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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아이는 재수 끝에 철학과에 소신지원했다.
 딸아이는 재수 끝에 철학과에 소신지원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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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만 듣던 한해 1천만원대의 등록금이 바로 내 일이 되었다. 사립대 한 학기 등록금이 450만 원이 넘으니 자식 대학을 보내는 내 몸과 마음에 바짝 긴장이 붙는다.

얼마 전, 딸애 등록금 마련으로 다달이 적금처럼 부었던 청약부금통장을 해지했다. 200만원도 안 되는 돈으로 어림없었지만, 딸애가 입학하면서 받는 장학금을 합치니 100만원 정도가 부족했다. 학자금대출이란 게 있지만 신청절차가 까다롭고 복잡해서 카드를 긁어 등록금을 납부했다. 그렇게 어찌어찌 등록금을 내고 한숨을 돌리며 집으로 걸어가고 있을 때 아는 엄마를 만났다.

"등록금도 비싼데... 무슨 철학과야?"

잘 알고 지내는 수연이 엄마였다. 그리 친하진 않아도 서로 인사하는 이웃이고 아이들 학교는 달라도 그 집의 딸도 우리 딸애와 이번에 같이 수능을 봤다. 그 엄마가 나를 보자 어디를 갔다 오는 길이냐고 물었다. 등록금 때문에 이리저리 돈을 융통해서 넣고 오는 길이라고 말했다. 수연이 엄마는 우리 딸애가 어떤 학교 무슨 과에 들어갔는지 궁금해 했다. 나도 수연이가 궁금하긴 마찬가지였다. 우리 애가 철학과에 들어갔다는 말에 수연이 엄마가 어이없는 표정이 되었다.

"등록금 비싼데... 무슨 철학과야? 우리 수연인 00교대 됐어. 졸업하면 직장이야 뭐 정해진 거니까. 그거 하나는 잊어버리고 살게 됐어."

다들 어렵다고 하는 세상에 졸업하고 직장이 짠! 정해진 학교에 가는 것도 좋겠지만, 대학에 가는 많은 학생들이 모두 그렇게 갈 수는 없을 것이다. 딸애는 재수를 했다. 철학과는 소신 지원이었다. 철학과에 들어가서 깊이 있는 공부를 하고 싶어 했다. 수연이 엄마도 우리 애가 재수한 걸 알고 있다. 그이가 정말 말하고 싶었던 건 어쩜 '비싼 등록금' 말고 '재수까지 하고 철학과를 가느냐(보내는가)'가 아닐까?

아이가 철학이란 학문을 하겠다고 결정한 건, 제 아빠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남편은 20년 가까이 대학 시간강사로, 남들이 말하는 '보따리장수'다. 학기 중에는 이 학교 저 학교로 다니며 강의를 하는, 일용직 노동자만도 못한 대학교 시간강사. 정규직 교수와 시간강사의 차이는 하늘과 땅 만큼이란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더구나 겨우 일년 반 정도 매월 십만원씩 부었던 청약부금마저 딸애의 등록금으로 쓸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남편은 강의가 끊어지는 방학이면 각종 '알바'에 시간을 뺏긴다. 방학이 다가오는 여름과 겨울 한철은 동면(冬眠)이라도 하고 나왔으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 시간강사를 가장으로 둔 우리 식구에게 허기진 보릿고개가 아닐 수 없다.

가난한 아빠는 철학 전공 보따리 장수

지난 2008년 12월 5일 오전 서울 세종로 정부중앙청사 앞에서 등록금 대책 마련을 위한 전국 시민사회단체 네트워크 회원들이 기자회견을 열고 대학과 정부가 나서서 등록금 동결을 넘어 인하를 요구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지난 2008년 12월 5일 오전 서울 세종로 정부중앙청사 앞에서 등록금 대책 마련을 위한 전국 시민사회단체 네트워크 회원들이 기자회견을 열고 대학과 정부가 나서서 등록금 동결을 넘어 인하를 요구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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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가난한 아빠의 전공이 철학이다. 딸애는 어릴 때부터 공부하는 아빠의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접했다. 혹시 딸애가 수연이처럼 교대를 졸업하고 바로 학교 선생님이 된다고 했다면 어떨까 싶었다. 하지만 남편이 힘들게 공부하고 그 공부하는 것으로 먹고사는 일이 빠듯했어도, 딸애는 철학하는 아빠에게서 또 다른 가치를 발견했던 것 같다. 그렇게 결정한 딸애의 진중한 선택에 가슴이 뭉클하다.

스물한 살의 딸은 느긋하고 타고난 여유로움이 있다.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도 당당하고 그늘 없이 밝은 딸애는, 때때로 조급해 하고 앞서 걱정하는 나를 부끄럽게 한다. 요즘처럼 멀미가 날 지경으로 빠른 속도와 경쟁을 쫒아가는 세상에서, 철학하는 남편과 철학과를 지망한 딸애의 느릿한 걸음은 답답하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는다. 지금 당장 인기가 없어도 딸애에게 의미 있고 재미있으며 잘 할 수 있는 일이란 걸 나는 느끼고 믿는다. 시간이 가면서 자기가 하는 일의 전문성이 자라고 쌓이면 그 자체가 큰 재산이 될 것이다. '비싼 등록금으로 철학과를 가는' 딸애와 남편의 '철학'이 우리 가족에게 무엇보다 더 소중한 가치란 걸 '보릿고개'에서 되새겨본다.

덧붙이는 글 | sbs u포터송고



태그:#등록금,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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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가면을 줘보게, 그럼 진실을 말하게 될 테니까. 오스카와일드<거짓의 쇠락>p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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