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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집 대나무밭에는 커다란 모과나무 한그루가 서 있었다. 옆에 서 있던 오동나무잎이 마당에 나뒹구는 계절이 되면 모과도 노랗게 물들어갔다. 잘 익은 모과의 표면은 배어 나온 기름으로 매끄러웠다. 손으로 문지르면 깨어난 향기가 바람에 춤을 추었다. 이렇듯 어린시절의 기억 한 자락을 채워주는 모과나무는 내게 각별한 존재로 남아 있다.

 

그런데 최근, 아주 뜻밖의 장소에서 모과나무와 조우했다. 한때 젊은이들의 해방구로 통했던 압구정동. 그곳에 류(留)라는 일식 다이닝 펍이 자리잡고 있다. 가정집으로 추정되는 건물을 개조한 게, 요즘 우후죽순 생겨나는 고만고만한 이자까야와는 분명 다른 색깔을 지녔다. 내력도 꽤 오래 되었다고 하니 유행처럼 왔다 가는 업소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곳 테라스에 앉고 보니 커다란 모과나무 한 그루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바로 옆에는 감나무가 외로움을 달래주고 있었다.

 

"모과나무가 참 멋지네요."

"예전에는 여기가 다 밭이었다고 합니다. 모과나무와 감나무를 그대로 살린 채 건물이 들어서서..."

 

조경에 의해 옮겨온 게 아니라 이곳이 촌이었던 때부터 자라고 있었다는 모과나무. 주위 환경이 모두 바뀐 과정을 지켜본 모과나무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어쨌거나 모과나무 한 그루로 인해 배경은 고향집의 대나무 밭이 되었다. 스치는 바람이 시원하다. 편안하다. 일찍 찾아온 여름날의 초저녁은 술맛 나는 분위기이다.

 

류(留)의 모과나무는 나의 정서를 건드리고 있지만, 그게 이 집의 매력 전부는 아니다. 다른 업소에서는 찾을 수 없는 종류의 지자케(地酒)를 맛볼 수 있다는 사실. 이것만큼 사케애호가를 설레게 하는 일이 또 있을까. 이곳에서 단독 판매 할 수 있는 이유는 사케를 직수입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곳의 지자케는 이곳에서만 마실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술 역시 류에서만 접할 수 있는 단독상품이다. 어떤 물건인지 등장시켜보자. 아키타(秋田)의 지자케 '마츠쿠라(松倉)'.

 

등급은 특별준마이슈지만 이게 또 물건이다. 초보자는 사케를 고를 때 주로 등급부터 따지고 본다. 그렇기에 월계관의 '준마이다이긴죠'를 최고등급으로 알고 마시기도 한다. 물론, 일본주세법상 최고등급이 확실하지만 말이다. 최고등급인데 최고등급이 아니다? 뭔 말인지 이해가 잘 안 될 수 있겠지만, 일단 많이 다양하게 마시다 보면 알게 되리라 믿는다.

 

등급은 가장 기초적인 선별법이다. 이 단계를 넘어가면 등급에만 의존하지 않게 된다. 등급 외 판단요소가 다양한 게 니혼슈(일본술)이다. 마츠쿠라만 해도 유기농으로 재배한 아키노세이(秋の精)로 빚었다. 일반적인 준마이슈와 동급으로 볼 수 없는 분명한 이유가 있는 셈이다.

 

특별한 준마이슈 마츠쿠라를 알기 위해서는 유기농쌀을 알아야 하고, 유기농쌀을 알기 위해서는 마츠쿠라를 알아야 한다. 그래야 왜 술명이 왜 마츠쿠라(松倉)로 명명 되었는지 고개가 끄덕여질 테니까. 자 보자.

 

술명(酒名) 마츠쿠라(松倉)는 아키타현(秋田県) 구 오마가리시(大曲市) 북부 산기슭에 위치한 지명에서 가져왔다. 이 지역은 일찍부터 무농약 쌀 재배 산지로서 전국적으로 알려졌다고 한다. 타 지역과는 완전하게 격리된 늪가의 논에서, 농약은 물론 제초제도 일절 사용하지 않고 재배된다. 그렇게 생산된 쌀로 빚은 게 마츠쿠라이다. 마츠쿠라와 유기농쌀은 동의어나 마찬가지인 셈.

 

환경을 먼저 생각하는 데와츠루주조(出羽鶴酒造)

 

안심과 안전을 요구하는 소비자의 목소리에 부응해야 하는 건 이 시대가 요구하는 기업의 소명이다. 그렇다고 해도 영리를 추구하는 회사의 입장에선 쉽게 가기 힘든 길이다.

 

마츠쿠라에 사용된 재료미 아키노세이는, 관행농법으로 재배된 일반 쌀과 비교해 생산량에서 상대가 되지 않는다. 벼 1주의 모종 갯수가 4~5개로 적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300평에서 쌀 7~8가마니밖에 수확되지 않는다. 반해, 노동의 강도는 훨씬 부담스럽다.

 

제초작업은 수작업에 의존해야 하기 때문에 노동과 시간은 몇 배의 수고를 필요로 한다. 살충제 역시 친환경성을 살린 졸참나무 목초액을 사용한다. 이전에는 쌀식초를 사용하였다고 하니 쌀에 쏟는 그들의 땀과 정성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고도 남는다. 그 일을 하는 곳이 데화츠루주조이다.

 

이처럼 순환형 쌀 재배에 신념을 바치는 건 좋은 술을 빚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유기농은 우리의 거주 환경을 지켜 나가자는 의식이고, 라이프 스타일을 의미하니 말이다. 보다 건강한 생활을 지내고 싶다. 물과 공기와 대지를 지켜가고 싶다. 데와츠루주조는 그런 소망을 담아 술을 빚는다. 기특하지 않는가. 우리에게도 이런 회사가 있을까? 선뜻 떠오르지 않는다.

 

온도가 올라가면 맛과 향이 깨어나는 마츠쿠라

 

마츠쿠라를 맛본 한 일본인은 이렇게 평하고 있다.

 

맛은 매우 부드럽다. 혀로 굴린 감촉이 매우 순하다. 제대로 쌀의 맛이 난다. 이것을 마시면「쌀로 만든 술의 맛」을 실감할 수 있다. 단맛과 쓴맛 정도는 나카 카라구치(중간 드라이)라고 표시되고 있지만, 별로 맵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단 술이라고도 결코 할 수 없다. 적당한 밸런스이다.

 

그랬던가? 직접 맛을 본 내 미각에는 다소 맵게 느껴졌다. 사케도 +2에 불과한 나카 카라구치라는 게 무색했다. 이처럼 차이가 난 이유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 사람의 미각일까? 내 미각일까? 틀려먹은 미각이. 판단은 나중에 하기로 하고 일단 더 들어가 보자.

 

"술 괜찮으세요?"

 

마츠쿠라를 추천했던 분의 질문이다.

 

"내 미각에는 조금 쉽게 느껴지네요."

 

쉽게 느껴진다? 맛이 친절했다는 표현이다. 고미, 산미, 감미가 명확하게 다가왔다. 개인적으로 술이든 요리든 쉽게 다가오는 맛은 별로 선호하지 않는다. 미각에 고민을 안겨주지 않은 술은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이 맛일까? 싶은데 저맛이고, 저맛인가 싶은데 이맛도 저맛도 아닌 또 다른 차원의 맛이 느껴지는 복잡미묘함. 이처럼 맛의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도 술맛의 일종인데, 쉬운 요리나 술은 그 재미가 반감되지 않겠는가.

 

마츠쿠라는 내 미각이 고민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맛이 떨어진다는 얘기는 아니다. 와일드함보다는 소프트함을 더 선호하는 내 취향의 문제이지, 술 근본의 문제라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마츠쿠라와 만나는 요리는 사케마루였다. 사케는 연어(さけ)이고 마루(まる)는 둥근것을 말한다. '연어둥근볼'쯤 되겠다. 실제 모양새도 그렇다. 고구마를 으깨어 볼을 만들어 연어로 감쌌다. 고구마의 단맛과 연어의 농후함이 왠지 마츠구라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사시미초회로 바꾸자 점차 술맛이 살아난다. 그래도 아직 나의 미각을 충족시켜주지는 못하는 듯하다. 술 종목을 바꿨다. 역시 같은 주조사의 데와츠루 준마이긴죠(出羽鶴 純米吟醸).

 

 

긴죠의 향과 맛이 안정적이었다. 부드러웠다. 그런데 사케도 +5라면 상당히 드라이한 편인데 +2의 마츠쿠라보다 부드럽다. 마츠쿠라보다 2~3도 낮은 도수 때문이 아닌가 싶다.

 

데와츠루 준마이긴죠는 긴죠슈 특유의 안정감을 바탕으로 맛과 향이 선명하게 느껴진다. 사시미초회와도 무난하게 잘 어울려 술자리는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었다. 어둠이 찾아오자 약간 쌀쌀해진다. 은은하게 취기가 오른다. 데와츠루 준마이긴죠가 비워갈 무렵, 처음의 마츠쿠라를 따랐다. 이 술 저술 비교해 가며 마시는 건 나의 음주취향이다. 단순하게 한곳에 따라 비교하는 분들도 계시지만 그건 내 취향과 다르다.

 

"오~ 술맛이 아까와 완전히 달라졌어요!"

 

먼저 츠쿠라를 맛본 일행의 호들갑이다.

 

점차 술맛이 상승하고 있다는 건 느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확실히 나아지고 있었다. 첫잔의 매움은 수그러들었고, 대신 맛과 향이 풍부하게 일어났다.

 

"처음과 맛이 다른 사케는 처음 마시는 것 같아요." 연신 호들갑은 계속된다.

 

"그래요? 이게 사케입니다. 상온으로 오르면 잠들어 있던 맛과 향이 깨어나죠."

 

이제 알 것 같다. 그 일본인과 내가 느끼는 맛이 달랐던 원인을. 그건 바로 온도였다. 냉온의 긴장은 나의 맛이었고 실온의 온화함은 일본인의 맛이었던 것이다.

 

 

실제 제조사의 설명에 따르면, 마츠쿠라는 술을 미지근하게 데운 상태인 누루캉(ぬるかん)으로 마시는 게 최상의 맛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이처럼 사케는 종류마다 가장 맛있는 상태의 온도가 있다. 하지만 극단적인 맛을 선호하는 한국인의 특성상 잘 지켜지지 않기도 한다.

 

언젠가 사케바에서 아츠캉(따뜻하게 데운 상태)을 주문하였었다. 나온 술은 나의 기대와 달리 너무 뜨거워 잔을 잡을 수조차 없는 상태였다. 너무 데웠다고 하자 주인장도 인정한다. 그러면서 적정온도로 데워주면 사람들이 미지근하다고 싫어한다는 설명도 덧붙인다. 이게 우리 음주 수준의 현주소가 아닌가 싶다. 사케가 요리와의 맞춤도 중요하지만, 적정 음용온도로 마시는 일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이 사실을 마츠쿠라가 말해주었던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미디어다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사케, #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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