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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수 씨
 이왕수 씨
ⓒ 박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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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해야 예술이 나온다'는 말이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예술을 하려면 돈이 필요하다. 단순하게 생계를 유지하는 차원을 넘어 교육을 받는데 필요한 돈만 해도 엄청나다. 돈 때문에 예술의 꿈을 포기한 이도 적지 않다. 그래서 예술가는 보통 2개 이상의 직업을 갖기 마련이다. 꿈을 위한 직업과 생계를 위한 직업.

그래서 장사꾼이 되기로 했다. 돈을 벌어 그 돈으로 마음껏 예술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초기 자본금이 없었다. 무자본으로 시작할 수 있는 일을 구상했지만 마땅한 아이디어도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단체 티셔츠를 만들어 팔기로 했다. 학교, 교회 등 각종 행사 때 단체티를 필요로 하는 곳이 분명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배운 적도 없는 디자인을 직접 해냈고, 주문을 받기 위해 발로 뛰었다. 인터넷 클릭보다 빠른 것은 직접 찾아가는 것이라 생각했다. 전국의 대학교를 돌아다녔고, 결국 장사밑천 없이 시작한 사업은 지난해 세계소리축제와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의 단체티 제작을 맡을 만큼 안정 궤도에 올랐다. 

현재 전북대학교 한국음악학과에 재학 중이며, 단체티 제작 회사 '루'의 CEO를 맡고 있는 이왕수(25)씨가 이처럼 사업에 뛰어들게 과정을 보면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하다. 지난 15일 전북대 예술대에서 그를 만나보았다.

"판소리, 내 길이다 싶었다"

진로설계에 여념이 없을 10대와 20대 가운데, '이게 정말 내 길이다'라고 생각하며 공부하는 학생이 몇이나 있을까. 확답할 순 없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은 학년이 올라가고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진로를 수정하고, 결국은 성적과 출신학교에 비례하는 '연봉'에 맞춰 '직업'을 선택하곤 한다. 이를 두고 굳이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런 현실에는 왠지 모를 씁쓸함이 뒤따른다. 하지만 이왕수씨는 달랐다.    

"저요? 저는 초등학교 때부터 판소리가 내 길이다 싶었어요. 그래서 일부러 다니던 속셈학원과 중등 입시준비반 학원을 그만두기도 했죠. 물론 학원을 마음대로 그만둔 사실을 들켜 엄마한테 맞기도 많이 맞었지만요. 하하~ 사실, 부모님은 조금 더 나은 직업을 갖기 희망하셨거든요."     

TV에서 방영되는 판소리는 죄다 녹화해서 개인적으로 연습을 했다는 이왕수씨는 중학교에 올라간 뒤 머리에 붕대를 감고도 판소리 학원에 갈 정도로 열정을 보였다고 한다. 그 후,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현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에 진학한 이씨는 전북대 한국음악과로 자신의 진로를 정하고 현재 판소리 공부를 계속해 나가는 중이다.  

여주 판소리 스타, 이왕수   

이왕수 씨
 이왕수 씨
ⓒ 박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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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는 사실 경제적으로 여유있는 직업이 아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판소리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이왕수씨를 만류했던 그의 부모님 역시 그런 이유에서였다. 어렸을 적부터 글 쓰기 대회에서 많은 입상 경험을 쌓은 그를 두고 아버지는 기자가 되라고 권유하시기도 했다. 하지만 이왕수씨는 군대에서의 경험을 통해 다시금 판소리만이 자신의 길이라는 결심을 굳히게 됐다.

"원래 작전병으로 군대를 들어갔는데, 판소리를 한다는 이유로 여기저기 공연을 많이 다녔어요. 다른 부대는 물론이고, 여러 지역축제에 초청받아 공연을 하러 다녔죠. 그런데 사람들 반응이 너무 극과 극이었어요. 개인적으로 예술을 하는 입장에서 상처도 많이 받았죠. 그런데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또 저를 굉장히 좋아해주셨거든요. 호응도 많이 해주시고요. 여주에서는 저만한 스타가 없었습니다. 하하~"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격려에 힘을 얻는 이왕수씨는 자신이 국악을 그만두면 누가 국악을 하겠느냐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결국, 젊은 사람이 연구를 하고 발전을 시켜야 국악도 생명력을 가질 수 있다고 판단한 이왕수 씨는 판소리를 자신의 업으로 삼아야겠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판소리 청년, 극작가가 되다

경기도 분당 출신인 이왕수씨는 대학선택에 있어서도 많은 고민을 했다. 지금 다니고 있는 전북대는 아무래도 지방대학이기 때문에 선뜻 선택하기에 걸리는 게 많았다. 그럼에도 이왕수씨는 결국 전북대를 선택했다. 이유는 판소리의 본고장 전주에서 공부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전주는 서울하고 달라요. 소리 자체가 오리지널이죠. 저는 입학할 때 서울에서 가방 7개를 싸가지고 내려왔는데, 소리의 본고장에서 판소리를 배운다는 생각을 가지고 유학 온다는 기분으로 왔어요. 개인적으로도 공부하는데 있어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거든요. 저에게 전주는 기회의 땅인 셈이죠."

무대 위에서 공연하는 것을 즐기는 이왕수씨는 판소리 뿐만 아니라 직접 창극의 시나리오를 작성하는 극작가로서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이미 극으로 집필한 작품만 3편이 넘는다. 특히 지난해 전라북도에서 공모한 '2009전북 문화예술지원단체 지원사업'에 그의 '독도야 미안해'가 당선되면서 그는 등단의 꿈을 이루게 됐다.

전북대 예술대 졸업생 위주로 구성된 예술단 '다움(소리판)'의 사무국장을 맡고 있는 그는 창작창극에 관심이 많이 있어 지난해부터 비밀리에 혼자 공모전 준비를 시작해 올해 1월 당선에 이르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의 등단작이기도 한 '독도야 미안해'는 초등학생, 중학생 등 어린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진 창극으로, 아이들에게 독도라는 역사와 창극이라는 우리 문화를 알리는 교육적 취지에서 만들어졌다. 이르면 오는 10월 무대에서 만나볼 수 있다고 하니 자세한 내용은 직접 눈과 귀로 확인하는 게 좋을 듯싶다. 

그는 왜 장사꾼이 되었나?

그렇다면, 판소리와 창극 등 국악에 관심 있는 그는 왜 장사를 시작하게 된 것일까. 이유는 바로 '돈'이다.

"2005년 군 입대를 했어요. 2007년 제대를 앞두고 무엇을 할까 고민을 하던 차에 극단을 만들어 보고 싶었죠. 그런데 극단을 만들려면 돈이 필요해요. 전 10원 한푼 없었거든요. 그래서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돈을 번다는 게 생각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그는 무일푼이었다. 발로 뛰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전국의 대학교를 돌아다녔다. 단체티 주문을 받아 본인이 직접 디자인을 하고 공장에 맡기는 일련의 과정은 그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줬다. 물론, 인터넷보다 빠른 건 직접 찾아가는 것이라는 그의 신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단체티 제작 전문회사 '루'는 그렇게 태어났다.

올해 몇 달 만에 수천만 원의 매출을 달성했을 정도로 '루'는 어느 정도 안정궤도에 올랐다. 물론 이왕수씨에게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저에게 '루'는 정말 소중한 회사예요. 저는 '루'를 하나의 기업으로 만들 생각이에요. 앞으로 5년을 내다보고 있는데, 5년 후에는 다른 사업으로 확장할 생각입니다. 그래서 '정상'이라는 뜻을 가진 '루'가 기업이 됐을 때, 그 때에는 제가 돈을 투자해서 정말 최고의 예술단체를 만들 생각이에요. 우리 국악을 세계에 알릴 수 있는 그런 예술단체를 말입니다."

"대학생들이여, 세상 밖으로 나와라!"

예술을 위해 장사를 선택한 그는 이제 막 자신의 '꿈'을 위한 첫걸음을 뗐다고 한다. 꿈이 없는 삶은 죽은 삶과 다를 바 없다는 그는 자신이 감명 깊게 읽은 <9살 인생>의 한 구절을 인용하며 지금의 대학생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전했다.

사람이 꿈꿀 수 있는 욕망은 무한하다. 거지는 왕자가 되고 싶어 하고, 왕자는 왕이 되고 싶어 하고, 왕은 신이 되고 싶어 한다. 하지만 모든 욕망이 현실에서 다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현실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 욕망은 어찌되는가? 그것은 우리 마음 속에 고이고 썩고 응어리지고 말라비틀어져 마침내는 오만과 착각과 몽상과 허영과 냉소와 슬픔과 절망과 우울과 우울감과 열등감이 되어버린다.

이런 성격파탄자가 되고 싶지 않다면 우리는 두 가지 방법 가운데 하나를 택해야만 한다. 현실에 맞춰 욕망을 바꾸거나 욕망에 맞춰 현실을 바꾸는 것이다. 골방철학자도 분명 이런 양자택일의 결단을 했어야 했다. 이 가련한 청년은 머릿속으론 온갖 욕망을 다 꿈꾸었으나 몸뚱이는 골방의 문턱조차 넘으려들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점점 성격파탄자가 되었고 마침내는 비극을 맞고 만다.

현실을 무시한 채 좋아하는 일을 하라고, 해보고 싶은 거를 해보라는 것은 너무 상투적이라는 이왕수씨. 다만 그는 실패든 성공이든 무엇을 했을 때 가능한 것이라며, 누구든 안에서만 생각하지 말고 무엇이 됐든 밖으로 나와 경험을 해봤으면 좋겠다는 당부의 말을 잊지 않았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삼으면, 스트레스를 받지만 대신 후회는 없다'는 그의 마지막 말이야말로 '청년 CEO 이왕수'를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이 아닐까 싶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선샤인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판소리,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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