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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정부당국자가 현관문을 노크하더니 현금 90만원을 건네주면서 마음대로 쓰라고 한다면, 당신은 그 사람에게 어떤 말을 하겠는가?

혹시 "정부가 무슨 권리로 국가 세금을 함부로 나누어 주느냐?"면서 화를 내겠는가. 아니면 "불경기의 영향으로 죽을 지경이었는데 유용하게 쓰겠다"고 말하겠는가. 만약 그 돈을 받아서 쓴다면 어떤 용도로 쓰겠는가?

정부가 이만큼 돈을 준다면...
 정부가 이만큼 돈을 준다면...
ⓒ 호주abc-TV 화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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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정부는 지난 크리스마스에 이어 4개월 만인 4월 6일, 2차 현금 보너스를 풀었다. 호주 가정의 절반에 해당되는 870만 명이 이 혜택을 받았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불러온 불경기를 타개하기 위한 경기부양책이라는 게 정부의 설명이다.

정부는 1차 때에는 저소득층에게만 현금보너스를 지급했지만, 2차부터는 일부 중산층도 대상에 포함시켰다. 4%대를 유지하던 실업률이 최근 5.2%로 늘어나면서 중산층에도 위기가 닥쳤기 때문이다. 정부는 머지않아 3차 현금보너스 법안도 의회에 제출할 예정이다.

서민들은 시대적 상황에 따른 시의적절한 정책이라면서 대환영하는 분위기다. 그러나 부유층은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다. "부자들한테 돈을 훔쳐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로빈 후드 정부"라는 것. 야당과 법학자 일부도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한 법학자는 정부가 세금을 함부로 쓰고 있다면서 연방대법원에 위헌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과연 케빈 러드 총리의 야심찬 경기부양책은 성공할 수 있을까. 최근에 실시된 AC닐슨 여론조사에 의하면, 러드 총리의 지지율은 무려 74%였다. 호주 정치역사상 두 번째로 높은 수치다. 그러나 이 지지율이 곧 경기부양으로 이어질지는 아직 알 수 없다.

현금보너스를 대하는 호주의 3가지 모습을 소개한다.

경기부양책으로 중저소득층에게 지급하는 현금보너스의 정당성을 판결한 대법원을 보도한 <디 오스트레일리안>.
 경기부양책으로 중저소득층에게 지급하는 현금보너스의 정당성을 판결한 대법원을 보도한 <디 오스트레일리안>.
ⓒ 디오스트레일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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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1-서민들] "고마워요 정부, 우리 여행왔어요"

4월 13일 오전 오페라하우스 건너편 공원. 멜버른에서 온 제프 맥그리거(34) 가족이 관광을 즐기고 있다. 제프는 조경회사 노동자로 일하다가 건설경기 침체로 2개월 전 일자리를 잃었다. 아내 제니 하우제거(29)는 바이오텍 공부중이다.

이들은 '중저소득층'(Family Tax Benefit A 카테고리) 가정으로, 정부가 지급하는 현금보너스 대상자다. 아들 둘과 딸 하나가 있는 제프 가족은 1차 현금보너스로 3천 호주달러(약 270만원, 이하 달러), 2차 현금보너스로 3750 달러(약 340만원)을 받았다.

이들 부부는 정부의 현금보너스를 어떻게 생각할까. 제니의 말을 들어보자.

"내가 연구원으로 직장생활을 하다가 공부를 다시 시작한 상황에서 제프가 직장을 잃었다. 지금도 돈을 아껴야하는 입장이지만, 경기부양을 위해 돈을 써야 한다는 러드 총리의 당부를 받아들여 열흘 동안 국내여행을 하는 중이다."

제프 맥그리거와 제니 하우제거 부부와 세 자녀.
 제프 맥그리거와 제니 하우제거 부부와 세 자녀.
ⓒ 윤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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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2 -젊은이들] "잘 쓸 게요, 내 맘대로"

4월 8일 오전 시드니의 NOVA-FM 스튜디오. 케빈 러드 총리와 젊은이들의 전화대화가 예정된 곳이다. 주제는 "정부의 2차 현금보너스(420억 달러) 지급으로 발생할 개인 수령액 900달러 소비방안".

러드 총리는 방송 들머리에 "전적으로 당신들의 돈이니 어떻게 쓰든 상관없지만 가능하다면 호주경제에 보탬이 되면 좋겠다"고 운을 뗐다. 그러나 젊은이들의 생각은 달랐다.

경기부양 현금보너스와 정확하게 일치하는 가격 $900에 판매하겠다고 광고하는 Kogan TV.
 경기부양 현금보너스와 정확하게 일치하는 가격 $900에 판매하겠다고 광고하는 Kogan TV.
ⓒ Kogan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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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전화를 걸어온 크리스는 "총리는 내가 이기적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그 돈으로 뉴질랜드 여행이나 다녀올 예정"이라고 말했다. 러드 총리가 "해외여행은 나중에 하고 이번엔 국내여행을 하면 안 되겠나?"라고 제안했지만 크리스의 답변은 "노"였다.

총리가 원하는 답은 세 번째 전화에서 나올 뻔했다. "홈 시네마 시스템을 구입하겠다"는 응답자가 나온 것. 그러나 그는 "호주산은 성능이 좋지 않아 수입품을 사겠다"고 덧붙임으로써 러드 총리를 낙심케 했다.

결국 이날 전화에서 '국내소비'를 약속한 사람은 제르미 리스 한명 뿐이었다. 낮에는 럭비선수, 밤에는 럭비클럽의 바텐더로 일하는 '투잡맨'인 그는 "비록 합성사진이지만, 총리가 벌거벗은 모습으로 국내관광을 독려하는 광고를 보고 크게 감명 받았다"며 "900달러로 국내여행을 다녀올 예정"이라고 말했다.

한편 조 호키 야당 의원은 "2008년에만 국내여행객 숫자가 4.5%나 감소했다"면서 "국내 경기 부양을 위해 지급된 현금보너스를 정부의 취지 대로 사용하지 않은 경우, 이를 회수조치하는 방책을 강구하라"고 촉구했다.

[#풍경3-정치권] "기업을 살리자" vs. "서민을 살리자"

현금서비스 정책에 대해 가장 거세게 반발하는 것은 야당이다. 케빈 러드 총리의 노동당이 집권하기 전까지 여당이었던, 보수야당 자유-국민연립당은 "효과도 확실하지 않은 현금보너스를 언제까지 지급할 거냐?"며 "노동당 정부의 두 번에 걸친 현금보너스 폭탄은 불발로 끝났다"고 연일 정치공세를 펴고 있다. "세금인하 정책으로 기업을 살려서 경기를 부양하자"는 게 야당의 주장이다.

"70~80년대 노동당 집권 기간 동안 발생한 960억 달러를 90년대에 집권한 보수 연립당이 10년 동안 갚았다. 거액의 해외차관도 감당 못하는 적자재정으로 미래세대에게 빚만 잔뜩 물려주는 게 노동당 정부다."

이에 대해 노동당 정부의 경제를 담당하는 웨인 스완 재무장관은 반박은 이렇다.

"야당은 국가의 파산을 학수고대하는 것 같다. 1차 현금보너스 지급으로 소매업계의 판매증진과 그에 따른 고용증가 효과의 통계가 있다."

지지율 74%의 캐빈 러드 호주총리가 관광산업 홍보에 나섰다.
 지지율 74%의 캐빈 러드 호주총리가 관광산업 홍보에 나섰다.
ⓒ 호주관광청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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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드 총리는 <채널7>이 주최한 '국민과의 대화'에 참석해 야당과 부유층에 직격탄을 날리기도 했다.

"글로벌 금융위기는 신자유주의 체제 아래서 일부 탐욕스런 부자들이 저질러놓은 엄청난 재앙이다. 그런데 그 피해를 가난한 나라와 가난한 사람들이 고스란히 떠안는다면 불공평하지 않은가. 경제 위기에 직면한 계층을 정부가 나서서 적극적으로 구제하는 건 당연한 의무다.... 은행 CEO 출신인 말콤 턴불 자유-국민연립당 당수는 아직도 신자유주의의 미련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경기활성화를 핑계로 부자들의 세금을 감면하자고 주장하는가 하면, 복지정책의 축소를 거론하고 있다. 그럼 서민과 노동자 계층은 항상 부자들의 뒤치다꺼리나 하란 말인가?"

"정부가 일부 국민에게 세금으로 선물 주는 건 위헌"
[인터뷰] 연방대법원에 제소한 브라이언 페이프 법학 교수
호주 정부의 2차 보너스 지급은 하마터면 취소되거나 연기될 수도 있었다. 지난 3월 말, 뉴잉글랜드대학교 브라이언 페이프 법학교수가 "이번 조치는 현금보너스가 아니고 노동당 정부의 선물이다, 정부가 일부 국민에게 세금으로 선물을 건네는 정책은 위헌"이라면서 연방대법원에 제소했기 때문. 

그러나 페이프 교수의 주장은 연방대법원이 '합헌' 결정을 내림으로써 불발로 끝났다. 16일, 소송 제기 사유와 결과에 대한 페이프 교수의 의견을 듣기 위해 그를 전화로 인터뷰했다.

브라이언 페이프 뉴잉글랜드 법학 교수.
 브라이언 페이프 뉴잉글랜드 법학 교수.
ⓒ 뉴잉글랜드대학교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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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도 250달러의 현금보너스를 받게 된다고 들었다. 그 돈은 받았나?
"아직 못 받았다. 그러나 조만간 올 것이고 나는 기꺼이 받아서 쓸 생각이다."

-위헌이라고 제소면서 그 돈을 받는 행위는 모순으로 보이는데.
"호주는 법치국가다. 사법부의 판결에 승복해야 한다. 지난 3월 말, 연방대법원에서 위헌이 아니라는 결정을 내렸다. '정부가 저소득층의 생계를 보조하고, 침체된 경기를 부양하기 위해서 세금을 활용하는 것은 합헌'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혹시 이런 결과를 예상하고 제소한 것 아닌가?
"그렇지 않다. 무려 840억 달러의 예산집행이 취소될 수 있는 사안을 놓고 경솔하게 제소하는 건 법학자의 도리가 아니다. 나는 결과를 반반으로 생각했다. 내가 의도한 건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합헌 결정이 내려졌으니 노동당 정부도 소신껏 예산을 집행할 수 있게 됐다."

-그럼 연방대법원의 결정에 흔쾌히 승복하는가?
"당연하다. 나는 법을 가르치는 교수이고 변호사다. 하지만 나는 일개 시민일 뿐이다. 평범한 시민이 연방정부의 정책을 반대하면서 연방대법원에 제소했고, 사법부는 그걸 즉각 받아들였다. 어디 그뿐인가. 소송제기 6일 만에 연방대법원 판사 7명이 명료한 결정을 내려주었다. 지구에 이런 나라가 몇이나 되겠는가?"


태그:#호주 경기부양책, #현금보너스, #케빈 러드 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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