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경민이가 제 아들 녀석입니다.

많지 않지만 전주에서 막 가져왔습니다.

나누어 드시고 오늘 꼭 우승하기 바랍니다.

참, 그리고 부족한 우리 경민이 많이 좀 혼내 주세요."

 

1992년 아지랑이 아른거리던 어느 봄날. 한국기자협회가 주관한 전국 기자들의 친선축구대회에 처음으로 출전한 <전북도민일보> 신현근(辛鉉根) 사장은 누구보다 바쁘고 신났다.

 

당시 우후죽순 창간한 지역신문들의 큰 숙원이었던 기자협회 가입을 성사시킨데다 1년 중 유일한 전국 언론사 기자들의 축제나 다름없는 축구대회에 참여하게 됐으니 그럴 법도 하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기자협회 가입조건은 더욱 까다로웠던 것 같다. 지역 회원사들의 승인과 전국 협회 차원의 엄정한 심사기준을 통과해야만 했다.

 

그러니 신생 지역일간지 사장으로서는 여간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지금은 고인이 됐지만, 당시 신 사장은 체육대회가 열리는 대전까지 사전에 준비한 인절미 떡과 막걸리를 가득 담은 보따리를 손수 챙겨 들고 기자들과 함께 차에 올랐다.

 

처음 출전하는 신문사이기에 기자들의 사기를 북돋워주기 위해 준비한 것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현지에 도착하자마자 절반으로 나눈 뒤 절반의 보따리를 어디론가 들고 가는 게 아닌가. 그가 가고 있는 곳은 맞은편 MBC 응원석이었다.

 

"부족한 제 아들 경민이를 많이 혼내주십시오"

 

당시 기자로 근무하고 있는 아들 회사인 MBC 기자들에게 나누어 주기 위한 것이란 걸 우리는 그제서야 알게 됐다. 큰 키에 깡마른 체구를 지닌, 예순을 훌쩍 넘은 신문사 사장이 떡과 막걸리 대여섯 병이 담긴 박스를 내밀며 허리를 연신 구부리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러면서 그는 "부족한 제 아들 경민이를 많이 혼내주라"는 모습이 우스꽝스럽기도 하거니와 왠지 짠해 보였다. 아들이 몸담고 있는 방송사 동료들에게 소탈한 미소와 유머를 막걸리 한잔에 담아 일일이 나눠주는 모습은 영락없는 우리네 아버지, 자식 앞에 늘 죄인이 되기 마련인 애잔한 아버지, 바로 그 모습이었다.

 

당시 총각이었던 필자는 아들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이 무엇인지 알 리가 없었다. "아들을 많이 혼내 달라"는 주문은 역설적으로 "많이 감싸고 보듬어 달라"는 뜻이란 것을 결혼하고도 한참 뒤에야 깨달을 수 있었다.

 

1990년대 초 필자가 지역 언론사 기자로 첫발을 내디뎠던 신문사의 2대 사장이었던 고인은 당시 MBC에 몸담아 현장을 누비며 고군분투하던 신경민 기자의 아버지였다. 참고로 하나뿐인 필자의 아들 이름도 '경민'이다. 그래서 인지 이래저래 요즘 그가 처한 현실을 바라보면 만감이 교차한다.   

 

당시 경영이 어려웠던 신문사 사장 제의를 선뜻 받아 주었던 고인은 돈 많은 사주도 아니었고, 지금과 같이 여러 사업을 하면서 언론사를 사업의 방패막이처럼 활용하는 상식 밖의 사장도 아니었다.

 

60년대 초반부터 전북일보 기자로 활동하면서 편집국장, 주필을 역임하기까지 반평생을 언론인으로 불태워왔던 고인은 군부에 의한 '1지역 1신문사체제'가 거센 민주화 물결에 힘없이 무너진 80년대 후반, 새로운 지역신문들이 창간되면서 올곧은 기자정신이 높이 평가돼 신생 신문사 사장으로 추대된 것이다.   

     

"기자가 정실·정파주의에 휘둘리게 되면 진실을 보지 못한다"

 

고인은 젊은 기자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을 무척 즐겨했다. 힘든 지역 신문사 생활을 하면서도 그처럼 힘과 용기를 심어주었던 사장은 그리 흔치 않다. 신문사 전 직원들이 한 달에 한 번씩 모여 회의를 하는 자리에서도 그는 늘 교과서적인 원칙을 강조하곤 했다. 아울러 마지막 클로징 멘트를 해주곤 했다. 늘 '정론직필'을 강조하시며 일러 주셨던 말들이 지금도 또렷하다.

 

"기자는 사실보다 진실을 볼 줄 알아야 한다.

기자는 진실을 말하는 거울이 되어야 한다.

기자가 정실·정파주의에 휘둘리게 되면 진실을 보지 못한다."

 

그 때는 신문사 경영이 매우 어려웠던 시절이다. 사장이 밤늦게 회사를 찾아와 편집부와 제판부 등 제작부 기자 및 직원들에게 커피와 떡을 나누어 주며 위로하던 모습, 늘 수첩을 들고 다니며 기자들의 애로사항을 직접 메모하곤 하던 모습에선 성실한 기자로 부끄럼 없이 살아온 세월이 무겁게 느껴지곤 했다. 때 묻고 빛바랜 고인의 수첩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회사를 떠나면서까지 그는 늘 들고 다니며 정리해왔던 수십 권의 취재수첩과 애지중지했던 책들을 신문사 자료실에 기증했다. 신문사에 대한 애정이 그만큼 컸던 것이다. 당시 신문사 기자들은 틈틈이 그가 남긴 취재수첩을 들춰보며 감탄사를 연발하곤 했다.              

 

고인이 남긴 책과 수첩 맨 앞장에는 느슨해진 자신을 채찍질이라도 하기 위한 것처럼 명언들이 적혀있었다. "의(義)를 옳다 하고 비(非)를 그르다 하라", "냉정한 관객이 되자", "끝없는 호기심을 가져라" 등의 문구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정실주의와 정파주의를 경계하자는 메시지가 강하다. 아마 오랜 정치부 기자와 데스크, 편집국장을 거치면서 절실히 체득한 지혜를 후배들에게 전해주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이런 고인이 남긴 명언들은 내게 기자생활을 하는 동안 늘 자기최면용으로 활용됐다. 그런데 18년여의 세월이 흐른 지금.  당신의 둘째 아들이 정실, 정파주의의 덫에 갇혀 힘들고 외로운 자신과의 투쟁을 하고 있다.

 

 

선친이 계셨더라면 아들에게 어떤 말로 위로를 했을까?

 

MBC가 신경민 앵커를 교체하기로 결정하면서 언론계와 시민사회단체에 던져주는 파문이 크다. 가뜩이나 현 정권은 미국산 쇠고기 파동 이래 MBC에 유무형의 압박을 가해왔다. 대통령의 최측근인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이 MBC 창사 기념일에 공개적인 비판 연설을 한 것을 비롯해, PD수첩에 대한 끈질긴 수사 등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다.

 

정권에 비판적인 신 앵커의 클로징 멘트(맺는 말)은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 제소되기도 했다. 이런 와중에 신 앵커의 교체는 여러 가지 의혹과 사내외 저항을 증폭시키고 있다. 그의 선친이 지금도 살아계셨더라면 어떤 위로와 용기를 심어 주었을까. 앵커이기 전에 기자였기 때문에 다시 당당한 기자가 되어 달라고 주문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그가 자라온 과정에서 느껴진다.  

 

다른 자녀들에 비해 고인의 신 앵커에 대한 애정은 각별했던 것 같다. 지난 1월 <씨네 21>과의 인터뷰(클로징멘트 30초, 혼을 담은 '독자 꼭지')에서도 읽혀진다. 기자 출신 아버지 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그는 선친의 이력을 이렇게 설명했다.

 

"둘째인 제가 태어났을 때 이미 아버지는 기자였고 제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항상 기자였습니다. 80년 즈음 <전북일보>에서 주필로 은퇴를 하고 <전북도민일보>가 창간돼 경영진으로 가셨어요."

 

언론계에 들어서게 된 이유가 평생을 언론계에 몸 바쳐 온 아버지의 영향과 무관치 않다는 점도 밝혔다.

 

"언론이 어떤 기능을 하고 어떤 메커니즘으로 돌아가는지 일찍부터 이해가 있었죠. 자연스럽게 신문사도 오가고 아버지가 만나는 정치인, 경제인, 문화인들을 볼 수 있었어요. 아버지가 저를 매우 예뻐해서 많이 데리고 다니셨거든요. 50년대 말 60년대 초 전주의 음식점 주인 중에는 70년대 서울로 와 명성을 떨친 명창과 고수들이 있어서 손님들에게 판소리나 연주를 들려주기도 했어요. 다방에 가도 월전 장우성의 그림, 소전 손재형의 글씨가 걸려 있었죠. 대학 다닐 무렵에는 인턴사원처럼 취재를 시켜 <전북일보>에 기사를 써보라고도 하셨어요. 프로레슬러 김일 선수가 전북 왔을 때 인터뷰를 했더랬죠."

 

"그나마 MBC 뉴스가 할 말을 하는 방송'이라는 인식을 갖도록 기여"

 

어려운 기자의 길을 걸어온 아버지가 같은 기자의 길을 따라 걷겠다는 아들이 있다면 말릴 법도 했겠지만, 고인은 기자의 올곧은 정신과 혼을 아들에게 어려서부터 심어주었다. 그래서 일까. 그동안 신경민 앵커는 권력을 향한 비판적인 멘트로 시청자들에게 '방송3사 중 그나마 MBC 뉴스가 할 말을 하는 방송'이라는 인식을 갖도록 기여해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민언련은 최근 MBC 신경민 앵커교체에 대한 논평에서 "신경민 앵커는 MBC뉴스, 나아가 방송3사의 뉴스들이 미처 담아내지 못하는 우리 사회 주요 의제들, 우리 모두가 성찰해 봐야 할 문제를 제시함으로써 여론의 쏠림을 막는 '균형추'와 같은 역할도 해왔다"고 평가했다.

 

그렇다. 이명박 정권의 외압으로 물러난 이동걸 금융위원장 사임 소식은 방송3사 메인뉴스 가운데 오직 신경민 앵커의 클로징 멘트에서만 보도됐다. 방송3사들이 WBC 보도에 '올인'했을 때에도 그는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야구에 열광한 사이 박연차 리스트는 신구 권력층을 맹수처럼 할퀴었고, 장자연 수사는 거북이처럼, YTN 수사는 토끼걸음으로 갔다"며 언론의 보도 행태와 그로 인한 현안의 소외를 따끔하게 지적했다.

 

기자들이 제작거부라는 마지막 수단까지 동원해 저항하고 있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명분 없는 앵커교체로 MBC는 '경쟁력'은커녕 공영방송으로서의 신뢰가 깎이게 된 때문이다. MBC 마저 권력의 눈치를 살피는 이름뿐인 공영방송으로 전락해가는 것은 아닌지 우려가 깊다.

 

정파 저널리즘 피해자는 바로 전파의 주인인 '국민'

 

언론이 정치세력 또는 정파의 정책노선과 밀접하게 공조현상을 보이는 상태를 커뮤니케이션학에서는 '정당과 매체의 병행관계(Press-Party Parallelism)'라고 부른다. 그러나 방송은 신문과 다르다. 전파의 희소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영국과 프랑스 등 선진국들에서 오랜 역사를 지닌 방송사들이 정파성을 가장 경계하는 이유 중 하나는 공정성을 해칠 수 있기 때문이다.

 

정파 저널리즘 피해자는 바로 전파의 주인인 국민이다. 진실을 추구하는 뉴스를 접할 수 없을뿐더러, 구조화된 사회갈등의 쳇바퀴를 탈출구 없이 맴돌아야 하기 때문이다. 현장에서 기사를 생산하는 기자들 또한 심각한 피해를 입기는 마찬가지다. 뉴스를 공급해 사회적 신뢰를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방송에 대한 불신을 구조적으로 심화시키고 자신들의 생명선인 사회전체의 신뢰문화도 붕괴시켜 나가기 때문이다. 

 

방송은 공익성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공정성과 중립성을 어겨서는 안 된다고 반박하는 이들도 있으나 MBC가 내부의 반발과 외부의 비판을 무릅쓰고 앵커 교체를 강행하는 이유가 정파 저널리즘으로의 회귀라는 지적은 단지 기우이길 바란다.

 

 평생 지역 언론계를 위해 봉사하며 몸바쳐온 아버지의 아들 신경민. 그는 앵커이기 전에 기자였다. 올곧은 기자로 평생을 살아왔던 선친의 뒤를 이어 이 시대의 올곧은 기자의 표상으로 꿋꿋이 남아주길 간절히 바란다.


태그:#신경민, #신현근, #MBC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정의가 패배하고, 거짓이 이겼다고 해서 정의가 불의가 되고, 거짓이 진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성의 빛과 공기가 존재하는 한.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