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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기하의 얼굴들의 <달이 차 오른다> 장기하와 얼굴들이 11일 마포구 성미산 마을극장에서 열린 팬 미팅에서 '달이 차 오른다'를 부르고 있다.
ⓒ 박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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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입지 않아 이젠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두 여인이 등장한다. 입술에는 보는 것만으로도 부담감이 팍팍 느껴지는 빨간 립스틱, 머리에는 흡사 고추장 단지에 한 번 푹 담갔다 빼낸 듯한 붉은 모자. 얼굴의 반을 가릴 만큼 큰 선글라스를 착용했지만 얼굴에 흐르는 도도한 기운은 감출 수 없다.

'도대체 저 도도함의 정체는 뭐지?'하는 의문이 머리를 스칠 무렵. 극장을 가득 메운 팬들의 함성이 터진다.

"미미! 미미! 미미!"

이쯤 되면 슬쩍 한번 웃어줘도 좋으련만 당최 표정 변화가 없다. 눈빛이라도 봤으면 싶은데, 그녀들이 걸친 선글라스는 그야말로 철의 장막이다. 가수 장기하와 함께 노래를 주고받으며 조금 뻣뻣한 춤을 선보인다. "저걸 춤이라고 하기엔 좀 뭔가…" 싶은 뭐 그렇고 그런 몸짓이다.

 인디밴드 '장기하와 얼굴들'이 11일 저녁 서울 성산동 성미산 마을극장에서 첫 정규앨범 '별일 없이 산다' 발매기념 팬미팅 행사를 갖고 미미 시스터즈와 함께 노래 공연을 선보이고 있다.
 인디밴드 '장기하와 얼굴들'이 11일 저녁 서울 성산동 성미산 마을극장에서 첫 정규앨범 '별일 없이 산다' 발매기념 팬미팅 행사를 갖고 미미 시스터즈와 함께 노래 공연을 선보이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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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문화'의 승리?

무표정한 장기하의 얼굴과 중얼거리는 듯한 노래, 그리고 그녀들의 몸짓이 척척 맞아 떨어져 비로소 삼위일체가 되는 순간. 이제 팬들의 환호성은 절규 수준에 이른다. "교주! 교주!"하는 함성도 곳곳에서 터진다. 

이걸 'B급 문화'의 승리라고 봐야 할까, 아니면 비주류의 우직함이 만들어낸 새로운 현상으로 봐야 할까. '장기하와 얼굴들' 1집 발매 기념으로 11일 저녁 인터넷 서점 <예스24>가 마련한 팬 미팅 현장에는 이런 의문을 품게 하는 힘이 있었다. 서울 마포구 성미산 마을극장에서 열린 이날 행사에는 '장기하와 얼굴들'의 열렬한 '신도' 150여 명이 참석했다.

영화계에서 독립영화 <워낭소리>가 홈런을 쳤다면, 음악계에서는 인디밴드 '장기하와 얼굴들'이 대박을 터뜨렸다. 바야흐로 독립의 전성시대다.

'장기하와 얼굴들'의 싱글앨범 <싸구려 커피>의 성공 이후 최근 발매된 1집 앨범 <별 일 없이 산다>가 현재 각종 음반 판매 순위에서 10위권 안에 들어가 있다. 인터넷에선 그의 동영상이 인기 절정이고, 라디오에서도 "장판이 난지 내가 장판인지도 몰라"라는 듣도 보도 못한 랩을 흥얼거리는 그의 노래를 쉽게 들을 수 있다.

어디 그뿐인가. 여전히 '문화 대통령'으로 군림하고 있는 서태지와는 이제 곧 한 무대에 선다. 서태지가 두 번째 싱글 발매 기념으로 15일 서울 방이동 올림픽공원 올림픽홀에서 여는 공연에 그들을 손님으로 초대한 것이다.

사실 리더 장기하가 20대에게는 '인디계의 서태지'라 불리고 있으니, 그리 놀랄 만한 초대도 아니다. 그리고 포크송과 락의 세례를 받아온 30, 40대는 한참 동생뻘 되는 그의 등장을 "산울림, 혹은 송골매의 재림"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늙은 사람까지 전도사로 만드는 내공의 비결은?

 인디밴드 '장기하와 얼굴들'이 첫 정규앨범 '별일 없이 산다' 발매기념으로 11일 저녁 서울 성산동 성미산 마을극장에서 팬미팅 행사를 갖고 있다.
 인디밴드 '장기하와 얼굴들'이 첫 정규앨범 '별일 없이 산다' 발매기념으로 11일 저녁 서울 성산동 성미산 마을극장에서 팬미팅 행사를 갖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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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장기하와 얼굴들'의 인기 비결을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다. 이날 팬 미팅 행사에 대학생 아들과 함께 온 40대 아버지의 질문에 그 이유가 잘 담겨 있다.

"비틀즈나 존 덴버 같은 음악을 들으며 20대를 보냈고, 내 아들 역시 이런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음반을 사고 음악을 소비해 왔다. 그런데 '장기하와 얼굴들'의 노래를 들은 이후 역전이 됐다. 내 아들이 듣고 있던 당신들의 음악을 접하고, 참 오랜만에 음반을 구입했다. 쉽고 재밌는 노랫말에는 (사회적) 메시지도 담겨 있더라. 이런 늙은 사람까지 '장기하 전도사'로 만드는 내공은 도대체 무엇인가."

시종일관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던 장기하씨도 살짝 웃었다. 오랜만에 음반을 구입한 40대 아저씨가 물은 내공의 정체에 대해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답했다.

"현학적인 말 쓰는 걸 원래 좋아하지 않는다. 또 내가 엄청난 예술가로 인정받고 싶은 마음도 없다. 그냥 내 취향일 뿐이다. 일상적인 말로 가사를 쓴다. 내 음악이 짜임새가 있었으면 하지만, 난해하거나 위압감은 없었으면 한다."

사실 그렇다. '장기하와 얼굴들' 음악의 큰 특징 중 하나가 바로 입에 착 달라붙는 일상의 언어로 쓴 솔직한 가사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뭐 한 몇 년간 새숫대야에 고인 물마냥 완전히 썩어가지고 이거는 뭐 감각이 없어. 비가 내리면 처마 밑에서 쭈그리고 앉아서 멍하니 그냥 가만히 보다 보며는 이거는 뭔가 아니다 싶어." - <싸구려 커피>

"네가 들으면 십중팔구 불쾌해질 얘길 들려주마. 오늘 밤 절대로 두 다리 쭉 뻗고 잠들진 못할 거다. 그게 뭐냐면, 나는 별 일 없이 산다. 뭐 별다른 걱정 없다. 나는 별 일 없이 산다. 이렇다 할 고민 없다." - <별 일 없이 산다>

"오늘 밤 절대로 두 다리 쭉 뻗고 잠들진 못할 거다"

청년 실업을 겪고 있는 20대의 일상을 묘사한 것 같기도 하고, 주류에서 살짝 비껴선 이들의 '깡다구'를 표현한 것 같기도 하다. 장기하씨는 최근 <시사매거진 2580>에서 "루저(패배자)들의 삶이 아닌, 평범한 20대의 한 단면을 표현했을 뿐"이라며 "사실 그동안 미디어가 20대의 삶을 현실과는 다르게 예쁘게 포장한 면이 있다"고 말했다.

이날 행사에서도 장씨는 "가사에 관한 질문의 답은 늘 똑같다"며 "고등학교 문학수업처럼 밑줄 긋고 '이건 무슨 뜻이다'라고 말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은 작품 감상이다, 그냥 듣는 사람에 따라 느낌과 의미가 다른 것, 그게 정답이다"고 밝혔다.

밴드에서 장씨만큼 이목을 끄는 이들은 바로 백댄서 역할은 물론이고 코러스까지 소화하는 '미미 시스터즈'다. 어떤 상황에서도 미소 한번 날려주는 법 없고, 노래할 때 빼고는 입도 뻥긋 안 하는 그녀들은 철저히 신비주의에 가려 있다.

영화배우 장동건이나 전지현, 이영애 등이 펼치는 신비주의와는 차원이 다른 전략. 물론 '풍채'에서 풍기는 느낌도 다르다. 그들의 가사대로 "이건 뭐 아니다 싶"지만 은근히 중독성이 있다.

 인디밴드 '장기하와 얼굴들'이 첫 정규앨범 '별일 없이 산다' 발매기념으로 11일 저녁 서울 성산동 성미산 마을극장에서 팬미팅 행사를 갖고 취재진을 향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인디밴드 '장기하와 얼굴들'이 첫 정규앨범 '별일 없이 산다' 발매기념으로 11일 저녁 서울 성산동 성미산 마을극장에서 팬미팅 행사를 갖고 취재진을 향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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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문이불여일견'이라는 오래된 말은 혹시 두 여인을 포함한 '장기하와 얼굴들'의 한 판 퍼포먼스를 두고 만들어진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말이 길었다. 아니 장기하식으로 표현하면 '썰'이 길었다. '클릭질' 한번이면 모든 게 확인 가능하다.

불황, 위기, 해고와 실업 등의 우울한 단어가 많은 걸 설명해 주는 피곤한 시대. 어쩌면 우리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장기하와 얼굴들'의 노래처럼 "이건 네가 절대 믿고 싶지 않을 거다, 나는 별 일 없이 산다, 뭐 별다른 걱정 없다"라고 외칠 줄 아는 그 '깡다구'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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