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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스스로 눈이 떠지기에 시계를 보니 6시 30분이었다. 모닝콜을 부탁하고 잠자리에 들었는데도, 한 시간이나 앞당겨 눈이 떠진 걸 보면 무척 긴장돼 있었던 것 같았다. 그냥 일어날까 하다 부탁도 했고 해서 다시 눈을 붙였다.  

 

다시 눈을 뜨고 시계를 보니 모닝콜이 울리기 직전인 7시 25분이었다. '긴장과 정신력이 이렇게 무서운 것이구나!' 하는 생각에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하의도행 배가 출발하는 시간은 아침 9시, 시간이 넉넉하기에 샤워도 하고 면도도 하는 등 여유를 두고 움직였다. 

 

 

빠진 소지품은 없는지 확인하고 8시쯤 여관에서 나왔다. 아침을 든든하게 먹어 두는 게 좋을 것 같아 근처를 돌아다니다 사람들이 웅성대는 식당으로 들어갔더니, 홍도와 흑산도에 관광 왔다는 부산 아주머니 30여 명이 김과 미역을 사서 자랑하느라 귀가 따가울 지경이었다. 

 

무엇을 시켜먹을까 고민하다가 평소 좋아하는 육회 비빔밥을 주문했는데, '버스든 선박이든 터미널 주변 식당은 별로'라는 소문을 무색하게 했다. 비빔밥은 물론, 개운한 파김치와 미나리무침의 담백한 맛이 전주, 영광의 육회비빔밥을 뺨칠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시간 여유가 있어서 맛을 음미해가며 천천히 그릇을 다 비우고, 맛을 칭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해서 주인아저씨(67세)와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루어졌는데,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이 있는 모양이었다. 재임 5년 동안 목포에 해놓은 게 없다는 게 가장 큰 이유이고, 주변 사람들도 같은 생각이라며 안기부 얘기를 꺼냈다. 

 

"여그요, 바로 여그에 안기부가 있었어요. 여그가 목포 관문 아닙니까. 그란디 대통령 시절에 그 안기부 하나를 없애지 못 허고 임기를 마감했다 이겁니다. 올 봄에사 건물을 뜯어냈어요. 그라니 쓰겄어요. 그 양반 땜이 나도 군대에서 피 본 사람입니다. 그란디···."

 

원망을 하면서도, 좋아하는 사람을 욕하고 싶겠느냐는 주인아저씨에게 어떻게 대답할지 몰라 씁쓸한 입맛을 다시면서 식당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맛있게 먹었으면서도 허탈해진 마음을 다잡으며 비안개가 자욱한 여객선 터미널 부근의 정경을 감상하니까 기분이 전환되는 것 같았다.

 

하의도행 표를 사려고 대합실에 갔더니 문 앞에 서 있던 직원이 하의도에 가려느냐고 묻기에 그렇다고 하니까 저쪽 건물 이 층으로 올라가라고 했다. 시원한 바다 공기는 식당에서 있었던 기분을 전환하기에 충분했고, 하의도행 요금이 공짜라는 것을 알고는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조금 있으니까 김 전 대통령을 태운 승용차가 터미널 주차장에 도착했고 일행이 배에 오르자 곧바로 출발했다. 배가 6년 전 다녀갈 때와 달라 선원에게 물어보니까 자리가 350석이 넘는 쾌속선으로, 홍도와 흑산도를 다니는 배인데 처음으로 하의도에 들어가는 거라고 말해주었다. 

 

# 쾌속선 객실 안에서

 

 

김 전 대통령 내외는 쾌속선을 타고 가면서도 창밖으로 보이는 바다풍경을 감상하며, 14년 만에 찾는 고향풍경을 눈앞에 그려보는지 가끔 눈을 감고 상념에 잠겼고, 박준영 전남 도지사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전날부터 행사장이 바뀔 때마다 비서관들이 주고받는 대화에서 간간이 오마이뉴스 얘기가 들리기에 이유를 몰라 궁금했다. 하지만, 물어보기도 뭐하고 그래서 '이만한 잔치에 오마이뉴스 기자가 빠질 수 없지'라는 생각으로 참고 말았다.

 

그런데 최 비서관이 선실에서도 얘기하기에 다가가 "어제(23일) 밤 여관에서 보니까 오마이뉴스 이주빈 기자가 대통령님 고향 방문 관련 기사를 올렸던데, 혹시 이 배에 타고 있습니까?"라고 물었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알려줘 만날 수 있었다.

 

이주빈 기자와의 만남은 이번 여행에서 또 하나의 추억을 만들어냈다. 올해 마흔이라는 이 기자는 생각보다 젊었고, 친절했다. 그는 작년 11월 26일에 올린 '시민기자 1년을 돌아봅니다'를 보았는데 솔직하고 곰살맞아 마음에 들었다며 칭찬해주어서 그런지 오래 사귀고 싶은 느낌이 들었다. 

 

이 기자와의 대화는 하의도에 도착할 때까지 이어졌는데, 일찍 도착하는 쾌속선을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 하의도에서

 

 

김 전 대통령 일행이 탄 남해 페리호가 하의도 관문인 웅곡포구에 도착하기 전부터 주민들은 함성을 지르며 환영했다. 14년 만에 고향땅을 밟은 김 전 대통령은 손을 흔들어 답하고 곧바로 선영을 참배하고 하의 3도 농민운동기념관 개관식장으로 향했다.

 

개관식 시작 전에 기념관을 둘러봤는데, 현관 계단 옆에 나란히 배치한 축하화환 중에 김 전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가 보낸 화환이 상가에 보내는 하얀 국화로 장식되어 이상했다. 누가 세워놓았는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데, 직원인가가 달려와 놀라더니 감추는 모습은 꼴불견이었다.

 

주민들 옆을 지나가는데, 어떤 아주머니가 "여그서는 가깡게 사진 좀 하나 잘 박아 주씨요"라고 하기에 "예, 그렇게 하지요."라고 했더니 "웃을라고 그라지요"라며 농으로 받으면서 주민들과 대화가 이루어졌다. 하의도 대리에 산다는 장남기(65세)씨는 "우리 면민들은 대통령 때 오기를 원했꼬, 또 그때 왔어야 머든 지대로 바까지고, 신경도 지대로 써지고 그랐을틴디, 대통령 그만두고 옹께 무슨 힘을 쓰겄소!"라며 아쉬워했다. 그는 신안군에서 하의도가 가장 빈촌이고, 비어 있는 집들도 제일 많다는 말을 덧붙였다. 

 

대통령 일행이 농민운동기념관에 도착하자 행사장 마당은 잔칫집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차에서 내린 김 전 대통령이 단상에 오르려고 휠체어를 타고 가자 가까이서 보려는 주민들이 몰려들었는데, "본 사람은 일로 나오랑께, 그래야 뒷사람도 조까 보제"라며 고함을 지르는 아주머니도 있었다.

 

어떤 할머니는 하의도가 생겨난 뒤로 사람이 가장 많이 모였다며 기뻐했고, 삼삼오오 모여 늙었어도 건강하고 옛날처럼 미남이라며 부러워하기도 했다, 사회자가 참석 인사를 소개할 때마다 꽹과리와 박수소리가 비안개 자욱한 하의도 앞바다로 퍼져 나갔다.

 

 

하의도 농민운동기념관 개관식은 우중에 치러졌다. 주로 하얀 비옷을 입은 노인들이 많이 보였는데, 빗방울이 굵어져도 자리를 뜨지 않고 대통령 축사를 경청했다. 일부는 숙연한 표정을 짓기도 했는데, 행사를 마치고 떠나려는 대통령에게 다가가 "김대중! 김대중!"을 외치기도 했다.

 

비가 내리는 관계로 대통령 축사로 기념행사를 마무리하고 기념식수에 이어 기념관 내부를 들러본 김 전 대통령은 입구에서 방명록에 사람을 하늘처럼 모시라는 뜻이 담긴 '사인여천'(事人如天)이란 글귀를 남겼다.  

 

개관식이 끝나고 대통령 일행이 떠나고서도 하의도 주민들은 자리를 뜨지 않고, 천막에 차려놓은 음식을 먹으면서 대통령 내외의 고향방문을 화제로 담소를 나눴다.

 

김 전 대통령은 섬 해안도로를 돌아 유명한 얼굴바위를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하고, 덕봉강당과 생가에도 들러보고 4학년 1학기까지 다녔던 하의초등학교를 방문했다. 학교 정문에는 김 전 대통령의 친필로 보이는 '새천년의 꿈'이라는 글귀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손자·손녀뻘 되는 후배들과 기념촬영을 했는데, 학생들은 두 팔을 머리꼭지로 모으고 하드 모양을 그리며 "할아버지 사랑해요!"를 연거푸 외쳤다. 

 

 

대통령 내외는 강당에서 지역 주민들과 오찬을 함께 했는데, 담백한 미역국에 지역 특산물인 김, 홍어 등이 적당히 삶아진 돼지고기와 잘 익은 김치가 상에 올랐다. 특히 천일염을 생산하는 지역답게 모든 음식이 개운하고 맛깔스러웠다.

 

하의초등학교 교장은 "김대중 전 대통령님 내외분을 모시고 오찬을 하는 것을 하의초등학교의 거룩한 행사이고 평생의 영광으로 생각합니다"라며 "민주화의 화신이고 세계 평화의 전도사인 대통령님과 이희호 여사님의 만수무강과 우리나라의 평화와 번영을 위하여! 건배"라며 잔을 높이 들었다.  

 

# 29시간 만에 대통령 일행과 헤어지다

 

하의도에서 일정을 마치고 오후 3시에 웅곡포구를 출발한 쾌속선은 4시쯤 목포항 여객선터미널에 도착했고, 대통령 일행은 호텔에 들렀다가 6시 KTX로 올라간다고 했다. 일정을 모두 마쳤는데 따라갈 이유가 없을 것 같아 시내버스를 타고 목포역으로 갔더니 4시 50분에 출발하는 KTX 열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함평행 기차표를 구입했을 때도 예감이 좋았는데, 집에 가는 기차도 바로 이용할 수 있어서 피로가 풀리는 것 같았다. 익산까지 표를 끊어 차에 오르니까, 옆 좌석에 주인은 없고 하의도에 관한 책자 두 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자리를 잡고 앉아 눈을 감고 있는데 옆자리 주인이 왔다. 하의도 행사에 다녀오느냐고 물으며 관련 책이 두 권인데 특별히 쓸 곳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아니라며 필요하면 드리겠다면서 한 권을 넘겨주기에 고맙게 받았다.

 

얘기가 진전되면서 그가 김대중 전 대통령의 막내동생 큰아들이고 필자보다 13년 아래라는 것도 알았고, 명함을 주고받으며 신상문제를 얘기할 정도로 금방 가까워졌다. 일산에서 커피숍을 한다는 그는 어렸을 때 경찰들에게 가택수색을 당하고 놀라던 추억들을 스스럼없이 말해주었다.

 

가슴을 아프게 했던 것은 그의 사촌형인 김홍일 전 의원이 병세가 악화되어 보좌관이 수저로 떠넣어주는 밥으로 연명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불법정치자금 문제로 검찰에 불려다니기도 했지만, 고문 후유증이라는 생각에 말할 수 없이 착잡했다. 

 

대화는 기차가 익산에 도착할 때까지 1시간 30분가량 이어졌는데,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재회할 것을 약속하고 헤어졌다. 별로 말이 없어 보였는데 반가운 만남이었고, 유익한 시간을 보낸 것 같아 기뻤다.

 

23일 오전 11시 5분에 KTX 고속열차에서 만나 24일 오후 4시가 조금 넘어 헤어졌으니까, 김대중 전 대통령 일행과 함께한 시간은 얼추 30시간 가까이 되었고, 비용은 왕복 기차요금 포함해서 6만7천 원이 들었다. 짧은 시간에 만들어진 값진 추억들을 10%도 표현하지 못했지만, 나머지는 추억의 앨범에 영원히 소중하게 보관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신문고뉴스(http://www.shinmoongo.net/)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김대중, #하의도농민운동, #함평나비, #목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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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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