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7일 아침 10시에 고양터미널에서 청주로 가는 직행시외버스를 탔다. 엊그제 경칩을 지난 3월 초순의 날씨답게 차창을 비추는 햇빛은 따사로웠다. 봄기운이 싱그럽게 피어오르는 산과 들을 마음껏 바라보고 싶었지만 눈이 부시도록 얼굴을 하얗게 비추는 햇빛이 얄궂어 커튼을 반 쯤 풀어서 창을 가렸다.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책 한 권을 꺼내 읽었다. 버스가 흔들릴 때마다 책 속의 글씨도 따라 움직이는 바람에 눈은 피곤해졌고, 머리는 띵하니 어지러웠다. 다시 눈을 감고 머리를 의자에 잠시 기대는 사이 어느새 청주 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꼭 2시간10분만이었다.

몇 년 만에 찾은 청주의 표정은 그 새 더욱 도시적으로 변해 있었다. 많은 사람들로 분주한 터미널 주변과, 높고 큰 규모의 건물이 들어선 아파트단지와 공단주변, 상가가 밀집된 활기로 가득한 젊은이들의 거리표정은 왠지 낯설지 않게 느껴졌다.   

시내버스를 탔다. 어쩌면 멀리서 찾아가는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를 '직지'를 만나러 서둘러 운천동의 '고인쇄박물관'으로 향했다. 그리고 버스가 출발한 지 몇 분 만에 '청주 예술의 전당' 사거리에서 내리니 바로 코앞에 고인쇄박물관이 있었다.

청주시 운천동에 있는 고인쇄박물관의 전경 - 지붕에 크고 작은 몇 개의 비행접시가 내려앉은 모양처럼 보인다.
▲ 청주 고인쇄박물관 청주시 운천동에 있는 고인쇄박물관의 전경 - 지붕에 크고 작은 몇 개의 비행접시가 내려앉은 모양처럼 보인다.
ⓒ 이성한

관련사진보기


고인쇄박물관의 외형은 크고 작은 몇 개의 비행접시가 어우러져 착륙해 있는 듯 특이한 디자인으로 지붕의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따스한 햇볕이 듬뿍 내리쬐는 동쪽을 향해 아담한 자태로 자리 잡은 박물관의 첫인상은 썩 괜찮았다.

나는 직지를 찾아 박물관 안으로 바삐 달려 들어갔다. 입구부터 금속활자의 문양과 장식으로 치장한 박물관 안은 작은 규모였지만, 산만하지 않았다. 조용하게 살펴보고 둘러볼 수 있는 단순한 동선과 공간배치는 차분한 관람을 배려한 세심한 면이 돋보였다.

박물관 첫 입구부터 제일 처음으로 '직지'모형과 영인본을 만났다. 그를 보자 우선은 그저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나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의 용모와 피부와 표정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가 존재해 온 육백년이 넘는 실존의 시절과 문화적 수탈이 뒤엉킨 수난의 역사를 생각했다. 그러면서 나는 '직지'의 모형을 손으로 만졌다. 아무 말 없이 어루만졌다. 나는 직지와 마주선 채 그 심오한 의미와 깊이를 헤아려 보기로 했다. 그 안에 품어 있는 가르침을 더듬어 보기로 했다.

직지는 '직지인심견성성불'(直指人心見性成佛)에서 온 말로서, 참선하여 사람의 마음을 바르게 볼 때 그 마음의 본성이 곧 부처님의 마음임을 깨닫게 된다는 뜻을 가진 말이다. 즉 '직지'는 '직접 다스린다, 바른 마음, 직접 가리킨다, 정확하게 가리킨다' 등의 뜻으로 쓰인다. 그러니까 본래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이며, 이것을 줄여서 '직지심체요절'이라 하며, 또 줄여서 '직지'라 부르는 것으로 부처님과 큰 스님들의 말씀을 간추려 상‧하 두 권으로 엮은 책이 직지인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6백 년 전, 고려 사람들은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만들어  '직지심체요절'을 인쇄했다.
▲ 직지를 만들고 인쇄하는 사람들 지금으로부터 약 6백 년 전, 고려 사람들은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만들어 '직지심체요절'을 인쇄했다.
ⓒ 이성한

관련사진보기


직지는 1377년(고려 우왕 3년)에 청주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찍혀졌다. 그러나 납치되었는지, 붙잡혀갔는지 이국의 땅(프랑스)으로 강제로 끌려가고 말았다. 불행한 출국이었다. 나는 남의 나라 국립도서관에 지금껏 포로로 잡혀있는 직지를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직지는 왜 프랑스에 가 있는 걸까?'
'직지는 왜 아직껏 우리나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걸까?'

자료를 살펴보니 이랬다. 19세기 말 주한 프랑스 대리공사였던 꼴랭 드 플랑시에 의해 직지는 프랑스로 갔다. 그리고 1911년 골동품 수집가인 베베르에게 소유권이 넘어갔고, 그 후  베베르의 유언에 의해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기증되었다. 직지는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의 귀중본으로 분류되어 단독 금고에 보관 중이란다.

나는 상세하게 설명된 자료를 읽으며 이런 생각을 했다. '문화재는 본래 그것이 만들어지고 발견된 제나라로, 제자리로 돌아와야 한다. 제나라 사람들의 역사와 삶의 궤적이 담긴 그 문화재가 있어야 할 곳은 바로 자기가 태어난 곳이다. 내나라 내 땅에서 만들어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직지는 속히 우리나라로 돌아와야 한다.'

'문화제국주의'의 한 형태는 우월한 국력을 가진 나라가 힘없고 약한 나라의 문화재를 약탈하고, 쟁취해서 자기 나라의 것으로 삼는 행위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런 나라들은 남의 나라 것을 강제로 혹은 비정상적으로 취해서 마치 자기 나라의 전유물로 여기며 끝내 그 소유와 권리를 이양하지 않는 채 이렇게 주장한다.

"이것은 인류의 유산이니 문화재 보존과 관리의 선진국인 우리가 보관하는 게 맞다. 어디에 있으면 어떤가? 이것은 모든 인류에게 남겨진 세계문화유산 아닌가?"

이는 일면 그럴듯하게 들리기도 하지만, 어불성설임에 틀림없다. 만일 그렇다면 세계 각지에 있는 인류역사의 위대한 문화유산들은 모두 힘 있는 나라(강대국)들만이 강탈하여 소유하고, 보관하고, 그것을 이용한 모든 권리와 혜택을 누려야만 된다는 얘기에 다름 아닌데 한 마디로 궤변이란 생각이다. 즉 타국으로부터 약탈‧수집된 문화재는 원래 그것이 있던 제나라로 반환되는 것이 당연하고 옳은 것이다.

활자를 제작한 후, 조판하는 판식모형의 예로서 각 부분의 명칭과 역할의 의미를 알 수 있다.
▲ 책의 판식과 명칭 활자를 제작한 후, 조판하는 판식모형의 예로서 각 부분의 명칭과 역할의 의미를 알 수 있다.
ⓒ 이성한

관련사진보기


나는 박물관 안에서 천천히 걷다 멈추기를 반복하며 전시된 자료들을 매우 꼼꼼하고 세밀하게 살펴보았다. 금속활자를 만드는 방법을 소개한 전시장소에서는 꽤 한참을 머물기도 했다. 금속활자를 만드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였는데, 밀랍을 이용해서 활자를 주조하는 방법(밀랍주조법)이 있었고, 주물사를 이용해서 주조하는 방법(주물사 주조법)이 있었고, 가열된 쇳물 등을 주형에 부어 원하는 활자를 만들어 내는 금속활자 주조법 등이 있었다.

우리나라의 금속활자는 주로 밀랍 주조법이나, 주물사 주조법으로 제작되었다는 사실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나는 그렇게 정교한 작업을 통해 만들어진 활자를 조판하고 인출하여 종이에 인쇄하는 과정을 두 눈으로 확인하면서 속으로 감탄했다. 마치 신성한 종교의식에 비견할 정도로 느껴졌다.

나는 박물관 안에서 목판인쇄물과 금속활자본의 특징과 장단점을 비교해 놓은 자료를 볼 수 있었다. 목판인쇄로 진하게 찍은 여러 권의 고서들과 독일의 쿠텐베르크가 직지보다 78년 늦게 인쇄했다는 '42행 성서' 모형의 뛰어난 모습도 볼 수 있었다. 후한의 채륜이 처음 발명해서 세계 각국으로 전파된 인류문명사의 중요한 발명품인 종이의 제조과정과 전파경로도 공부할 수 있었다.

그런데 정말 큰 아쉬움도 있었다. 오래 전 당시 금속활자가 주조되어 많은 책이 인쇄되었을 텐데 '왜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것은 한 권도 없는지, 왜 현재까지 한 권도 발견이 되지 않고 있는지' 좀처럼 쉽게 납득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박물관에 자원봉사 중인 문화유산 해설사 한 분과 잠시 그와 관련한 얘기를 나눴다.

"직지를 인쇄할 당시에 금속활자로 인쇄된 책이나 인쇄물이 꽤 있었을 텐데, 어떻게 현재 우리나라에 한 권도 남아있지 않은 걸까요? 참 알 수 없는 일이예요."

"그러게 말 이예요. 안타까운 일이지만 현재까지 발견된 것이 없으니 답답한 노릇이죠. 만일 발견된다면 대단한 경사일 텐데요. 정부에서는 발견한 사람에게 큰 상금도 주고 그런다는데..." 

나는 문화유산 해설사 선생님과 그런 아쉬움을 서로 짧게 토로하여 나누는 것을 끝으로 박물관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박물관 옆 언덕 평지 위에 차분히 서 있는 흥덕사지 금당을 만났다.

복원되어 단아한 모습으로 정좌하고 있는 흥덕사지 금당과 그 마당에 조악하게 만들어져 부조화스럽게 서 있는 3층 석탑
▲ 흥덕사지 금당과 3층 석탑의 모습 복원되어 단아한 모습으로 정좌하고 있는 흥덕사지 금당과 그 마당에 조악하게 만들어져 부조화스럽게 서 있는 3층 석탑
ⓒ 이성한

관련사진보기


'흥덕사지'는 1984년 택지개발 도중 '흥덕사(興德寺)라는 명문이 새겨진 청동금구(청동으로 만든 북)와 청동부발(청동그릇) 등 유물이 출토되어 이 곳이 직지를 인쇄한 '흥덕사지'임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절터였던 자리에 따스한 햇볕을 받으며 단아하게 홀로 있는 흥덕사 금당은 그 마당 앞에 세워진 매우 조악해 보이는 3층 석탑과는 사뭇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흰색 백분을 바른 것 같은 경망스런 표정의 3층 석탑은 몹시 부자연스러웠다.

나는 '흥덕사지'를 사뿐사뿐 걸어 한 바퀴를 돌았다. 그러면서 군데군데 놓여진 주춧돌로 알 수 있는 회랑의 흔적과 바닥에 깔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전돌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나는 넉넉한 봄볕아래 혼자만의 역사적 회상으로 유추하고 감상하는 답사의 유희를 실컷 즐길 수 있었다.

나는 '흥덕사지'를 나와서 근처에 있는 '용화사'까지 걸었다. 용화사는 1902년 고종의 비인 순빈 엄씨가 창건했다고 한다. 나는 용화사 용화보전 앞에 있는 설명문을 읽으며 재밌는 사연을 알 수 있었다. 그 사연이란, 순빈 엄씨가 꿈속에서 일곱 미륵을 만났는데 일곱 미륵은 '우리가 청주 어느 늪에 있는데 어려움에 처해 있으니 절을 지어 구해 달라'고 했다는 것이고, 이에 순빈 엄씨는 청주의 지주 이희복을 시켜 무심천변 늪에 빠져있던 불상 7위를 찾아내고 상당산성 안에 있던 보국사를 옮겨 이 절을 짓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청주 무심천 변에 세워진 용화사의 2층 건물인 용화보전
▲ 용화사 '용화보전' 청주 무심천 변에 세워진 용화사의 2층 건물인 용화보전
ⓒ 이성한

관련사진보기


용화보전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2층 건물로 내부에 칠불 외에 삼천불이 모셔져 있었다. 나는 용화보전 안으로 들어가 미륵 칠불께 가벼운 눈인사를 드리고서 바람이 살랑살랑한 무심천변을 걸어 도청 앞 쇼핑의 거리에 포위되어 있는 용두사지 철당간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용두사지 철당간이 있는 곳은 청주에서도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거리이자 만남의 장소였다. 쇼핑쎈터 뒤편 공간 한 가운데에 하늘을 향해 도도하게 뻗어 의연히 서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철당간은 사방으로 낮은 철제난간을 두르고 주변의 건물들과 사람들 틈에 우뚝 서서 그 누구에게 아무런 관심을 받지 않아도 게의치 않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고독해 보이기도 했다. 왜냐면 철당간 주위를 온통 핸드폰 가게, 옷가게, 패스트푸드 음식점, 술집 등이 모조리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한편 그 곳에 오래도록 꿋꿋이 선 채 사람들의 별 무관심과 막개발의 광풍을 이겨낸 용두사지 철당간은 당당해 보였다. 나는 철당간 옆으로 가까이 가서 위아래와 좌우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고려 광종 때(962년) 세워진 철로 된 당간
▲ 용두사지 철당간 고려 광종 때(962년) 세워진 철로 된 당간
ⓒ 이성한

관련사진보기


화강암 당간지주 사이로 원통 모양의 철통 20개가 위아래로 서로 맞물리도록 쌓아 당간을 이루고 있었고, 당간 돌기둥의 맨 위쪽에는 빗장과 같은 고정장치를 두어 당간을 단단히 잡아매고 있는 구조였다. 특히 세 번째 철통 표면에는 철당간을 세우게 된 동기와 과정 등이 뚜렷한 음각으로 새겨져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는 그 연대시기를 정확히 알 수 있는 당간이 남아있는 것이 드물다고 한다. 이 곳 용두사지 당간과 공주 갑사, 안성의 칠장사의 당간 세 곳에서만 철당간을 접할 수 있어 보기 드문 사례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 이유로 고려 광종 13년(962)에 창건된 용두사지에 남아 있는 철당간의 문화재적 가치는 국보로서의 의미를 갖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나는 마지막으로 철당간 앞에서 고개를 들어 철당간의 머리끝에서 발끝까지를 낱낱이 관찰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용모와 인상을 충분히 각인했다 싶을 때 비로소 그 자리를 미련 없이 떠났다.

괘불을 걸기 위해 절 앞에 세웠던 것으로 제작동기 및   제작연대 등이 기록되어 있다.
▲ 용두사지 철당간에 새겨진 역사 괘불을 걸기 위해 절 앞에 세웠던 것으로 제작동기 및 제작연대 등이 기록되어 있다.
ⓒ 이성한

관련사진보기


나는 다시 충북도청 앞에서 상당산성 쪽으로 가는 버스를 탈 수 있었다. 버스는 명암 저수지를 지나고, 우암산 자락 아래에 있는 국립청주박물관을 지났다. 버스는 계속해서 청주랜드를 지나 경사가 심한 고개를 굽이굽이 간신히 올랐다. 산을 오르는 왕복 2차선 고갯길은 매우 좁았고, 차창 옆을 바라보면 바로 아래 낭떠러지가 입을 쩍 벌린 악어처럼 끔찍하고 아슬아슬하게 있었다.

고개를 넘으며 나는 최악의 차멀미를 하진 않았지만, 머리는 어질어질했고, 딱 기분 나쁠 정도만큼만 속이 매스껍게 울렁거렸다. 잠시 잠깐 어지러움으로 헤매고 있는 사이 어느새 버스는 상당산성 앞에서 나더러 얼른 내리라며 안내방송을 했다.

상당산성 앞 마른 잔디밭에는 오후의 빛과 명암이 옅게 내려앉고 있었다. 나는 상당산성의 남문인 '공남문'을 향해 올랐다. 그리고 공남문 위 문루에 올라 사방 주위를 편안히 둘러보며 매스꺼운 속을 달랬다. 그런데 상당산성을 자세히 볼라 치니 경기도 광주에 있는 남한산성의 동생뻘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규모만 약간 작을 뿐 전체적으로 흡사한 지형과 구조가 눈에 띄었다.

원형이 잘 남아 있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석성으로 둘레는 4.2km, 내부면적 73만 제곱미터이며 성을 한 바퀴 일주하는데 약 1시간 반 정도 소요된다.
▲ 상당산성의 남문인 '공남문' 원형이 잘 남아 있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석성으로 둘레는 4.2km, 내부면적 73만 제곱미터이며 성을 한 바퀴 일주하는데 약 1시간 반 정도 소요된다.
ⓒ 이성한

관련사진보기


산성의 중앙 안쪽이 마치 작은 분화구처럼 움푹한 지형으로 이루어진 채 물을 담은 작은 저수지도 보였다. 상당산성은 전형적으로 작은 요새와 같은 지형을 갖춘 석성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자료에 따르면 상당산성은 백제시대 토성으로 축조된 성이라고 하는데, 임진왜란이후 왜구의 침입과 내란 등에 따라 한성의 중간방어 지역으로 청주의 중요성이 높아져 수차례 개축과 보수를 해왔다고 한다. 특히 18세기 들어서 지금의 석성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하며 정상에 오르면 청주와 청원이 한 눈에 내려다보일 정도로 풍광이 좋은 '청주 자랑 10선'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는 곳이라고 한다.

나는 상당산성 성곽능선을 따라 한 동안 시원한 바람을 쐬며 부스스한 얼굴을 씻었다. 아직은 심하게 오염되지 않은 산성의 공기에 실려 거름냄새, 풀냄새, 시골냄새가 다가왔다. 냄새는 향수처럼 자극적이진 않았지만, 은근하고 부드러웠다. 나는 어스름 해지는 어느 봄날 상당산성의 성벽에 서서 직지의 고장 청주를 살포시 가슴에 담을 수 있었다.

상당산성 공남문 옆 성곽에서 바라본 모습
▲ 상당산성 성곽 상당산성 공남문 옆 성곽에서 바라본 모습
ⓒ 이성한

관련사진보기


나는 산성을 내려와 시외버스터미널로 향했다. 그리고 저녁 6시10분에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차창밖에는 어둑어둑한 하늘에 붉은빛 노을의 채색이 묘한 분위기로 섞이고 있었다. 나는 무심코 오늘 하루를 돌이켜 보았다. 아침 10시에 집에서 나와 앞으로 두 시간 후 다시 집에 도착할 때까지 꼭 10시간 동안의 홀연한 가출을 한 셈이다. 길다면 긴 시간,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지만, 혼자만의 짭짤한 답사의 묘미를 느낄 수 있었던 꽤 괜찮은 여행이었다.

나는 뿌듯한 마음을 보따리처럼 꼭 싸서 내 가슴 속에 보듬었다. 그리고 홀가분하게 머리를 의자에 기대 눈을 감았다. 그런데 느닷없이 핸드폰의 진동이 덜덜덜 울렸다. 살펴보니 마누라의 문자메시지였다.

"당신 지금 어디야? 대체 언제 오는 거야?"

덧붙이는 글 | 지난 3월 7일(토) 청주지역에 답사 다녀와서 쓴 글입니다.
# 답사코스 : 청주 고인쇄박물관(흥덕사지) - 용화사 - 무심천 - 용두사지 철당간 - 상당산성



태그:#청주, #직지, #직지심체요절, #흥덕사지, #용두사지 철당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고양시에 걷기 좋은 길을 개척하기 위한 모임으로 다음 카페 <고양올레>를 운영하는 카페지기 입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