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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겹살'을 1000원에 팔 수 있는 대형마트의 힘

 

출근길. 전철칸에 버려진 무가지 신문을 펼치다 눈에 들어오는 사진 하나. 모 대형마트가 창립 10주년을 맞아 '금겹살'이라고 불리는 삼겹살 100g을 1000원에 파는 행사가 사진으로 실렸다. 짧은 순간 몇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주변 정육점 고기 안 팔리겠군', '주머니 텅텅 빈 서민들 줄이 뱀꼬리처럼 늘어지겠네', '흉내낼 수 없는 대자본의 힘이여.' 그 생각 끝에 따라오는 조금은 창피한 기억 하나가 괜히 얼굴을 붉히게 한다.

 

작년 초가을일 게다. 배추가 금추라고, 3포기 한 망을 담은 배추가 만오천원을 훌쩍 넘어가고 그마저도 시장에서는 구경조차 할 수 없었을 때. 아내는 어디서 구했는지 X마트 전단을 들고 "민주아빠. X마트에서 배추 세일한다는데 우리도 사러 갈까? 이것 봐. 환상적인 가격이야." 나에게 건네준 전단 1면에는 싱싱한 배추 사진과 함께 '특별판매. 강원도 고랭지 배추 1통 700원!! -단, 1인당 3포기 3000포기 판매분에 한합니다'라고 광고하고 있었다.

 

'김치 못 먹어 환장한 사람도 아니고. 그거 사려면 개장 전부터 줄서서 기다리고… 가지 마'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정작 나는 그날 문도 열기 전 아내 모르게 긴 줄의 끝에 서고 말았다. 대부분 서민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 트레이닝복을 입은 아줌마. 전날 술이 덜 깬 듯한 아저씨는 아이까지 앞세우고. 아침밥을 안쳐놓고 왔다는 할머니는 혹시라도 배추를 못살까봐 직원에게 자기 차례까지 살 수 있느냐고 몇 번을 물었다.

 

한 시간을 기다려 배추 세 통 사고 2100원 카드로 계산,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약삭빠른 승리자일까? 대자본의 농간에 놀아난 이기심만 꽉 찬 서민일까? 이 질문은 그때도 지금도 해묵은 천식처럼 언제라도 불쑥불쑥 찾아오지만 답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세계적 경기침체에 130% 매출 실적을 달성하는 힘은 무엇일까?

 

자영업이 몰락하고 있다고 한다.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2월 한 달만 해도 문을 닫은 자영업자는 25만명이 넘으며 이 중 17만명 이상이 '나홀로 자영업자'라 한다. 자영업자의 몰락.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동네 슈퍼가 문을 닫고 '망했습니다. 땡처리'라고 써붙인 옷가게는 퇴근하는 골목에도 몇 개씩이나 생겨난다. 경기 침체가 원인이라고 한다. 일면 맞는 말이다. 그러나 '경기침체'라는 사회적 현상만 가지고 자영업의 몰락을 설명하기에는 뭔가 부족하고 분명하지가 않다.

 

신세계백화점은 센텀시티의 '프레 오픈(VIP고객만 초청)' 기간 2일을 포함해 공식 개장일인 3일까지 사흘간 81억 원(프레 오픈 기간 매출 37억원 포함)의 매출을 올려 당초 매출 목표에 비해 130%의 실적을 달성했다고 4일 밝혔다. …특히 란제리 매장은 '개업 점포에서 붉은색 속옷을 사면 행운이 온다'는 이 지역 속설의 영향으로 문을 연 직후부터 문을 닫을 때까지 고객이 인산인해를 이루며 8억2천만 원의 매출을 달성했다. 속옷 전체 매출 중 90%(7억원 가량)가 붉은색 속옷이 차지했다고 신세계는 전했다. -<연합뉴스> 2009년 3월 4일

 

지난달 17일 오후 2시 부산 해운대구 반송동. 인근 재래시장과 상점 상인 300여명이 가게 문을 닫고 거리로 몰려나왔다. 한창 손님맞이에 여념이 없어야 할 이들의 어깨에는 '대기업 소형슈퍼 입점 절대 반대'라고 적힌 빨간색 어깨띠가 걸렸다. 어설프긴 하지만 노란색 풍선 막대를 힘차게 두드리며 입을 모아 구호도 외쳤다. - <오마이뉴스> "롯데붕어빵, GS떡볶이는 왜 안 파나?"

 

부산에 사는 것도 아니고 사회현상을 연구하는 학자도 아닌 기자가 위 두 기사의 인과관계를 증명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두 기사가 전혀 별개의 문제, 아무런 연관 관계를 갖지 않는 기사라고 볼 수 있을까? 만약 누군가 기자가 의도(?)를 가지고 기사를 모아 놓았다고 이야기한다면, 세계적인 불경기에도 3일 동안 130% 매출을 올린 이유는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더불어 아랫 기사에서 재래상인 300명은 불경기에 남 탓만 하는 '떼쟁이'들인가에 대해서는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거기가 제일 싸요, 거기서 사세요'라고 말해야 하는 자영업자의 비애

 

40대 자영업자. 현재 나의 모습이다. 그러나 앞으로 얼마 동안 이 일을 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차라리 세계적인 경제 침체만이 문제라면 남들 다 견디는데 같이 허리띠를 졸라 매야 한다고 스스로 다짐이라도 해 볼 일이다. 그러나 자본의 힘이 모든 것을 우선하는 '신자유주의' 시대에서 대자본과 맞서 내가, 나와 같은 자영업자들이 얼마만큼 경쟁력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을지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경기침체가 끝나고 호경기가 온다고 하여도 대자본과 무차별적 경쟁을 요구받는 자영업자의 처지가 바뀌지 않는 한 지금보다 나아지리란 낙관적 근거는 어디서도 발견할 수 없다.

 

장사를 하면서 지인들에게 물건 팔기를 꺼릴 때가 종종 있다. 사고자하는 모델명을 입력해 수십 군데 가격비교를 하고, 그래도 너는 도매시장에 있으니까 더 싸게 살 수 있지 않느냐고 물어올 때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난감하기 이를 데 없다. 인터넷 대형쇼핑몰. TV만 틀면 쏟아져 나오는 각종 홈쇼핑. 친절하게 모든 가격을 비교해 주는 비교 사이트, 여기에 동네에 몇 개씩 세워진 대형마트에 이르기까지 가격과 조건을 꼼꼼히 체크한 사람이 전화를 할 때면 차라리 피하고픈 마음이 간절하다.

 

카드 무이자 할부, 배송 무료, 할인 쿠폰 발행, 마일리지 적립, 각종 액세서리 제공, 여기에 최저 가격까지. 소규모 자영업자로서는 도저히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조건이다. 몇 번의 망설임 끝에 전화를 받아 이런 것을 제공하지 못하는 이유를 구구절절 이야기하고 어떤 곳이 조건이 가장 좋으니까 거기서 사라고 말할 때는 이 장사를 언제까지 해야 하나 회의가 밀려온다.

 

비단 나만 그런 것이 아니다. 대형마트에서 쇼핑을 끝내고 돌아오는 옆집 사람이 차에서 소주, 맥주를 박스째 내리는 걸 멍하니 바라보고 있어야 할 슈퍼마켓 아저씨의 낭패감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몇 % 할인 돼요? 무이자 할부도 되나요? 마일리지 적립해 주시나요?" 한참을 묻기만 하고 "그래도 인터넷 서점이 싸네"하며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는 손님을 바라보아야 할 동네 서점 아저씨. '여기는 비싸니까 다음에 마트 가서 사줄게'라며 아이가 가진 장난감을 빼앗아 내려놓는 아이 엄마를 바라보아야 하는 똑같은 아이 엄마인 동네 완구점 주인. 자영업자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이들은 대자본과 비교당할 때마다 백전백패. 그때마다 절망하는 것이다.

 

문제는 자본. 소규모 자영업자들은 가격 경쟁력을 갖출 자본력이 없는 것이다. 무이자 할부, 현금 할인, 배송비 무료, 마일리지 적립 등등을 몰라서 안 하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자본이 뒷받침되지 않는 것이다. 대형 마트와 동네 슈퍼 소주 한 병 원가는 엄연히 다를 수 밖에 없고, 대형마트에서 소주 한 병 천 원을 받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동네 사람들 눈총을 받으면서 소주 한 병 천이백 원은 받아야 하는 것이 자영업자들의 하소연하지 못할 현실이다.

 

때문에 한두 번 소주를 사러오던 사람도 대형마트에서 박스째 소주를 사오면서 발길을 끊고, 인터넷 서점에서 각종 할인받고 마일리지 쌓으면서 책을 구입하는 사람이 늘어갈수록 동네 서점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온갖 비교사이트를 뒤져 MP3를 사고, 디지털 카메라를 사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동네 가전제품 매장은 점점 더 보기 힘들어질 수밖에 없다.

 

싸게, 좋은 조건으로 구매하는 건 소비자의 권리

 

그게 무엇이 문제냐고? 소비자는 좋은 제품을 값싸게 살 권리가 있는데, 질 좋은 서비스, 쾌적한 환경에서 쇼핑할 수 있는 것도 소비자의 권리이고, 세계적 불황기에 인터넷을 밤새 뒤져서라도 한 푼이라고 싼 것, 좀 더 좋은 조건을 찾는 것이 칭찬받으면 받았지 어떻게 문제가 되느냐고? 맞는 말이다.

 

소비자의 권리를 시비 걸 마음은 없다. 나 또한 일요일 오후 습관처럼 아이들과 대형 마트에서 쇼핑하고 맛난 것 먹고, 소주도 꼭 라면 사은품이 붙어 있는 것 6병짜리 사고. 아내는 마일리지 챙기고 더 많이 할인되는 카드 고르고, 같은 제품이면 1+1 행사하는 것 고르고… 그렇게 습관처럼 문화처럼 한 달에 한두 번은 꼭꼭 대형마트에 들른다.

 

그런데 이런 경쟁력을 갖추지 못한 자영업자는 다 없어져야 할까? 소주 한 병에 1200원 팔고 마일리지도 없고 무이자 할부도 제공할 수 없는 자영업자들은 소비자 권리를 위해서 그냥 도태되어야 하는 것이 시대의 흐름일까? 나도 대형쇼핑몰, 비교사이트와 경쟁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장사를 접어야 할까?

 

나의 풀리지 않는 고민 지점은 여기에 있다. 높아져가는 소비자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것도 대자본 힘이라면, 앞으로 점점 더 자본의 경쟁력을 갖추지 못한 자영업자는 몰락하고 소비는 대자본에 집중될 수밖에 없다는 것. 그렇다고 자영업을 살리기 위해 조금 비싸더라도 슈퍼에서 물건 사고, 카드 할부, 마일리지도 없고 주차장도 없는 재래시장에 아이들 데리고 시장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정당한 것인가, 그리고 효과 있는 일일까? 무한경쟁의 시대. 일등만 살아남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대자본과 경쟁해서 밀린 자영업자는 과연 어디로 가야 하는가가 풀리지 않는 내 고민이다.

 

정부에서 자영업자를 살리려는 각종 정책을 쏟아내고 있다. 대출 확대. 자영업자 고용보험 가입 등등…. 그러나 사실 이런 정책들이 무한경쟁에 내몰린 자영업자들에게 어떤 효과가 있을지 의문이다. 진정 자영업자를 위한 정책을 고민한다면 대자본과 동일한 출발선상에서 벌거숭이로 선 자영업자들의 경쟁이 정당한가에 대한 진지한 고찰을 우선해야 하지 않을까?

 

모든 이가 견뎌야 할 불황이라면 자영업자도 견뎌야 한다. 그러나 자영업자가 더욱 더 힘든 것은 세기의 불황, 무한경쟁의 신자유시대, 대자본과의 경쟁을 숙명처럼 당연하게 받으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불경기가 깊어질수록, 유통시장이 발달(?)될수록 대형자본의 시장잠식은 더 가속화되고 자영업자들은 가장 가까이 있었던 사람들조차도 그들의 고객으로 내주어야 되는 것이다.

 

자영업자의 몰락. 경기 침체에서 모든 원인을 찾는 건 너무 근시안적 시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자영업자#대형마트#무한경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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