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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이 적이다. 4·29 재선거를 일주일 앞둔 전주에선 '삼국지'보다 더 재미있는 '삼국지'가 펼쳐지고 있다. 명확히 정리되지 않은 혼란한 상황에서 이합집산과 권모술수를 총동원하여 각자 최대한의 이익을 얻으려 한다.

예상치 못한 '공천' 회오리가 초토화시키는가 싶더니 갑자기 등장한 합종연횡의 위력 앞에선 큰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연합' 돌풍이 더 매섭다.   

민주당 공천신청.
공천결과 불인정.
민주당 탈당 선언.
무소속 출마 선언.
정동영 출마포기 촉구 선언.
'정동영-신건'연대 지지 선언

몇몇 과정이 생략됐지만 불과 한 달 사이에 감쪽같이 이뤄졌다. 사방을 적으로 갈라놓더니 순식간에 아군으로 포위하고 마는 '연합군'의 위력이 기세등등해져만 간다. 적을 공격하지 않고도 친교를 맺어 이용하는 계책과 전략들이 강호 무림들은 저리 가라 할 정도다.

소신도 체면도 없는 원교근공(遠交近攻)과 맞불작전

19일 정동영 후보와 신건 후보가 전주시 경원 객사 앞마당에서 '무소속 연합' 공식 출범식을 갖고, 민주당 바로세우기에 나설 것을 천명했다.
 19일 정동영 후보와 신건 후보가 전주시 경원 객사 앞마당에서 '무소속 연합' 공식 출범식을 갖고, 민주당 바로세우기에 나설 것을 천명했다.
ⓒ 전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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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재선거 관전 포인트 하나는 '원교근공'을 누가 먼저, 적절히 구사하느냐다. 남의 힘을 빌어 적을 물리치고 자기의 입장을 지키거나 목적을 달성하는 계책이다. 이는 공자의 제자 자공이 노나라를 돕기 위해 제나라와 오나라를 서로 싸우게 하고 다시 진나라로 가서 오와 싸우도록 한 데서 비롯된 전략이다. 결국 힘이 빠진 오나라는 격파당하고 제나라는 혼란에 처하게 되었으며 진나라는 강국이 되어 노나라의 후견국이 되었다.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의 무소속 출마와 신건 전 국정원장과의 연대를 비난했던 적들(다른 후보)이 순식간에 속속 머리를 숙이며 '정-신'연합군 진영에 투항하는 모습들은 '원교근공'과 흡사하다. 가장 타격을 입은 쪽은 민주당이다.

맞불작전으로 응수하고 있지만 양 측 모두 소신이고 체면이고 따질 겨를이 없다. 말 바꾸기는 예사 일이 돼버렸다. 김근식 민주당 후보가 덕진에 전략공천된 지난 13일. 이에 반발한 민주당 임수진 후보가 기자회견을 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누구도 돕지 않겠다."

공천 탈락 후 당과 김근식 후보를 대놓고 비판한 지 이틀만에 김근식 후보의 선대위원장 자리를 맡았다. 탈당과 무소속 출마를 강변했던 그다. 그는 당일 오전까지도 기자들에게 전화를 걸어 무소속으로 출마하겠다며 심경의 변화가 있음을 알렸다. 그러나 몇 시간 뒤 김근식 선거사무소 개소식 현장에 나타나 선대본부장과 덕진구지역위원장 임명장을 받았다.

완산갑 민주당 경선에 나선 김대곤 후보와 김광삼 후보의 행보는 한술 더 떴다. 경선에 앞서 "당적이탈, 변경 등 일체 해당행위를 하지 않겠다"던 서약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무소속 연대 출범 이후 휴지조각이 됐다.

경선 직후 '성원에 보답하겠다'는 현수막까지 내걸었지만 두 사람은 불과 1주일 새 신건, 정동영 후보 선대본부장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민주당 예비후보였던 김형욱 후보나 오홍근 후보 역시 말을 갈아타면서 주적이 한나라당에서 민주당 지도부로 바뀌었다.

어제의 적이 오늘은 동지... 유권자들 '어리둥절'

금배지를 위해 자신의 정치 터전인 지역구를 옮기는 것은 손바닥 뒤집기보다 쉬운 일로 간주하고 있다. 원칙 없이 지도부 입맛에 맞춰 이뤄지는 당의 공천 방식도 문제지만 정치적 소신을 찾기 힘든 후보들의 행보는 선거를 한참이나 과거로 되돌려 놓고 있다. 깜짝 쇼도 끊이질 않는다.

19일 정동영-신건 무소속 연합 기자회견장에는 김대곤 전 정무부지사와 김광삼 변호사가 나타났다. 완산갑 민주당 공천에서 탈락한 후보들이다. 그런데 김 전 정무부지사는 신건, 김 변호사는 정동영 후보의 선대본부장을 맡았다. 어리둥절한 것은 민주당보다 유권자들이 더했다. 경선 참여에 앞서 '아름다운 경선 협약식'에 자필 서명을 하며 공정한 경선을 다짐했던 그들이 아니었던가.

김 변호사는 경선 직후 '성원에 보답한다'는 플래카드를 내걸기까지 했다. 말끔한 마무리에 유권자들은 성원했다. 그러나 불과 1주일만에 이들은 무소속 후보의 선대본부장직을 수락하는 등 유권자들에게 납득하기 어려운 행보를 보여주었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도 적이었던 사이가 금세 아군 관계로 돌변하고 마는 형국. 이것이 정치다. 더 가관인 것은 무소속 신건 후보와 민주당 김근식 후보는 정작 투표권 없이 선거를 치른다. 미처 지역으로 기한 내에 주소 이전을 하지 못하고 뒤늦게 출마 선언했기 때문이다. 정치판에서 볼 수 있는 진풍경이다.

완산갑 무소속 김형욱 후보도 여기에 뒤지지 않는다. 그는 예비후보 당시 만나는 사람마다 '정세균 대표 특보'라며 자신을 소개했다. 그런 그가 1차 컷 오프에서 탈락하자 "개혁공천이 실종됐다"며 날을 세우더니 급기야 탈당, 무소속 출마를 강행했다. 그런 후 정동영 후보와 찍은 사진을 어깨띠, 플래카드 등에 사용하면서 불과 수주 전까지 정세균 대표 특보라고 소개했던 사람이 '정동영이 전북정치의 중심'이라고 처지를 바꾸었다.

화기치상, 진화타겁지계에 놀란 '민주'

4.29 재보선 공식 선거운동 첫날인 16일 전주 덕진에 출마한 김근식 민주당 후보가 지원유세에 나선 정세균 대표와 함께 모래내 시장 상인들과 인사하며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4.29 재보선 공식 선거운동 첫날인 16일 전주 덕진에 출마한 김근식 민주당 후보가 지원유세에 나선 정세균 대표와 함께 모래내 시장 상인들과 인사하며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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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지역을 텃밭처럼 여겨왔던 민주당과, 한솥밥을 먹던 당에서 탈당해 무소속 연대로 세력을 강화하는 연대세력과의 날선 공방은 아슬아슬하다. 결전의 날이 코앞에 임박하면서 비장의 계책과 무기들이 속속 그 실체를 드러낸다.

보여줄 수 있는 건 죄다 보여주고 싶은 모양이다. '원교근공' 전법으로 재미를 본 '정-신 연합군'에 또 다른 원군이 나타났다. 인근 광주발 '화기치상' 소식이다. 광주지역 지지자들이 21일 오전 전북도의회 브리핑룸에서 기자회견을 마친 후 무소속 정동영·신건 후보에게 '화기치상'(和氣致祥)이라고 쓰여진 큼지막한 글씨를 전달했다.

두 후보가 글씨를 들어 보이며 환한 웃음을 지으며 기념촬영에 응하는 모습이 의기양양했다. 절반의 고지를 넘어선 듯한 뿌듯함도 입가에 배어났다. '화기치상'. 화합하는 기운이 모여 상서로운 일을 만든다는 뜻을 담고 있다. 하루아침에 곤마가 대마되어 중원을 향해 비상하는 형국을 보는 듯하다.

민주당과 무소속 연대의 공방전이 날로 치열해지면서 한나라당과 진보신당 등 다른 정당들도 바빠졌다. '진화타겁지계(袗火打劫之計)'를 활용할 절호의 기회가 왔기 때문이다. '불난 집은 휘젓고 적의 곤경을 이용하여 쳐들어가라'는 의미의 계책이 효과를 발휘할 적기다.

민주당과 무소속 연대가 서로 맞불을 놓으며 치열한 전투를 벌이는 사이 열세에 놓인 후보들은 캠페인 전략 수위를 한층 높이고 나섰다. 우선 한나라당 최고위원들의 지원유세가 잦아졌다. 톤도 높아졌다. 박희태 최고위원은 지난 17일 "전주에서 우리 한나라당 후보가 당선이 된다면 이 이명박 정부가 얼마나 여러분들을 잘 모시겠는가"라며 "이제는 든든한 일꾼 하나 부려 먹을 때가 되었다"고 말했다.

한나라당 후보들도 "이번에만큼은 꼭 두 자리 수 지지율을 끌어낸다"는 각오다. 중앙당에 '두 자리 수' 승전보를 전하기 위한 이들의 계략이 과연 먹혀들지 궁금하다.

한나라당 박희태 대표가 17일 전주 완산갑에 출마한 태기표 후보 지원유세를 하며 유권자들에게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한나라당 박희태 대표가 17일 전주 완산갑에 출마한 태기표 후보 지원유세를 하며 유권자들에게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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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신당의 추격도 만만치 않다. 진보신당 노회찬 대표는 22일 전북도의회 브리핑룸에서 열린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전북지역 노동자의 염경석 후보 지지선언에 앞서 가진 인사말을 통해 "정동영 후보를 향한 지지열기가 사실은 정당정치를 파괴하고 룰을 무너뜨리는 것에 전주시민들도 스스로 안타까워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소속 전북지역 노동자 234명이 덕진에 출마한 진보신당 염경석 후보의 지지를 선언한 것도 예사롭지 않다. 이들 노동자들은 22일 오전 전북도의회 브리핑룸에서 한 지지선언 기자회견을 통해 "보수정치를 뒤집고 노동자들의 이해와 요구를 대변할 수 있는 사람은 염경석 후보이다"며 "노동자 투쟁 현장에 늘 같이 해왔던 동지 염 후보를 지지하고 지원하는 것은 전북지역 노동자들의 자존심이다"고 지지배경을 설명했다.

민주당 '차도살인(借刀殺人)' 역공, 먹히려나?

'정동영'이란 초 대마의 기세에 눌려 졸지에 곤마의 위기로 몰린 민주당에게 시급한 전략은 차도살인(借刀殺人). 적의 실체가 이미 밝혀졌는데도 동맹군의 태도가 모호할 때는 동맹군을 끌어들여 적을 무찔러야 이쪽의 힘을 아낄 수 있다는 계책이다.

그러나 이 계책마저 '정-신' 연합군에 선수를 빼앗기고 만 양상이다. 이미 상당수 아군들이 적의 동맹군이 됐다. 처량한 신세가 됐다. '원교근공', '화기치상'에 이어 '진화타겁지계'에 포위됐으니 난국을 어떻게 수습해 나갈지 갈수록 미궁이다. 다행이 동맹군이 나서줬다.

지방의회 의원들이다. 유창희 전북도의회 의원이 총대를 멨다. 그는 "신건 후보는 자신이 출마한 선거에 투표권도 없고, 토론회 참석 의지도 없고, 정책공약도 없는 3무(無) 후보"라며 신 후보를 맹공하고 나섰다.

그는 22일 CBS 주최 후보자 토론회에 신건 후보가 불참을 선언한 것과 관련, 21일자 성명을 통해 이같이 밝히면서 "출마선언도 늦게 한 후보가 토론회까지 불참하는 것은 지역 유권자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고 주장했다.

또한 "유권자들은 무엇을 보고 판단하란 것인가"라고 반문하며 "정책비전과 후보자 됨됨이를 검증받을 기회를 스스로 회피하는 신 후보는 후보로서 자격이 없다"고 비난했다. 그에  따르면 신 후보는 선거인 명부 작성(4월10일) 후인 지난 15일 서울 서초구에서 전주 완산갑으로 전입신고를 해와 이번 완산갑 재선거에 투표권이 없는 상태다.

이와 함께 유 의원은 "출마선언 이후 지금까지 '정동영-신건 무소속연대'로 정치공세를 퍼부으면서 전주발전에 대한 정책공약과 뚜렷한 계획을 발표한 바가 아직 없다"고 꼬집었다.

'한석봉과 어머니 채찍론' 새로운 아이콘 부상

재미있는 관전 포인트가 더 있다. '한석봉 채찍론'이 흥미롭다. "어머니, 정동영입니다"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무소속 돌풍을 일으킨 정동영 후보를 겨냥한 공격의 아이콘으로 '한석봉 어머니'를 거론하며 민주당과 진보신당이 맹공을 퍼붓고 나섰다. 민주당 박주선 최고위원은 22일 전북도의회 브리핑룸에서 한 기자회견에서 정 후보가 내세운 '어머니'라는 표현을 한석봉 어머니에 비유해 날선 메스를 가했다.

박 최고위원은 이날 "정 후보는 어떤 변명으로도 정당화 될 수 없는 민주당 파괴행위를 자행하면서 당치도 않은 '정동영 죽이기'라는 억지 명분을 내세워 '어머니'를 외치고 있다"며 "하지만 민주당을 죽이는데 이해하고 품어줄 어머니는 전주에는 안 계시다는 점을 명심해 달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전주시민들이 '한석봉의 어머니'가 돼 정 후보의 민주당 파괴행위에 대해 따끔한 채찍을 들어 꾸짖어 달라"고 호소했다. 이에 앞서 이날 덕진 진보신당 염경석 후보를 지지하는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전북지역 노동자들도 '지지노동자 선언문'을 통해 '한석봉 어머니 채찍론'을 강조해 눈길을 끌었다.

이들은 선언문에서 "한석봉 어머니를 기억하십니까? 한석봉 어머니는 글쓰기가 힘들다고 포기하고 온 아들에게 따끔한 가르침으로 당대 최고의 서예가로 만들어 놓았다"며 "전주시민은 바로 이런 한석봉의 어머니가 돼야 한다"고 밝혔다.

선거가 일주일 앞으로 다가오면서 유권자의 표심을 사려는 계책이 횡횡하고 있다. 또 적을 공격하며 설득하여 아군으로 유인하려는 계책도 난무하고 있다. "더 이상 유권자의 현명한 판단력을 흐리게 하지 말라"고 하면서도 정작 흐리게 하는 건 바로 그들 자신이다. 이것이 정치다.

그렇다고 정치참여를 포기해선 안 된다. 정치엔 신물이 난다며 투표를 포기한다고 해서 결과에 대한 의무와 책임이 면해지는 것이 아니다. 투표결과에 대한 책임과 고통은 누구나 함께 짊어지는 것이다. 투표에 참여하여 주권을 행사하는 것이 소중한 이유다.   


태그:#4.29재보선, #삼국지, #전주덕진, #전주완산갑, #정동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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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가 패배하고, 거짓이 이겼다고 해서 정의가 불의가 되고, 거짓이 진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성의 빛과 공기가 존재하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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