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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의 경제난으로 소비가 줄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이 봄, 입을 게 없다"는 딸의 하소연에 "옷장부터 정리하라"는 어머니의 잔소리가 '괜한' 소리로 들리지 않는 요즘입니다. 비단 아껴 쓰는 것에서 나아가 '다시' 쓰고, '나눠' 써도 "괜찮다"고 호소(?)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습니다. 불황이 낳은 또 다른 삶의 모습입니다. 그 곁을 따라가 봤습니다. [편집자말]
"남들 눈에는 보잘 것 없는 일로 보일지 몰라도 우린 정말 뿌듯하요. 썩지 않은 것들을 수거해서 오염을 막고, 환경도 깨끗하게 보존하고. 또 로프(Rope·굵은 밧줄)로 만들어서 팔아 일한 보람도 얻고…. 이만큼 좋은 일이 어디 있겄소?"

전라남도 여수에 사는 이형주(66)씨. 수질보호환경운동회 여수지회장을 맡고 있는 그는 회원들과 함께 폐플래카드로 양식장에서 쓰는 로프를 만들고 있다. 지난 2003년 소모임으로 싹튼 수질보호환경운동회는 지금 100여 명의 회원을 두고 있는 생활환경운동단체.

폐 플래카드를 가공해 만든 천로프. 지름 2.5㎝, 둘레 6㎝ 안팎으로 굵다.
 폐 플래카드를 가공해 만든 천로프. 지름 2.5㎝, 둘레 6㎝ 안팎으로 굵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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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산직 공무원, 기업체 근무 등 환경과 관련 없는 이력을 지닌 그가 폐플래카드에 관심을 가진 건 지난 2007년. 지인을 만나러 여수쓰레기매립장에 갔다가 크레인에 걸려 나풀거리던 폐플래카드 무더기를 발견하면서부터다.

그대로 매립할 경우 땅 속에서 수십 년 동안 썩지 않아 환경오염을 일으킬 것이고, 소각하더라도 공해와 자원낭비 등 새로운 환경문제가 발생할 것이 뻔했다. 때마침 2003년 일본에 갔을 때 우연히 봤던 폐플래카드 재활용 공장이 떠올랐다. 당시 일본에선 다 쓴 플래카드를 모아 로프로 만들어 재활용하고 있었다.

"그래 이 거야" 다 쓴 플래카드, 로프로

이형주 수질보호환경운동회 여수지회장과 회원들은 폐 플래카드를 모아 양식장에서 쓰는 천로프(굵은 밧줄)로 만들고 있다. 사진은 로프로 만들기 위해 폐 플래카드를 폭 7∼8㎝로 자르고 있는 모습이다.
 이형주 수질보호환경운동회 여수지회장과 회원들은 폐 플래카드를 모아 양식장에서 쓰는 천로프(굵은 밧줄)로 만들고 있다. 사진은 로프로 만들기 위해 폐 플래카드를 폭 7∼8㎝로 자르고 있는 모습이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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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는 그날부터 다 쓴 플래카드의 재활용이 시급하다고 생각하고 회원들을 만나 설명했다. 처음에 뜬금없는 얘기라며 귀를 기울이지 않던 회원들도 집요한 그의 설명과 설득에 동의했다.

내친 김에 이씨는 회원들로부터 특별회비를 모아 폐플래카드로 로프를 만드는 중고 기계까지 사왔다. 그리고 관계기관을 찾아가 사정을 설명하고 폐플래카드를 모아줄 것을 요청했다. 플래카드를 재활용하기 위해선 천만 남겨놓고 노끈과 철사, 나무막대 등을 분리하는 게 필수다.

그리 어렵지 않은 문제라 생각했지만 관련부서에선 난색을 표시했다. 다 쓴 플래카드를 거둬들이고 따로 분리하려면 번거로운 건 차치하고라도 그에 따른 인건비가 많이 들어간다는 게 주된 이유였다. 환경오염을 막고 자원을 재활용한다는 명분은 그 다음 문제였다.

"비싼 기계를 들여놓고도 1년 동안 놀릴 수밖에 없었어요. 그렇다고 해서 그냥 물러설 수도 없었죠. 집요할 정도로 설득했습니다."

구입 1년 만에 기계를 돌리다

천로프는 연필 두께로 한 번 꼰 로프를 원하는 굵기에 맞춰 한 번 더 꼬아주면 완성된다. 사진은 1차 과정에서 가늘게 만들어진 로프를 더 굵게 하는 과정이다.
 천로프는 연필 두께로 한 번 꼰 로프를 원하는 굵기에 맞춰 한 번 더 꼬아주면 완성된다. 사진은 1차 과정에서 가늘게 만들어진 로프를 더 굵게 하는 과정이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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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 플래카드를 천로프로 만드는 과정은 새끼줄을 꼬는 과정과 비슷하다. 일정한 폭으로 자른 폐 플래카드를 7가닥씩 기계에 넣어 새끼 꼬듯이 꼰다.
 폐 플래카드를 천로프로 만드는 과정은 새끼줄을 꼬는 과정과 비슷하다. 일정한 폭으로 자른 폐 플래카드를 7가닥씩 기계에 넣어 새끼 꼬듯이 꼰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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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호응을 해준 곳은 그가 사는 여수시였다. 공식 게시대를 통해 내걸린 플래카드는 옥외광고물협회에서, 불법 광고물은 시청에서 공공근로자를 투입해 따로따로 모아 주었다. 자칫 녹이 슬 뻔했던 기계를 지난 1월부터 돌릴 수 있게 된 것이다.

폐플래카드 수거차량이 분주하게 움직이면서 이 기계도 부지런히 돌았다. 수거차량을 운행하고 기계를 돌리는 회원들의 손놀림도 바빠졌다. 재료만 계속 공급된다면 일년 내내 쉬지 않고 돌려야 할 판이다.

폐플래카드가 로프로 변신하는 과정은 의외로 간단하다. 노끈과 철사 등을 분리해낸 천을 수십 장씩 모아 폭 7∼8㎝로 자르고, 짚으로 새끼를 꼬듯이 7가닥을 따로 또 같이 기계에 넣어 꼬면 된다.

이렇게 1차 연필 두께로 꼰 로프를 3갈래씩 넣어 한 번 더 꼬아주면 지름 2.5㎝, 둘레 6㎝ 안팎의 굵은 로프가 완성된다. 그냥 버려지면 쓰레기가 되고 환경오염을 일으키는 골칫덩어리가 될 폐플래카드가 자원으로 재탄생하는 순간이다.

양식어민들 환영, 가격도 나일론에 비해 저렴

최종 완성된 천로프. 여러 가지 색깔의 플래카드가 한꺼번에 들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최종 완성된 천로프. 여러 가지 색깔의 플래카드가 한꺼번에 들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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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밧줄은 200m씩 한 묶음이 되어 출하된다. 1일 생산량은 18묶음 정도. 이 밧줄은 우렁쉥이(멍게), 가리비, 홍합 등의 수하식 양식장으로 나가 수정란 부착용 및 성장 지주대로 쓰인다. 나일론으로 만든 로프는 미끄러워 부착이 어려운 데 반해 폐플래카드를 이용한 천로프는 부착력이 좋아 양식어민들로부터 환영을 받고 있다. 가격도 나일론으로 만든 것보다 더 싸다.

"지금은 여수에서 나오는 전량, 순천에서 나온 것 일부를 저희가 처리하고 있을 뿐입니다. 다른 지자체에서도 폐플래카드 분리수거에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플래카드에서 노끈과 철사 같은 것을 분리해서 좋게 접어놓는다면 저희가 어디든지 달려가 가져오겠습니다."

이씨는 사명감을 갖고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폐플래카드 재활용시설을 권역별로 하나씩 만들어도 좋겠다고 했다. 환경보호와 일자리 창출, 도시미관 조성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사업성만 따지고 달려들어선 '큰 재미'를 볼 수 없다는 말도 덧붙였다.

지원금 한 푼 없이 환경을 살리는 이들

폐 플래카드(오른쪽)가 천로프(왼쪽)로 만들어졌다. 폐 플래카드는 가공되기 전 한낱 쓰레기에 불과했으나 천로프로 가공된 이후엔 자원으로 변신했다.
 폐 플래카드(오른쪽)가 천로프(왼쪽)로 만들어졌다. 폐 플래카드는 가공되기 전 한낱 쓰레기에 불과했으나 천로프로 가공된 이후엔 자원으로 변신했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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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와 수질보호환경운동회 회원들의 생활 속 환경운동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시민들을 대상으로 폐형광등 분리배출을 생활화해 줄 것을 적극 알리고 이것을 수거해 얻은 수익금으로 불우이웃을 돌보고 있다. 다 쓴 플라스틱 수거, 바다환경 정화활동 참여도 빼놓을 수 없다.

행정기관의 보조금에 기대 그만큼의 활동만 하는 단체가 많은 요즘, 지원금 한 푼 받지 않고 일상에서 나오는 쓰레기를 재활용해서 자원으로 만들고 있는 수질보호환경운동회 회원들의 활동이 더 소중하게 다가선다.

이들의 땀방울 덕분에 좀더 나은 환경을 영위하고 있는 우리는 이들이 자긍심을 갖고 앞으로도 열심히 활동할 수 있도록 관심과 격려를 해줘야겠다. 이는 그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다.


태그:#폐 플래카드, #천로프, #이형주, #수질보호환경운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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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찰이 일상이고, 일상이 해찰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전남도청에서 홍보 업무를 맡고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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