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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거울, 타인의 거울

이정주
▲ 홍등 이정주
ⓒ 황금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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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삶의 거울이다. 거울 속의 삶을 들여다보면, 이 삶은 내 삶이기도 하지만, 내 삶이 아니기도 하다. 불교의 연기설를 빌리면, 우리의 삶은 돌고 돈다. 너의 삶이 나의 삶이 되고, 내 삶은 너의 삶이 된다. 이처럼 이정주 시인의 시를 읽으면, 화자의 매혹적인 목소리에 의해, 내 삶은 훌렁 벗겨지고, 타인이 되는 착각에 빠진다. 시의 블랙혹처럼 이 시인의 시는 읽고 감상하는 독자의 느낌에 따라서 다양한 해석이 내려지는 시다. 그래서 모던하다고 말하는지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정주 시인의 시 속에는 핵처럼 슬픈 이 시대의 초상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는 것이다.

이삿짐을 싣고 트럭이 지나간다. 점 보는 집이 지나간다. 얼굴 찢긴 후보들이 지나간다. 허벅지를 드러내고 화투치는 여자들이 지나간다. 붉은 등 아래 담배를 물고 서 있는 여자도 지나간다. 붉은 등이 그립던 날들과 엥겔스가 옳다고 생각한 날들이 지나간다. 보리밥집과 나무문 만드는 집이 지나간다. 이윽고, 지나간 것들이 다시 돌아온다. 나무문 만드는 집 나무문이 닫힌다. 보리밥은 식어 있다. 길가에 나와 있던 여자가 없어졌다. 붉은 얼굴의 여자들을 누이라고 생각하던 날들이 돌아온다. 외등이 꺼지고 점포 안이 붉다. 술상을 보는 여자들 뒤로 숨는 엥겔스가 보인다. 나는 빈자리에 차를 집어 넣는다. 붉은 얼굴로 졸고 있는 푸줏간 여자가 보인다.
<홍등> 전문 인용

'바슐라르'에 의하면, 예술적 상상력은 두개의 서로 다른 축 위에서 전개된다고 한다. 그 하나는 새로움 앞에서 비약을 찾는, 예기하지 않은 사건을 즐기는 것이고, 또 하나는 존재의 근원에 파고 들어가 원초적인 것과 영원한 것을 동시에 존재 속에서 찾아내려고 하는 것. 그렇다면 시는 시적 창조력을 발휘해서 존재의 근원으로 들어가는 정신의 시추 작업이라고 표현해야 하지 않을까.

시인 이정주의 시인의 시를 이야기하기 전에 '모더니즘 시(이미지즘과 주지주의,초현실주의 등)란 어떤 시인가 하는 정의를 짚고 넘어가는 것이 옳을 듯 하다. 이는 이정주 시인의 시를 모더니즘시라고 얘기하는 문학평론가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를 읽고 즐기는 일반독자에게 시를 이런 식으로 분류하는 것은 사실 시를 감상하는 데 방해 거리가 될 뿐이다. 그것은 클래식 음악 감상처럼 현대시를 감상하는 방법은 어떤 이론으로 해석하는 것보다는, 마음으로 느끼는 감상 방법이 가장 중요하다. 시는 마음의 산물. 시인의 정신의 심상을 언어로 표현한 세계이니 말이다.

시의 나무, 그 상상의 나이테 속으로

이정주 시인의 시는 이래도 저래도 모던하다. 기성시인과 아마추어 시인이나 독자들이 다 진부하지 않다고 인정케 하는, 시보다 앞서가는 모던 시… 기성시인은 시가 너무 모던해서 새삼, 이런 모던한 시인이 한국시단에 있었나 ? 되묻게 하고, 시인들 간에도 항상 신인의 이름 같은 이정주 시인의 시에 신선한 충격을 받게 한다. 아마추어 시인이나 순수 독자에게는, 시란게 참 이렇게도 형상화 될 수 있구나 하고, 시인의 마술 같은 시어에 이끌려 자신도 모르게 상상력이 증폭되어서, 독자 자신도 모르게 여러각도로 시인의 시를 다양하게 해석케 하는 텍스트가 풍부한 시라고 할 수 있겠다.

누가 문을 두드린다. 한참 두드리다가 이번에는 문을 흔든다. 집이 온통 흔들거린다. 뒷집의 개가 짖는다. 아무도 안 계세요 ? 남자가 목소리를 높여 부른다. 나는 물속을 들여다 보고 있다. 물 속에는 아직 그 사람의 모습이 드러나지 않는다. 남자는 다시 문을 흔든다. 뒷집의 개가 짖는다. 물이 흔들린다. 물 속에 그의 얼굴이 나타난다. 눈이 지워지게 웃고 있는 그의 이발이 선명하다. 그의 얼굴이 든 종이를 물에서 끄집어 내어 헹군다. 문을 흔들던 남자는 돌아갔나 보다. 그의 얼굴을 정착액에 집어 넣고 실내등을 컨다./ 문을 열어보니 문틈에 끼어 있던 종이 한장이 바닥에 떨어진다. 종이 위에도 그의 얼굴이 웃고 있다.
<얼굴 1> 전문 인용

상(相)은 상(相)이 아니듯... 시가 아닌 곳에 시가 된다 ?

이정주 시인의 <얼굴>은, 가만히 소리 내어 몇번 읽어보면 세개의 축으로 이루어진다. 현실 속에서 문을 열나게 두드리는 남자와 현실 밖에서 탕탕 문을 두드리는 파문에 의해 물에 나타난, 또 다른 상(相)이다. <얼굴> 속의 얼굴은 소리에 의해 형상화 된 꿈 속의 꿈(미래, 과거, 현재의 혼합) 같은 존재의 얼굴… 꿈 속의 꿈 같은 '얼굴'속에는, 과거 현재 미래가 융화된 <얼굴> 속에 화자의 얼굴이 내재한다. 물 속에서 꺼내져서 현상되는 상(相( 남자))과 문틈에 끼어 있던 종이 속의 상(相)은, 동일한 시간의 얼굴이며, 현실 속에 내재 된 과거, 미래의 얼굴로 읽을 수 있겠다.

이 지구상의 숱한 물방울처럼 떠오르다 사라지는 상(相)처럼…우리가 생각하는 상(相)은 이미 상(相)이 아니다는 금강경의 경구처럼… 이정주 시인의 시를 읽으면, 전통시와 다르고, 생활시와는 또 다르다. 시를 읽는 독자의 상상력으로 감상세계가 새롭게 창출된다. 그렇다. 이정주 시인의 시는 결코 친절하지 않다. 친절하지 않아서 독자에게 그만큼 자유롭게 감상할 수 있는 침묵의 통로를 열고 있다.

홍등
▲ 이정주 홍등
ⓒ 황금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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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으로의 문(門)

현대시는 정말 다양한 삶만큼 다채로운 시가 생산되고 있다. 지구상에 똑 같은 시가 단 한편도 없는 것처럼 현대시는 인간의 마음과 사회의 다양한 현상처럼 형상화된 시의 종류가 시인의 숫자만큼 다양한 것이다. 해서 이정주 시인을 모더니즘시인이라고 분류하는 것은 시를 이야기 하는 문학평론가의 편의일 뿐이 아닐까 싶은 것이다. 이정주 시인은 이정주 시인만의 독특한 개성적인 시법을 가진, 지구상의 유일한 시인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홍등>이 네번째의 시집 발간이 되는 이정주 시인은 1953년 경남 김해 한림에서 태어나 부산대학교 약대 약학과를 졸업, 1982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다. 그는 <외국문학> 편집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장석남 시인은 그의 시를 이렇게 얘기하고 있다.

이정주의 시는 일종의 마술이다. 그의 언어는 그림자와 꼬리가 긴 편인데 그 끝에 불빛과 방울이 명징하게 달려 있음을 뒤늦게 알아차리고는 놀라게 된다. 마치 달리의 그림처럼 늘어진 시간 속에 새롭게 씻긴 공간이 나타난다. 가령 "이삿짐을 싣고 트럭이 지나간다. 점보는 집이 지나간다. 얼굴 찢긴 후보들이 지나간다 …이윽고, 지나간 것들이 다시 돌아온다 …붉은 여자들이 누이라고 생각하던 날들이 돌아온다 …술상을 보는 여자들 뒤로 숨는 엥겔스가 보인다 …졸고 있는 푸줏간 여자가 보인다"<홍등>에 나타나는 시간의 훰과 회전 속에 새로 드러난 공간은 일상의 탈을 벗고 정신의 잠옷을 드러낸다. 그의 시가 단순히 유희적 마술이 아닌 현실의 못 끝을 숨긴 마술이라는 점은 긴 여운을 남긴다. 아름답고 서늘한 경지이다. 그의 시를 읽는 눈의 부족이 아쉽기만 하고 그의 모더니즘을 읽을 수 없는 수많은 모더니즘들이 슬프기만 하다.

홍등가를 어슬렁 거리다
▲ 정신의 잠옷을 빌려 입고 홍등가를 어슬렁 거리다
ⓒ 송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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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올라와서 몇년, 낭인처럼 살다가 겨우 방 하나 얻어 자리 잡은 곳이 금호동이었다.(중략)작은 시장으로 가는 갈래길에는 포장마차가 보였고 어디선가 생선 비린내가 나는 듯 했다. 큰 길을 따라 조금 더 걸어가면 붉은 등을 컨 집들이 몇 채 보였다. 그 시간까지 손님을 받지 못한 집 앞에는 허벅지가 많이 보이는 옷을 입은 아가씨들이 나와서 서 있었다. 나는 아가씨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발 아래를 쳐다보며 빨리 걸었다. 아가씨들은 그런 나를 놓치지 않고 소리 질렀다. "안경 오빠 ! 어디가는 거야?" "오빠 어디 아퍼 ?"(중략)나는 아무런 표정 없이 그들 곁을 지나갔다. 그러고는 가파른 골목길 꺾어들어 내 월세방으로 들어갔다.(중략)나는 잠시 서 있다가 천천히 걸었다. 붉은 등을 단 집들이 끝나고 두어 집 건너 다시 붉은 등이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홍등가의 붉은 등이 아니었고 정육점의 붉은 등이었다. 주인 아주머니는 팔짱을 낀 채 의자에 앉아 졸고 있었다. "모두 다 고기 파는 집이네" 나는 중얼 거리며 골목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시작노트' 중

그의 시는 기묘한 침묵감을 불러 일으킨다. 베케트의 경우처럼, 그의 말의 배후에는 공허한 침묵으로의 문이 열려 있다. 원래 침묵과 수다는 문학에 있어 그리 먼 거리에 있는 것은 아니다. 말하려는 강박감은 침묵하려는 강박감과 마찬가지로 말할만한 가치가 있는, 그리고 진실할 수 있는 어떤 의미가 없을 때에는 언어의 취약성을 나타내주는 징후가 되며, 이 경우 침묵과 수다는 동일한 결과를 가져온다. 이정주의 수다스러움은 중얼거림, 더듬거리기와 함께 침묵을 강조하는 형식이 된다. -<밤을 위한 시론> 중 '정영태'

막장 한 가운데서 우는 시인

시인의 고백처럼 이 세상은 거대한 정육점인지 모른다. 밤이면 아름다운 홍등이 내 걸리는 아름답고 슬픈 정육점 앞을 매일 밤 시인은 묵묵히 지나서 집으로 돌아간다. 돌아가면서 내 누이인 그녀 생각에 가슴을 뜯는다. 겉으로는 아무 표정없이 지나가지만, 안으로 시인은 울고 있다. 아무 생각없이 사는 듯 하지만 이 시대의 막장, 한 복판에서 시인은 모두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지나간다.

우리의 삶은 그 누구도 위로할 수 없고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 그러나 시인이란 몫은 잠시 자신의 삶의 몫을 내려놓고, 타인의 정신의 옷을 빌려입고 고통하는 자… 이정주 시인의 시편들은 그러나 우리의 시대의 고통에 대해 엄살 피우지 않는다. 시대의 아픔을 아름답게 승화하기 위해, 입술을 앙다문 삶의 고통이 편편이 묻어 있다.

<홍등> 속에는 여느 시집과 달리 평문을 대신, '시인의 꿈과 길' 그리고 시작노트와 시인의 연보가 꼼꼼하게 적혀 있다. 그래서 더욱 독자에게 모던한 그의 시를 이해하는 폭과 재미를 더해주고 있다. 그렇다. 시는 한 시인의 삶의 거울이다. 그 거울 속에 흔들리는 여러개의 파문은 시인이 만든 것이면서도, 우리 모두가  만든 세상의 아픈 파문이기도 하다. 이정주 시인은 현재 시업 외 인천의 한 약국에서 약사로 일하고 있다.

돌다리 건너다가 돌다리 위에 쭈그려 앉아 돌다리 두드리며 보았네. 돌 속에 말 한 마리가 있었네. 태고부터 거기 서 있었던 듯 했네. 돌들은 서로 어깨 기대어 다리를 만들었고 다리 아래로 손을 흔들며 이야기들은 떠나가고 있었네. 말은 떠나지 않고 서 있었네. 나도 떠날 수 없었네. 붉은 채찍 소리 들렸네. 말은 고개를 한번 들었다가 놓았네. 돌 속에 길이 열렸네. 말이 그 길로 걸어가기 시작하고 사람들이 돌을 지고 말을 따라가는 것이 보였네. 나도 따라 가고 싶었네. 그러나 움직일 수 없었네. 어둠 속에 돌다리를 놓아주며 사람들은 말을 따라갔네. 사람들이 멀어졌네. 나는 돌속에 갇혔네. 말이 보이지 않았네. <돌속의 말> 전문인용-'이정주'


홍등

이정주 지음, 황금알(2009)


태그:#홍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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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곧 인간이다고 한다. 지식은 곧 마음이라고 한다. 인간의 모두는 이러한 마음에 따라 그 지성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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