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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피부색 때문에 왕따가 됐습니다.
엄마의 어눌한 발음 때문에 놀림감이 됐습니다.
엄마의 가난 때문에 풀 죽어 지내야 했습니다.
그래서 운동회 때 학교 찾아온 엄마를 '친구들이 본단 말이야, 어서 가!'라고 쫓았습니다. 모처럼 예쁘게 화장하고 아이의 학교를 찾은 엄마는 눈화장이 지워지는지도 모르고 눈물 훔치면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2008년 4월 현재 다문화가정의 학생 자녀는 1만8778명입니다. 미등록(불법) 이주노동자의 학생 자녀 9500명 중 학교에 다니는 자녀는 1574명에 불과합니다. 2020년이 되면 다문화 학생 자녀는 167만 명으로 크게 늘어날 것으로 예측하고 있습니다.

다문화 자녀들이 늘어나면 왕따 고통을 겪는 아이들은 얼마나 더 늘어날까요?
자녀의 학교를 찾아갔다가 눈물 훔치면서 돌아가야 할 엄마들은 얼마나 더 늘어날까요?

다문화 어린이 마을의 '못 말리는 개구쟁이'들

점심 먹기 전에 감사기도를 하는 '민서'
 점심 먹기 전에 감사기도를 하는 '민서'
ⓒ 조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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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금천구 가산동 (사)지구촌 사랑나눔(대표 김해성) 산하 '다문화어린이마을'(원장 한광숙 선교사) 기린반(6세반)은 베트남과 가나공화국 등 6개국 엄마를 둔 9명 아이들의 놀이터이자 배움터입니다.

기린반 어린이들의 특징을 정의한다면? 음, 천사, 씩씩함, 행복함, 순수함, 예쁨, 아름다움…. 모두 해당되는 단어들입니다만 가장 적당한 단어는 '못 말리는 개구쟁이'가 아닐까요? 천사의 얼굴로 예쁜 짓과 미운 짓을 골고루 섞어서 하는 힘이 철철 넘치는 여섯 살 아이들입니다.

다문화어린이마을엔 '왕따', '놀림', '차별' 따위는 아예 없습니다. 엄마의 나라가 서로 다르지만 국경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가난하지만 아옹다옹, 알콩달콩, 티격태격 서로 사랑하며 지내는 데 큰 불편 없습니다. 한국말이 익숙하지 않은 아이도 있지만 의사소통하는 데 지장 없습니다. 마음과 눈빛으로 통하면 언어와 몸짓도 덩달아 통하는 사랑의 소통법이 있으니까요. 

도우-고운-네슬리-민서의 복잡한 관계?

네슬리는 기린반의 인기 '짱'입니다.
 네슬리는 기린반의 인기 '짱'입니다.
ⓒ 조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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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우(엄마-한국)는 고은(엄마-베트남)이를 좋아합니다. 고은이는 도우보다는 네슬리(엄마-가나공화국)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도우가 좋아했던 민서(엄마-일본)도 네슬리를 좋아합니다.

애초 도우와 민서는 서로 좋아하는 사이였는데, 도우가 고은이에게 눈길을 돌리면서 좋은 사이가 이상해졌습니다. 이에 민서도 질세라 네슬리를 좋아하게 된 것입니다. 참 복잡한 관계죠.

"나는 도우랑 결혼하지 않고 네슬리랑 결혼할 거야!"

하루는 점심 먹던 중에 얌전이 고은이가 커다란 눈망울을 동그랗게 뜨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은이 옆자리에서 밥을 먹던 도우는 짝사랑 여자 친구의 '고무신 거꾸로 신는' 발언에 삐져서 숟가락을 놓고 문밖으로 나가 버렸습니다. 도우는 잘 토라지기도 하지만 금방 헤헤거리며 잘 웃는, 힘이 철철 넘치는 파워에너지입니다.

선생님이 곧 쫓아가 도우를 달랬더니 금방 제자리에 돌아와 앉습니다. 사나이 체면을 구기면서까지 제자리로 돌아왔지만 고은이는 아는 척도 하지 않고 밥 먹는 데만 열중이었습니다. 고은이의 네슬리에 대한 사랑 표현이 점심 먹는 내내 계속되자 시샘이 났던지 민서가 느닷없이 중대 발언을 합니다.

"나도 네슬리랑 결혼할 건데!"

네슬리의 인기는 짱입니다. 곱슬머리와 검은 다이아몬드처럼 빛나는 눈망울의 네슬리는 매력 있는 친구입니다. 넘치는 에너지를 시도 때도 없이 사용해 여자 친구들의 눈 밖에 난 도우와 달리 네슬리는 여자 친구들에게 친절하기 때문에 간택된 것 같습니다. 커다란 눈망울을 끔뻑이던 네슬리가 난처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둘 다 나랑 결혼하자고 그러면 나는 누구랑 결혼해야 하는 거야!"

꽃샘추위에 지하철 타고, 갈아타고, 마을버스 타고...

저 색연필처럼 서로 각기 다른 피부 색으로 만났지만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는 어린이마을입니다.
 저 색연필처럼 서로 각기 다른 피부 색으로 만났지만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는 어린이마을입니다.
ⓒ 조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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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슬리의 어린이마을을 오가는 길은 너무 힘겹습니다. 부평에서 1호선 전철을 타고, 신도림에서 2호선으로 바꿔 타고, 구로디지털단지역에서 내려서 또 다시 마을버스를 타야 합니다. 결국 하루는 네슬리가 결석했습니다. 네슬리 아빠 또는 엄마가 매일 데려다주고 데려가는데 오늘은 무슨 사정이 있나 봅니다.

"네슬리가 보고 싶다!"
"나도 보고 싶다!"
"나도 보고 싶다!"

네슬리가 오지 않자 가장 보고 싶어 하는 친구는 개구쟁이 단짝 도우입니다. 물론 고은이와 민서, 희정이와 현익이도 네슬리를 보고 싶어 합니다. 누구보다 친구들이 보고 싶은 건 네슬리일 것입니다. 친구들을 만나러 오지 못하는 날은 무척 심심할 텐데…. 오가는 힘겨움에도 이곳까지 오는 것은 이 마을처럼 맘 편한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문화 어린이 마을'은 부모님들께 일체의 비용을 받지 않습니다. 가난한 다문화 엄마들의 짐을 덜어드리기 위해 세웠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부모님들의 불편을 전적으로 덜어드리지 못합니다. 일반 유치원은 차량으로 데리러 오고 데려다주지만, 가난한 다문화 어린이 마을은 차량도 없고 운전사도 없습니다. 대다수 유치원들은 지자체 등에서 지원을 받지만 어린이마을은 관허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지원을 받지 못합니다.

오후 4시 30분이면 다문화 어린이 마을의 수업이 끝납니다. 상당수 아이들은 엄마 아빠 할머니들이 데려갔고, 도우와 리키타(러시아), 텔멩(몽고), 재춘(재중동포), 고은(필리핀) 등 10명의 아이들은 부모님을 기다리는 동안 만화영화를 보고 있습니다. 늦게 데리러 올 수밖에 없는 엄마 아빠, 할머니 삼촌은 얼마나 안달 날까요?

다문화 어린이 마을은 부모님과 아이들에게 송구스럽고 미안합니다. 더 해드릴 수 없기 때문에 마음만 안타깝습니다. 이 꽃샘추위에 부평, 군포, 광명 등지에서 가리봉오거리 인근 어린이마을까지 오기 위해 버스 타고, 지하철 타고 오느라 얼마나 춥고 힘들까요. 오갈 곳 없는 다문화 아이들의 보석 같은 눈망울이 안타까워 이런저런 도움으로 가까스로 마을을 꾸렸지만 부족한 것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그래도 아이들은 행복한 표정입니다. 씩씩한 목소리로 "오늘도 우리에게 양식을 주시고…", 천사의 웃음을 환하게 퍼트리며, 누추한 잠자리에서도 행복한 꿈을 꾸고, 여럿이 어울려 책을 읽는 다문화 아이들이 더 행복해질 때까지, 더 편안해질 때까지, 더 씩씩해질 때까지 수고를 다해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렇게 될 것이라고 믿는 어린이마을에 해가 저물었습니다.

어린이마을 수업이 끝났습니다. 엄마아빠를 기다리는 동안 사진을 찍자고 했더니 재밌는 표정을 취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린이마을 수업이 끝났습니다. 엄마아빠를 기다리는 동안 사진을 찍자고 했더니 재밌는 표정을 취하는 것이었습니다.
ⓒ 조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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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다문화, #어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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