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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천고제를 알리는 나팔을 불었습니다.
 천고제를 알리는 나팔을 불었습니다.
ⓒ 임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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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가 수행자인 산승이 신부를 향해 '형'하고 부르고, 신부와 스님 그리고 이들을 신장처럼 외호하고 있는 참가자들을 향해 목사가 넙죽 절을 올립니다. 종교적 편향과 신분 차별이 사회적 문제로까지 대두되고 있는 바깥세상과는 아주 동떨어진 아름다움이 예서 저서 펼쳐집니다.

지난 28일, 봄꽃 피어나고 풍경소리 뎅그렁거리는 계룡산산하 신원사 중악단 앞마당에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가부좌를 틀고 참선 중이던 선승일지라도 천근처럼 다가오는 졸음을 어쩌지 못해 깜빡깜빡 졸 것만큼이나 조용하고 한적한 신원사로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얘기야'하고 불러야 할 만큼 앳돼 뵈는 어린이부터 지팡이에 몸을 의지해야 할 만큼 노구인 어르신, 혈기 왕성한 청장년의 남자들은 물론 집안에서 곱게 살림이나 하며 알뜰하게 세월을 보냈을 것 같은 누이 같고 어머니 같은 여자들도 수두룩하니 남녀노소가 구색을 맞추기라도 한 듯 골고루 입니다. 

▲ 길을 찾아 떠나는 사람들 세 분 성직자와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배밀이 같은 오체투지로 사람의 길, 생명의 길, 평화의 길을 찾아 나서기 위해 계룡산 신원사 중악단 앞에 모였습니다.
ⓒ 임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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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원사의 풍경은 정말 한적하고 평화롭습니다. 만개한 매화는 봄바람에 장단 맞춰 몸을 흔들고,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은 서툰 솜씨로 화전놀이라도 하는 듯 뎅그렁거립니다. 아름드리 고목이 되어버린 벚나무에는 얼마가지 않아 터져 나올 꽃망울이 올망졸망 움터있고, 죽은 듯이 엎드려있던 땅에도 온갖 잡풀과 여린 꽃들이 자글자글 돋아있습니다.

스님이 신부님을 '형'이라고 부르는 평온한 분위기

사람들이 준비를 합니다. 사람의 길, 생명의 길, 평화의 길을 찾아가기 위해 오체투지에 나서는 사람들이 열어 갈 출발행사를 준비합니다. 폭신폭신 한 양탄자가 깔리는 안락한 길이 아니라, 사지는 물론 오장육부까지 아플 만큼 고행의 길이 될 오체투지의 길을 닦아갈 출발점을 준비합니다.   

봄꽃은 산사에도 피었습니다.
 봄꽃은 산사에도 피었습니다.
ⓒ 임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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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막할 만큼 조용했던 산사에 앰프 소리가 울립니다. 출정가가 될 수도 있는 비나리를 리허설하고 계룡산 자락을 울리게 될 합창을 연습하는 소리가 듬성듬성 들려옵니다. 

모여든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산천을 울리는 앰프 소리가 윙윙거려도 중악단 앞마당의 일부라고 해도 될 만큼 이웃한 밭에서는 농부 한 명이 괭이로 고랑을 만들고 씨앗을 넣습니다. 머리가 희끗희끗해 늙수그레해 보이는 농부는 주변의 상황에 개의치 않겠다는 듯 묵묵한 표정으로 일 년 동안 키워나갈 희망을 씨앗으로 뿌려줍니다. 

행사가 시작될 시간이 다가오니 인적 성글었던 앞마당으로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먼저 와 해바라기를 하듯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있던 수경 스님이 문규현 신부님께서 다가오자 '형! 이리 와 봐요'하고 부릅니다.

늙수레한 농부는 땅을 일구고 씨앗을 뿌리는 것으로 희망을 심고 있었습니다.
 늙수레한 농부는 땅을 일구고 씨앗을 뿌리는 것으로 희망을 심고 있었습니다.
ⓒ 임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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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만금 살리기 삼보일배 때부터 고행의 길을 동고동락한 두 분 성직자의 인간적 친분에서 비롯된 호칭일수도 있지만 예경의 대상을 달리하는 스님이 신부님을 아무런 스스럼없이 '형'하고 호칭하는 모습과 소리는 저절로 마음을 평온하게 하는 커다란 성직자의 모습이며 천상의 소리였습니다.

계룡산 산하에 울려 퍼진 출정가 같은 비나리

행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북소리 끝에 이어지는 천개(天開) 선언으로 천고제가 시작됩니다. 사람, 생명, 평화를 상징하는 세 개의 솟대가 등장하고 온갖 부정을 씻어 낼 정화의식이 이어집니다. 천고제를 선언하면서 시작 된 비나리에 마음이 울컥거립니다. 절규에 가까운 리듬에 마음이 움찔거리고, 한탄을 능가하는 노랫말에 가슴이 쿵쾅거립니다.

노랫말에는 민중의 애환이 담겨있었고, 감정을 넘나드는 리듬에는 분노하는 민심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애달픈 애환과 분노하는 민심만 담겨진 게 아니라 함께 딛고 넘어야 할 질곡의 희망도 담겼습니다. 훠이훠이 춤추는 무희의 손짓발짓은 차라리 서러움입니다. 통곡 같고 푸념 같은 비나리, 출정가 같고 선언문 같은 비나리에 이어 천고제를 올립니다.

사람, 생명, 평화를 상징하는 세 개의 솟대가 올랐습니다.
 사람, 생명, 평화를 상징하는 세 개의 솟대가 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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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분 성직자가 나란히 앉았습니다. 세분 모두의 머리가 짧거나 삭발했고 피부조차 구릿빛을 넘어 거무튀튀하기까지 하니 언뜻 보면 세분 모두가 출가수행자인 스님이거나 형제처럼 보입니다.

향을 사라 하늘을 모시고, 차를 드려 땅을 모십니다. 이렇게 모신 천지신께 삼배를 올린 순례단원들이 불자들과 성당신도들로 혼합 구성된 합창단의 합창을 바탕으로 중악단을 나와 사람들과 융합합니다.  

상견례를 합니다. 세분 성직자는 마당에 앉아있는 참석자들을 향해 삼배를 올리고,  마당에 가득한 사람들은 세분 성직자들을 향해 지극한 삼배를 올립니다. 세분 성직자와 마당에 있던 참석자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삼배를 올렸지만 이들이 올린 삼배는 서로에게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길, 생명의 길, 평화의 길을 찾으려는 희망의 부싯돌이며 출발의 디딤돌 같은 삼배입니다.

세상의 모든 부정한 것을 씻어냅니다.
 세상의 모든 부정한 것을 씻어냅니다.
ⓒ 임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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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천문을 낭독하고, 낭독한 고천문을 불사르는 분축에 이어 덕숭총림 방장으로 추대 된 설정스님의 법문과 신경림 시인의 시 낭송이 이어집니다. 시 낭송에 이어 기도를 하러 나온 이현주 목사님은 세분 성직자와 세분 성직자를 외호(外護)하듯 빙 둘러 앉아 있는 수많은 사람들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가더니 넙죽 큰절을 올립니다. 

목사님이 스님과 신부님 그리고 참석자들에게 큰절 올리는 큰사랑 보여

큰절입니다. 종파를 뛰어넘고, 편협한 종교관을 산산히 부셔버림에서 나올 수 있는 커다란 사랑과 깨우침으로 숭고한 뜻을 가진 사람들에게 올리는 거룩한 큰절입니다. 응어리처럼 가슴 한 구석을 답답하게 하였던 이종교간의 이질감이 봄눈 녹듯이 녹아내리는 아름다운 광경입니다.

종교가 인간 위라고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종교를 능가하는 인간 본연의 사랑과 위대함, 포용력과 도리가 우선임을 볼 수 있었습니다. 순례단 일정이 소개되고, 모셨던 천지신을 배웅하는 사신 삼배를 올리는 것으로 행사의 일단이 갈무리됩니다. 

오체투지를 시작하려는 성직자들과 참가자들이 서로에게 삼배를 올립니다.
 오체투지를 시작하려는 성직자들과 참가자들이 서로에게 삼배를 올립니다.
ⓒ 임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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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납니다. 이미 54일이나 사람의 길, 생명의 길, 평화의 길을 찾기 위해 지라산에서부터 이곳 계룡산 신원사까지 배밀이를 하듯 오체투지로 걸어온 사람들이 다시금 걷기 위해 55일째의 걸음을 오체투지로 시작합니다. 느릿느릿한 걸음, 타박타박한 발걸음도 아닌 배밀이 같은 오체투지로 75일간이나 계속 될 순례일정을 시작합니다.

세 걸음 걷고 온 몸이 땅에 닫도록 납작 엎드려야 올릴 수 있는 큰절 한 번을 올리는 오체투지의 행보는 흙길 이거나 돌길이거나, 시멘트 길이거나 아스팔트길이거나, 농촌이거나 도심지거나를 가리지 않고 75일간 이어질 것입니다.

사람의 길, 생명의 길, 평화의 길을 다져가는 초석 되고, 등불이 될 오체투지

가풀막진 비탈길에 엎드린 순례자들의 모습은 미끄러지지가 않을까 가 걱정되지만 서러울 만큼 위대합니다. 울퉁불퉁한 돌길에 엎드린 순례자들의 모습은 많이 불편해 보이지만 황홀한 만큼 거룩합니다. 짓밟히고 뭉그러져도 새봄만 되면 새싹으로 돋아나는 무수한 새싹들의 위대함처럼 뒤뚱거리고 절뚝거리는 발걸음으로 한걸음 한걸음을 내디디며 나갑니다.   

배밀이 같은 오체투지가 시작되었습니다.
 배밀이 같은 오체투지가 시작되었습니다.
ⓒ 임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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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뜻이 너무 커 누구를 위한 삼보이고, 무엇을 위한 오체투지인지를 단정할 수는 없지만 고행의 길을 기꺼운 마음으로 출발하고 있는 한 사람 한사람의 뒤태는 말로만 전해 듣던 방광처럼 눈부시도록 찬란하고 오묘하리 만큼 밝았습니다.

오체투지에 나선 사람들의 뒷모습에 비나리에서 들렀던 노랫말과 리듬이 덧그림처럼 더해집니다. 세 걸음 걷고 한 번 오체투지를 올리는 순례단의 일정을 상상해 보고 있노라니 가슴을 짓누르는 시련이 아픔으로 다가옵니다. 

사람들이 떠난 신원사에는 다시금 고요함이 찾아들었지만 순례자들이 모롱이 길을 돌아갈 때쯤엔 고요함을 깨는 목탁소리가 이어졌습니다. 스님들이 염불을 하며 치는 목탁소리가 아니라 고목나무 꼭대기에서 딱따구리가 통나무를 쪼아대는 장엄한 자연의 목탁소리입니다. 미물인 딱따구리조차도 길 찾아 떠나는 순례자들을 위해 장엄한 기도를 하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쉬지 않고 통나무 목탁을 울려댑니다.

가시밭길보다 험하고, 몸부림보다 더 처절한 오체투지로 사람의 길, 생명의 길, 평화의 길을 찾아 나섰습니다.
 가시밭길보다 험하고, 몸부림보다 더 처절한 오체투지로 사람의 길, 생명의 길, 평화의 길을 찾아 나섰습니다.
ⓒ 임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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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탁소리에 실린 딱따구리의 마음 역시 사람의 길, 생명의 길, 평화의 길을 찾아나서는 순례자들의 마음입니다. 

가시밭길보다 험하고 몸부림보다 더 처절 할 수도 있는 사람의 길, 생명의 길, 평화의 길을 찾아 나서며 디딤돌이라도 놓듯 여정의 길에 한 땀 한 땀의 오체투지를 뿌려놓을 순례단의 실천하는 숭고함에 예경의 삼배를 올립니다.

님들이 흘린 그 고통과 시련이 사람들이 잃어버린 사람의 길, 생명의 길, 평화의 길을 다져가는 초석이 되고, 길을 열어가는 등불이 될 것임을 확신하기에 감동에 울먹거리는 마음으로 다시 한 번 합장 삼배를 올립니다.

덧붙이는 글 | 행사당일 상근기자가 두 명이나 현장에 나와 취해하는 것을 보았기에 아주 느긋한 마음으로 여담이라도 나누듯 '사는 이야기'로 작성해 보았습니다. 오체투지 행렬에 있는 송성영 기자도 보았으니 <오마이뉴스>기자 몇 명이 현장에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를 겁니다. '모든 시민은 기자'라고 하는 말이 실감나는 현장이었습니다.



태그:#오체투지, #신원사, #중악단, #수경스님, #문규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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