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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리를 맞고 핀 국화

서초동 김원일 창작실에서
▲ 김원일 선생 서초동 김원일 창작실에서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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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문자시대 이래 쌓아온 지식을 통해서도 많은 깨달음을 얻게 되었으나 자연으로부터 더 많은 삶의 지혜를 배웠다.

꽁꽁 언 땅과 한랭한 대기에도 아랑곳없이 생명을 창조해내는 수선화의 인고(忍苦)를 보면, 우리가 겪는 현실의 어려움을 어떻게 이겨내야 할지 무언의 교훈을 얻는다. 참고 노력하면 반드시 목적한 꿈을 이룬다는 가르침이다.

수선화가 자연의 어떤 악조건도 이겨가며 아름다운 꽃을 피워냄을 볼 때, 오늘의 남루는 내 결심 여하에 따라 얼마든 극복할 수 있음을 깨달을 수 있다.

고난은 기쁨을 예비한, 반드시 거쳐야 할 순리라는 말도 있다. 겨울의 끝자락에 서서 다가올 봄을 대망해 본다.
-김원일 산문 <겨울 꽃 수선화>

지난 일요일(22일) 서초동 김원일 창작실에서 두 시간 남짓 대담을 나누고 돌아오는 길에, 나는 문득 김원일씨 얼굴에 지난 가을 무서리가 내린 아침 내 집 화단에 그제야 활짝 핀 샛노란 국화가 겹쳐졌다.

지난해 늦가을 내 집 뜰에서 된서리를 맞고 비로소 활짝 핀 국화
▲ 국화 지난해 늦가을 내 집 뜰에서 된서리를 맞고 비로소 활짝 핀 국화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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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종 국화는 봄날의 가뭄, 여름 장마와 태풍 그리고 바람 한 점 없는 무더위와 뙤약볕을 이기고, 가을 무서리가 내린 다음에야 비로소 활짝 핀다. 그래서 국화를 오상고절(傲霜孤節)이라 한다.

그는 토종 국화가 온갖 시련을 딛고 핀 것처럼, 낭만적인 코뮤니스트(공산주의자)의 아들로 태어나 야만시절의 모진 강풍을 온몸으로 부딪치며 그 고난을 묵묵히 극복, 마침내 찬란한 예술로 승화시켰다.

이 땅에서 천형(天刑)인 문둥병보다 더 무서운 공산주의자의 아들로 그 질곡의 세월을 살아온 이야기는 그 자체가 한 편의 대하소설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는 분단문학뿐 아니라 한국문학의 큰 봉우리로 우뚝 섰다.

뚝배기 토장 같은 사람

세상에는 사귀기가 쉬운 사람도 있고, 어려운 사람도 있다. 대체로 사귀기가 쉬운 사람은 깊은 맛이 없기 마련이고, 반면에 사귀기가 어려운 사람은 뚝배기 토장처럼 그윽한 맛이 있다. 김원일은 좀처럼 사귀기가 어려운 사람 축에 들 것이다.

일찍이 문학의 길로 들어서기로 작정한 사람이 어찌 소설가 '김원일'씨를 모르겠는가. 문청시절부터 그의 작품을 눈여겨 읽으면서 그는 나에게 동경과 선망의 대상이자 경외의 대상이었다. 그가 숱하게 쏟아놓은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한 작품은 나로서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강 건너 언덕처럼 높고 아득하게 보였다.  

2004년 어느 가을날, 작가회의 창립 30주년 기념식장인 효창동 백범기념관 어귀에서 김원일씨와 마주쳤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곧 그에게 다가가 인사를 청했다. 그는 내 인사를 받고는 "오늘 상을 준다는 연락을 받고 왔다"는 꼭 필요한 몇 마디만 하고 더 이상 말이 없었다. 그의 외모에서 풍기는 인상이나 투박한 말씨 등으로 미루어 과묵 ‧ 눌변 형으로 좀체 마음의 문을 열 사람이 아니었다.

북한이 자랑하는 평양산원
▲ 평양산원 북한이 자랑하는 평양산원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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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인 2005년 여름 남북작가대회 이튿날인 7월 21일 오후 뙤약볕 속에 평양산원을 찾았다. 우리 일행 100여 명 가운데 양자택일 중, 평양지하철을 찾는 이가 훨씬 더 많았다. 평양산원을 찾는 이는 고작 15명 안팎이었다.

병원 측 안내원이 평양산원에 대한 자랑을 잔뜩 늘어놓았다. 이 평양산원은 1979년 4월 30일 착공하여 세계사에 유래 없는(?) 빠른 공사로 1980년 1월에 완공하여 1980년 7월 30일 남녀평등기념일에 문을 열었다고 자랑하였다. 평양산원은 13층의 기본청사와 6개 동의 부속 건물로, 연면적 6만 평방미터로 산원에는 산과 ‧ 부인과  ‧ 내과 ‧  비뇨기과  ‧ 구강과  ‧ 안과  ‧ 이비인후과 등 여성종합병원이라고 했다.

더운 날씨에 씰데없는 논쟁 마 그만 해라

다음 관람지는 만경대 학생소년궁전이다. 거기로 가는 길에 버스 건너편 자리에 앉은 북한 안내원이 나에게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넸다. 그는 북조선에서는 인민들이 이 모든 시설을 사용하는 데 돈 한 푼 내지 않고, 누구나 전혀 차별 없이 똑같은 대우를 받는다고 자랑했다. 그런 뒤, 남조선의 산아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으면서 돈이 없으면 병원 혜택도 받지 못하지 않느냐고 으스대며 반문했다.

그 물음 속에는 은연중 북조선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속내가 비쳤다. 나는 불쑥 짜증이 났다. 북한을 자랑하는 것까지는 참을 수 있으나 터무니없이 남한을 비방하는 그의 태도가 듣기 거북했다. 조금 전, 동행 소설가 이경자씨가 산실의 산모도 아이도 영양실조 빛이 역력해 보여 무척 가슴 아프다는 귀엣말도 퍼뜩 스쳤다. 남과 북이 서로 상대를 칭찬하고 허물을 감싸도 강대국 틈바구니 속에서 통일의 길이 만만치 않을 건데, 남과 북이 서로 상대를 터무니없이 헐뜯고  비방만 한다면 통일의 길은 더욱 멀지 않겠는가.

"남녘에서는 산모의 형편에 따라 병원과 병실을 선택합니다. 부유층에서는 특실도 쓰고, 가난한 이들은 2~3인용도 씁니다. 그 전에는 돈이 없어서 집에서 낳는 이도 더러 있었지만, 요즘은 전 국민이 의료 보험혜택을 받고 있기에 집에서 낳는 산모는 거의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는 나의 답변에 북조선은 돈 한 푼 안 낸다는 것과 누구나 전혀 차별 없이 똑같은 대우를 받는다고 거듭 북조선의 우월성을 강조했다. 나는 "병원비가 무료고 크게 차별이 없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지도자 가족이나 당 간부 가족과 일반 노동자 가족과는 다소 차별이 있을 거다"라고 대꾸하자, 그는 줄곧 누구나 조금의 차별도 받지 않는다고 강변하는 등, 나와 열띤 논쟁이 벌어졌다.

"박 선생, 더운 날씨에 씰데없는 논쟁 마 그만 해라."

앞자리에 앉은 김원일씨가 일갈하여 나도 그도 입을 닫았다. 이미 북한을 두어 번 방문한 적이 있는 김원일씨는 방문기간 중에 안내원과 설전을 벌이는 것은 손님으로 결코 현명치 못하다는 것을 새삼 일깨워주었다. 그 일로 김원일씨와 나는 마음의 문이 열렸고, 서울로 돌아온 뒤 다시 만나기로 약속까지 하였다.

백두산 장군봉에서 장엄한 해돋이를 바라보다(2005. 7. 23)
▲ 김원일 선생 백두산 장군봉에서 장엄한 해돋이를 바라보다(2005. 7.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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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생을 즐겨라

표지
▲ 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장면 표지
ⓒ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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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방문을 마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자 서로 사는 곳도 멀고, 만날 날짜를 잡으려 했으나 이런저런 사정으로 마땅치 않아 두어 번 전화를 하다가 그만 접고 지냈다.

그러다가 이듬해 내가 <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장면>이라는 한국전쟁 사진집을 기획하면서, 한국전쟁 체험담을 들려줄 이로 김원일씨를 추천, 출판사에서 원고를 청탁하여 책에 실었다. 그 일로 만나지는 않았지만 이심전심 더 가깝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후배 이승철 시인이 안흥찐빵을 사 보낸 답례인 듯 산골에 사는 나에게 책을 한 상자 택배로 보냈다. 열 권 남짓한 책에서 먼저 김원일 산문집 <기억의 풍경들>을 초저녁에 펴들고 읽기를 시작하여 이튿날 오후에 끝장을 넘기고는 곧장 전화기의 다이얼을 눌렀다.

"서울 오는 길에 연락주세요."
"마침 이번 일요일에 서울 갈 예정입니다."
"그럼 그날 볼 일을 마치고 서초동 내 작업실로 오시오."
"네, 그러겠습니다."

힘들게 오늘을 사는 젊은이들이여, 어릴 때나 젊을 때나 통과의례로 넘게 되는 몸과 마음의 고생(실연까지 포함해서)을 차라리 즐겨라. 이를 이겨내는 자에게는 하늘이 그 보답으로 성공의 길을 준비해 두고 있으니 부디 좌절하지 말고, 용기를 잃지 말기를.
- 김원일 산문집 <기억의 풍경들> 첫 문단

한 소설가의 체험 섞인 글이 읽는 이에게 조그마한 마음의 양식이라도 될는지 모르겠다. 산문집 제목 그대로, 예순 중턱에서 지난날을 되돌아본 기억에 남겨진 풍경들이다.
- 김원일 산문집 <기억의 풍경들> 마지막 문단

김원일(金源一, 1942년 - )
                                                         
 경남 진영에서 출생, 1950년 한국전쟁 때 부친의 월북으로 헤어져 신문배달 등을 하면서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후에 유년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바람과 강》《마당 깊은 집》 등을 창작했다. 1967년 〈1961·알제리아〉가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문단에 등단한 이후, 1967년 《어둠의 축제》가 《현대문학》 장편 모집에 당선되는 등 주목받는 소설가가 되었다.

그는 소설의 소재를 분단된 민족의 아픔에서 찾았는데, 단편 〈미망〉,〈오누이〉, 장편 《겨울 골짜기》,《불의 제전》,《마당 깊은 집》 그리고 《환멸을 찾아서》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이러한 작품을 통하여 분단의 상처와 그로 인한 고통스러운 삶을 추적하고 있다. 작품으로는 장편에 《노을》,《늘 푸른 소나무》,《도요새에 관한 명상》 등이 있으며, 단편집으로 《어둠의 혼》,《오늘 부는 바람》 등이 있다. 현대문학상, 한국창작문학상, 동인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3~4회로 이어질 예정입니다.



태그:#김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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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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