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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 쑥쑥 자랄 때

무엇하고 있었느냐고 묻지 마라

 

벙어리 삼 년

귀머거리 삼 년

고달픈 세상살이가 어디 시집살이 뿐이랴

 

마디마디 응어리 진 세월을

온 몸으로 받아 안아

비록 자라지 못한 작은 몸이지만

하늘을 떠받치고 꿋꿋이 서있다.

 

수많은 사연들

백년을 말해도 못다 할

그 많은 언어들

삼복의 뙤약볕도

엄동설한의 모진 추위도

작은 가슴속에 모두 묻었다

 

내가 피우는 꽃

내가 맺는 열매

다른 것들과 비교하지 마라

한 송이 한 송이 한 알 한 알

저 태양의 뜨거움 모두 품었다.

 

내려다보지 마라

우주를 향해 굳게 버티고 선 작은 거인

응축된 힘은 사지(四肢)에 뻗치고

소리 없는 함성 잔잔한 눈빛으로

세상을 향해 이글이글 끓어오르다

가지 끝에 이는 태풍을 보라.

온 몸으로 토해내는 열정을 보라.

 

-이승철의 시, 분재(盆栽) 모두

 

시작노트: 작지만 결코 작은 나무들이 아니었다. 용트림하는 근육질, 흰 구름 두둥실 떠있는 파아란 하늘을 당당하게 떠받치고 서있는 나무들의 수령은 적은 것이 50~60년, 많은 것은 900여 년이 넘는 것도 있었다. 저렇게 키가 작고 몸집이 작은 나무에 그 많은 세월이 응축되어 있다니, 놀라운 모습이었다.

 

"이 분재들 나이를 보니 우리네 할아버지 할머니들이네, 호호호."

"그냥 할머니 할아버지가 아니라, 고조할머니 고조할아버지보다도 더 윗대가 되겠는데요."

 

일행들은 작고 예쁜 분재들이라 참 귀엽고 멋진 나무라고 하다가 팻말에 붙어 있는 수령을 읽어보고 놀라워한다. 200년 이상이면 적어도 우리네 인간사로 치면 6대를 훨씬 뛰어넘는 세월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그루의 주목 분재는 수령이 무려 950년이었다. 950년 수령의 이 주목 옆에는 '죽어서 천년, 살아서 천년"을 산다는 천연기념물 주목, 땅에 뿌리를 박고 5백년, 그리고 하늘을 떠받치고 한 오백년, 긴 세월의 사연과 흔적을 그대로 지닌 채 사람의 범접을 용납하지 않는 경계와 심오한 위상을 드러내고 있는 주목이다.

 

주목의 미학적 관점에서는 좌, 우 원 줄기의 물관과 사리의 경계가 뚜렷하여 대비를 통한 나무의 생동감과 고태미의 극명함이 잘 드러나고 있고, 수관에서 지상으로 굽이쳐 흘러내린 가지에서 변화를 통한 율동감이 충만하여 마치 부부애를 느끼게 하는, 세계 최대, 최고의 명목이다, 라고 적혀 있었다.

 

2박3일 제주도 여행 중에 들른 제주시 구좌읍에 있는 아트랜드 분재공원은 분수 호수를 중심으로 주변의 나지막한 언덕 위에 수많은 명품 분재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분재들은 소나무, 소사나무, 단풍나무, 주목, 모과나무, 향나무, 곰솔나무, 섬잣나무 등 종류도 다양하고 모양이나 크기도 다양했지만 하나 같이 아름답고 멋진 모습이었다.

 

작은 키와 몸집에 기나긴 세월을 응축하느라 옹골차게 다부진 몸매가 마침 맑은 날씨의 하늘 구름과 어우러져 더욱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950년의 세월이면 고려시절부터 조선시대를 거쳐 근 현대사를 관통한 세월이다. 역사의 기나긴 질곡을 말없이 지켜본 분재 고목들을 바라보며 자연에 대한 경외감이 소록소록 깨어나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유포터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시가 있는 풍경, #분재, #이승철, #응축된 세월, #작은 거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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