다. 초분을 만들기 위한 내부 작업이 끝난 셈이다.
 멍석으로 감싼 관 위에 소나무 가지를 올렸다. 초분을 만들기 위한 내부 작업이 끝난 셈이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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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지는 산을 등지고, 앞으로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다. 햇살도 한 점 걸리는 곳 없이 고스란히 받는다. 이런 곳을 보고 명당이라 하는가 싶다. 흔히 장지에서 볼 수 있는 굴삭기와 삽 같은 것도 보이지 않는다. 대신 볏짚으로 엮은 이엉 몇 마름과 초가의 지붕마루에 덮는 ㅅ자 형의 용마름, 그리고 약간의 새끼줄과 멍석이 보일 뿐이다.

초분의 토대가 되는 '덕대'는 먼저 온 사람들이 이미 만들어 놓았다. 덕대는 관을 올려놓을 곳. 땅바닥에 크고 작은 돌을 깔아 평평하게 해 놓았다. 면적은 관보다 조금 더 넓다. 초분 만들기에 익숙한 마을사람 몇 명이 그 덕대 위에 굵은 새끼줄과 밧줄을 늘어놓는다. 줄은 위에서 아래로, 또 옆으로 교차시키고 그 위에 멍석을 깐다. 멍석은 관이 움직이지 않도록 고정시켜주는 역할을 한단다.

멍석을 깐 덕대 위에 관을 조심스레 올려 놓는다. 관 위에는 하우스용 비닐 한 겹을 펴서 덮는다. 빗물 같은 것이 관으로 스며들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그 다음엔 멍석으로 관을 감싸고 미리 펴 놓은 새끼줄과 밧줄을 당겨 단단히 묶는다. 그 위엔 솔가지를 올려 놓는다. 솔가지는 관을 보호할 뿐 아니라 각종 병해충의 침입을 방지하는 데 효과적이다. 이렇게 해서 내부 작업이 끝난다.

초분을 만들기 위해 이엉으로 관을 둘러싸고 있다.
 초분을 만들기 위해 이엉으로 관을 둘러싸고 있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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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물이 스며들지 않도록 이엉을 올려 초가지붕 형태를 만들고 있다.
 빗물이 스며들지 않도록 이엉을 올려 초가지붕 형태를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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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겉에서 집을 짓는 순서. 미리 준비해 놓은 이엉을 이용해 시계방향으로 돌려 관을 감싼다. 이엉을 거꾸로 세우는 게 간단치만은 않다. 그 위로 초가지붕을 엮듯이 이엉을 계속해서 두른다. 이때 빗물이 안으로 스며들지 않고 자연스레 흘러내리도록 하는 게 기술이다. 맨 마지막엔 용마름을 올리고 새끼줄을 얹어 큰 돌을 매달아 묶는다.

그 줄이 한두 가닥이 아니다. 좌우로 교차시키고 옆으로도 비스듬히 돌려 촘촘히 묶는다. 마무리 작업을 잘 해야 완벽한 초분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래야만 날짐승이나 비바람으로부터 보호도 된다. 새끼줄을 당겨 돌을 매달고 고정시키는 손에 힘이 들어가고 정성이 더해지는 건 당연한 일.

이렇게 해서 관보다 조금 큰 초가 형태의 임시 무덤이 만들어졌다. 덕대 위에 멍석을 깐 지 1시간여만이다. 곧바로 한쪽에 나란히 서서 지켜보고 있던 유족들이 고인을 향한 첫 번째 제사를 올린다. 그리고 소나무 가지를 하나씩 꺾어 이엉 사이사이에 꽂는다. 뭍에서 성묘를 할 때 솔가지를 꺾어 놓는 것과 같은 의미다.

이엉과 용마름을 올린 다음 새끼줄로 튼튼하게 동여매고 있다.
 이엉과 용마름을 올린 다음 새끼줄로 튼튼하게 동여매고 있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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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초분은 3∼4년 뒤 풀어헤쳐 매장을 한다. 시신의 뼈를 드러내 깨끗이 하는 '씻골' 과정을 거쳐 땅에 묻는 '본장'을 하는 것이다. 이런 풍습을 청산도 사람들은 효도의 한 방법으로 여긴다. 가까이 모셔두고 생각날 때마다 한번씩 찾아볼 수 있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또 초분이 조상에 대한 극진한 예의의 표현이라 생각도 한다. 날송장을 선산에 묻는 것은 법도에 어긋날 뿐 아니라 살과 물이 다 빠진 깨끗한 뼈로 선산에 가는 게 조상에 대한 예의라는 것이다. 특히 고인의 경우처럼 모친의 본장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자식을 매장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 고인의 모친은 3년 전 초분 장례를 치르고 아직 본장을 하지 않았다.

장례를 마치고 도청항으로 돌아 나오는 길. 발품을 팔아 돌아본 당리와 도락리 마을 해안가 풍경이 한 폭의 그림이다. 구장리 쪽으로 보이는 층층이 논도 색다른 풍경이다. 도로도 한적해 싸목싸목 걷기에 좋다. 기다림과 죽음, 그리고 삶을 되돌아보면서….

완성된 초분(왼쪽)과 3년 전 만든 고인의 어머니 초분(오른쪽). 고인의 어머니는 오는 6월 본장을 할 예정이다.
 완성된 초분(왼쪽)과 3년 전 만든 고인의 어머니 초분(오른쪽). 고인의 어머니는 오는 6월 본장을 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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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도 도청항 앞바다. 산도 바다도 파랗다.
 청산도 도청항 앞바다. 산도 바다도 파랗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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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초분, #청산도, #완도, #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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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찰이 일상이고, 일상이 해찰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전남도청에서 홍보 업무를 맡고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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