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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신기했다. 왜 어른들은 저렇게 뜨거운 국물을 먹으면서 시원하다고 할까?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저 국물이 어찌하여 시원하단 말인가. 도대체 어른들은 뜨거운 국물을 금방 시원한 국물로 만드는 재주라도 가졌단 말인가?

뜨거운 국물을 마시며 연신 시원하다고 말하던 어른들의 모습. 그 모습은 어린 나의 눈에 너무나도 신기하고 경이로운 것이었다. 과학적으로 성립되지 않는 그 역설은 무척 모순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어른이 되면서 점차 그 말의 의미를 알게 되는 과정 또한 경이로운 것이었다. 입김을 후후 불어가며 마셔대는 뜨거운 국물의 청량함과 시원함에 어느새 길들어버린 내 입맛 또한 경이로운 것이었다.

좋구나, 토종 재첩
 좋구나, 토종 재첩
ⓒ 김대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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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한 국물이라고 하면 콩나물과 복어국, 동태국, 북어국 등을 치지만 재첩 국물의 시원함 또한 그 어디에도 빠지지 않는다. 특히 숙취에 헤매다 새벽녘에 설핏 일어났을 때, 골목 어귀에서 들려오던 '재첩국 사이소'라는 소리는 밤새 시달린 위장의 피로를 풀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새벽의 단잠 속에 아스라이 들려오던 그 소리는 이제 거의 사라진 것이 못내 아쉽긴 하지만.
 

어머님이 그 재첩국 장수를 불러 세워 냄비에 담아오시던 재첩국. 그 재첩국 한 대접에 쓰린 위장은 개운하게 풀리었다. 세월이 어느덧 흘러, 골목 어귀의 재첩국은 자취를 감추고 할인마트나 대형 슈퍼에서 손쉽게 사먹을 수 있게 된 재첩국. 가끔 그 추억의 맛을 보고 싶어 아내더러 사오라고 하여 먹어보긴 하지만 도무지 그 옛날의 맛을 찾을 수가 없다.

때론 역한 조미료 냄새가 나기도 하고, 때론 느끼하면서도 씁쓰레한 뒷맛이 나는 재첩국. 누군가 말했던가. 재첩을 냉동 컨테이너로 수입하여 강가에 슬쩍 담가두었다가 다시 건져내서 어디 어디 재첩이라고 판다고. 그래서인지 요즘의 재첩국은 영 뒷맛이 개운치가 않다. 먹으면 먹을수록 맛이 이상하다. 그래서 난 그동안 재첩국을 먹지 않았다.   

윤기가 자르르
 윤기가 자르르
ⓒ 김대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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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지난 토요일의 어느 날, 지인들과 산행을 즐긴 후 나 혼자서 집으로 터벅터벅 돌아가던 길에 눈에 번쩍 뜨이는 물건 하나를 발견했다. 한 눈에 보기에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재첩. 시중에서 파는 재첩과는 모양부터가 판이하게 다른 재첩이 국산 재첩이라는 가여운 표지 아래 우람하게 앉아 있었다.

옻빛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그 재첩은 우선 크기부터가 달랐다. 시중에서 파는 재첩보다 거의 두세 배의 몸체였고, 물 속에서 투명한 혀를 내미는 재첩의 움직임은 싱싱함 그 자체였다. 무심코 지나쳤다가 다시 그 자리로 돌아와 할머니에게 가격을 물었다. 5천원이란다. 누가 가져갈세라 냉큼 사서 한달음에 집으로 달려갔다. 아내더러 어서 끓이라고 성화를 퍼부었다. 덤으로 산 전구지 한 단을 함께 내밀면서 말이다.

잠시 후, 냄비에서 뽀글뽀글 끓는 재첩국. 국물이 어찌 그리 맑은지. 시중에서 파는 재첩과는 국물 빛이 달랐다. 냄비에는 온통 연푸른빛이 감돌고 있었다. 청명한 가을 하늘이 이처럼 맑을까, 아니면 남태평양의 에메랄드 바다가 이처럼 고울까. 그 연하 디 연한 푸른 색감은 결코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을 것이다.

식탁에 앉아 재첩국의 향훈을 감상하는 것 자체가 즐거운 일이었다. 사기그릇에 가득 담겨져 나온 재첩국. 정구지를 숭숭 썰어 살짝 띄어 놓고, 재첩국이 피워 올리는 향을 흠뻑 들이 마시며 국물을 떠먹었다.

아, 절로 나오는 탄성. 그 예전 골목길 어귀에서 만난 재첩국 맛이 그대로 혈관 속으로, 심장 속으로 흐르고 있었다. 시원하다 못해 신선함이 물컹물컹 묻어나는 재첩국. 처음엔 심심한 듯 하다가 이내 깊은 뒷맛을 안겨주는 토종 재첩국.

뽀얀 국물의 향연
 뽀얀 국물의 향연
ⓒ 김대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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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기막힌 행운이라고 할 밖에. 반주로 먹는 소주 한 잔이 폭포수처럼 목구멍에 들어가고, 안주 삼아 먹는 재첩국물이 은하수처럼 입안에 맴돈다. 황홀했다. 혀끝에 감도는 시원함에 가슴이 다 뻥 뚫렸다. 그 시원한 국물을 먹다가 슬쩍 맛보는 재첩의 탄력 있는 속살. 흐물흐물하면서 알갱이도 작은 일반 재첩에 비해 씹는 맛이 단박에 느껴지는 국산 재첩. 쫄깃쫄깃한 속살의 탄탄함은 혀끝을 간질이고 있었다.

어느새 소주 반병이 비워지고, 재첩국은 두 그릇을 먹어 치웠다. 슬쩍 냄비를 보니 아직 반이나 넘게 남아 있다. 내일 아침에도 먹을 수 있겠군. 안도의 숨을 쉬며 느긋하게 부어오른 아랫배를 쓰다듬어 본다.
  
연푸른 재첩국
 연푸른 재첩국
ⓒ 김대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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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국물을 먹으며 연신 시원하다고 말하던 어른들의 모습. 어느새 그 어른들을 닮아가는 나를 어린 아들 녀석이 신기한 듯 바라본다. 청노루 닮은 그 눈 속에 예전 내가 품었던 의문들이 점점이 박혀 있다.

참으로 소박한 희망 하나 가져본다. 재첩을 도시의 개천에서도 쉽게 잡을 수 있는 그날이 오기를. 아침에 일어나 집 앞 개천에서 잡은 재첩을 끓여먹는 그날이 오기를. 맑은 물 속에 사는 재첩처럼 우리네 인생살이도 맑게 되기를.

덧붙이는 글 | 유포터에도 송고함



태그:#재첩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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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스토리텔링 전문가. <영화처럼 재미있는 부산>,<토요일에 떠나는 부산의 박물관 여행>. <잃어버린 왕국, 가야를 찾아서>저자. 단편소설집, 프러시안 블루 출간. 광범위한 글쓰기에 매진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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