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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는 한때 역사의 주역이었다. 모르는 사람도 많지만 한 번쯤은 역사의 주역이었다. 스페인과의 70년 전쟁에 승리한 후, 네덜란드는 17세기 해상무역을 장악했고 한동안 암스테르담 및 로테르담은 유럽 최대의 항구로 전성기를 누렸다. 이같은 사실을 잘 분석한 책으로 지오반니 아리기의 <장기 20세기>라는 책이 있다. 뭐 어렵고 복잡하긴 하지만 분석이 흥미롭다. (최근, 전문가 백승욱 선생님의 번역판이 나왔다. 3만5000원. 가격이 압박이지만 훌륭하다는 평가다.)

결론만 말하자면 세계 헤게모니의 흐름이 지중해에서 네덜란드로, 네덜란드에서 영국으로, 영국에서 미국으로 옮겨갔다는 분석이다. 처음은 실질 해상무역을 통해 자본을 축적하고 이후 실물경제가 금융화로 옮겨가면서 점점 경제가 쇠퇴하고 결국 다음 세력에 헤게모니를 넘겨주게 된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17세기 네덜란드가 실질적으로 첫 헤게모니를 쥐게 된 국가로 제시된다.

네덜란드처럼 작고 척박한 나라가 어떻게 세계적으로 경쟁력 국가로 발돋움하게 되었는지가 뭔가 롤모델로서의 네덜란드의 환상을 키우는 듯하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땅에 먹을 게 없고, 허구헌날 바닷물이 쏟아져 들어오니, 살기 위해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는 해석도 가능한 거다. 어쨌든 그렇게 처음으로 식민지 개념 및 해상무역의 중요성을 깨달은 네덜란드는 17세기 주역으로 성장했다.

사실 그 이전에 네덜란드는 통합된 국가가 아닌 여러 개의 주가 모여 만들어진 연합체였다. 하지만 스페인과의 70년 전쟁을 겪으면서, 이 연합체 공화국은 점점 통일된 세력을 필요로 하게 된다. 결국 이 전쟁에서 큰 역할을 한 "오랑쥐 (Orage)" 가문을 왕족으로 추대하면서 세계에서 유일하게 공화국에서 왕국으로 변모한 국가가 된다.

네덜란드는 이 17세기의 추억을 먹고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네덜란드의 수많은 박물관, 미술관의 모든 모토는 "17세기" 네덜란드 명품 화가 컬렉션이 최고란 것이다. (여기는 참 신기한게, 국립박물관 컬렉션이 대부분 그림이었다) 한국 박물관을 비교하여 생각해보면 신기함이 배가 된다. 처음 들어가면 구석기나 신석기 시대에 있었던 돌칼 및 항아리 조각들이 나오고, 그 다음, 삼국시대에서의 유물들이 나오고, 고려, 조선 시대로 넘어가는게 일반적이지 않은가? 그러면서 한국의 문명은 이렇게 옛날부터 시작됐다는 설명을 하며 역사가 오래된 점에 초점을 둔다.

네덜란드 국립박물관인 라이스박물관(Rijksmuseum)은 이런 내용이 전혀 없다. 들어가면 눈앞에 보이는 그림은 스페인과의 70년 전쟁을 축하하는 단체 초상화이다. 가운데에 승리의 주역이었던 한 남성이 거만하게 술잔을 들고 있고, 주변 사람들 모두 기쁨에 가득 차 있다. 그 외에 전쟁의 현실을 묘사한 배 그림, 배 모형, 갑옷, 초상화, 오렌지 공의 관 등 역사의 시작이 애초에 17세기인 점이 새롭다.

박물관에서 한 칸 더 안으로 들어가면 더 이들의 정신적 배경이 어디인지를 알게 된다. 갑자기 열대 나무들과 동양인들이 나오면서, 식민통치 대상이었던 인도네시아 등에 관한 그림들이 나온다. 그리고 이국적인 새, 배경들을 그려 넣으면서 - 이국적인 새 등은 이런 걸 얻을 수 있었던 국가의 능력을 상징한다 - 그야말로 세계적으로 명성을 퍼뜨렸던 자신들의 과거를, 식민지를 추억하는 것이다.

17세기 유명한 네덜란드 미술도 대부분 이런 사회경제적 조건과 연관되어 설명된다. 유명하고 잘 사는 상인들이 많이 생기고, 이들이 적극적으로 화가들을 지원한다. 초상화 그림 설명이 대부분 이런 거다, 얘네는 비싼 옷을 입고 있고, 화려한 장신구를 하고 있고, 이게 그들의 명성과 부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이런 내용. 피렌체에서 미켈란젤로가 그랬듯이, 여기서 렘브란트가, 반 다이크가, 야콥이 그런 취급을 받는다.

렘브란트는 생전에도 명성을 얻은 행복한 화가였다. 말년에는 집 팔고 쫓겨나긴 했다지만, 어쨌든 대충 잘 살아서 후학도 키우고 그랬단다. 이 사람을 비롯하여 여러 사람들이 참 초상화를 많이 그리는데, 실제로 보면 아, 정말, 엘레강스하다. 얘네가 정말 잘 살았구나, 그래서 저런 그림을 그렸구나가 와닿는다. 이런 엘레강스 화가들에 비해보면, 엉뚱하게 우리의 불멸의 화가 반고흐님이 이러니까 그림을 못 팔았지, 이런 생각까지 든다고 해야 할까.

렘브란트의 그늘에서 조명받지 못하다 최근에 조명받고 있다고 한다. 역시 대형 상인들의 후원 아래 작품을 그렸다. 아주 엘레강스하다.
▲ Jacob Backer (1608/9 ~ 1651)의 그림 (렘브란트 하우스 특별전시) 렘브란트의 그늘에서 조명받지 못하다 최근에 조명받고 있다고 한다. 역시 대형 상인들의 후원 아래 작품을 그렸다. 아주 엘레강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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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이러한 화려한 17세기 역사를 뛰어넘은 이후는 어떤가. 영국과의 전쟁에서 대패하고 해상무역의 헤게모니를 넘겨주면서, 기록이 없다. 최소한 박물관과 미술관에는 없었다. 나는 이후의 기록을 "네덜란드 저항기념관 (Dutch Resistence Museum)"에 가서야 찾을 수 있었다. 참고로 말하지만, 여기 아무도 관광하러 가지 않는다. 난 영 갈 곳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한 번 가봤다. 물론 20세기 네덜란드가 나치의 침략에 어떻게 대응했는지가 궁금하기도 했다. 이 기념관은 1940년 나치의 침략 이후부터 1945년 전쟁이 끝날 때까지의 기록을 남겨두고 있다.

네덜란드가 경제적으로 잘 살고, 좌와 우가 균형을 맞추고, 지적으로 풍족하다는 사실을 이 기념관에서 깨달을 수 있었다. 기념관 구조가 우선 흥미로운데, 이름이야 저항기념관이지만, 사실은 생활사를 강조한다고 해야할까. 부끄러운 기록까지 남겨두는 센스를 보이고 있다. 기념관은 넓은 전시코스 하나와, 그 전시코스에 나뭇가지처럼 뻗은 다양한 세션들로 구성되어 있다.

기념관의 입구에, 대부분의 네덜란드인들은 넓은 전시코스에 진열된 것처럼 살았으며, '소수의' 사람만이 (나뭇가지처럼 뻗은 세션에 진열된 것처럼) 저항했다는 것을 염두에 두라며 강조해주고 있다. 유관순 '누나'가 (유관순님 노래에 왜 누나라고 되어있는지) 독립운동하다 옥사했다고 전국의 여고생들이 투쟁하다 죽은 것처럼 서술하는 한국식 역사 서술과 비견된다. 사실은 협력해서 먹고 산 사람도 있기는 있다고 글 썼다가, 역적으로 몰아붙이는 '전통'과도 대조된다고 본다.

전시관은 온갖 시청각 자료를 잘 동원하여 구성되어 있지만, 아쉽게도 신문자료 및 라디오 자료는 거의 다 네덜란드어로 되어 있기 때문에, 전시판에 붙은 영어 설명으로만 사실관계를 확인할 수 있었다. 재밌는 건 시작하기 전 배경설명에 나오는 설명들이다. 네덜란드가 나치가 침략하기 전 어떤 정신적 상태를 갖고 있었는지를 거의 세 줄 요약으로 정리해주는데, 첫째, 우리는 식민지 지배경험이 있었던 강대한 국가다, 둘째, 세계적 오케스트라가 있는(네덜란드 로얄 오케스트라는 아직도 세계 최고라고 한다) 예술을 중시하는 국가다, 셋째, 세계적 항공사(KLM)를 보유하고 있는 기술적 능력이 있는 국가다, 이 세 가지다.

따지고 보면 다 17세기의 영광에 기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약간 오버해서 말하면, 이제 와서, 나 신라 왕족의 후예야 라고 주장하는 기분이랠까. 어디나 그렇겠지만 나라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항목은 자기네들의 경제적 우월성과 식민지 지배를 할 수 있는 폭력적 기반이 있을만한 나라였다는 점이다.

그래서, 내용은 어떤가? 네덜란드는 암스테르담과 나라 최고의 도시 타이틀을 두고 경쟁해온 로테르담이 폭격으로 무너지면서 나치에 항복을 선언한다. 전쟁이 임박했고, 나치가 접근했고, 이런 위기에 대한 역사 서술이 나열을 이루고 그 다음 어? 정복됐네, 이런 다음 바로 다음 나온 장면은 일상으로의 복귀, 이다. 폭격으로 무너진 건물과 그 앞에서 다시 일상을 시작하는 암스테르담 시민들의 사진은 뭐랠까, 현실적이면서 좀 잔인했다.

나치에 항복을 선언하면서 왕족은 영국으로 피난 갔고, 나머지 행정부는 "최대한 국민을 위해 일한다"라는 원칙이 있다면서, 나치의 지배에 순응하고, 국민의 편의를 도모한다며, 일상생활에 충실한다. 나치는 애초에 네덜란드를 식민지로 취급하기보다 형제애를 강조하며 나치 이데올로기 하에 흡수하려는 태도를 보이면서, 사회복지를 위한 제스쳐도 취한다. 겨울에 빈민자를 구제하는 정책을 편다거나 이런. 징병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나치가 네덜란드를 지배하면서 생긴 가장 큰 차이는 바로 유대인 정책이다. 유대인 정책을 알면 알수록, 들으면 들을수록 너무 끔찍하다. 나치는 네덜란드 공무원들에게 조상 핏줄이 적힌 목록을 제출하라고 하고, 실제로 공무원들은 제출한다! 이후 유대계 공무원들은 단체로 직장에서 잘리고, 결국 독일 아우슈비츠로 유배되고, 70%가 죽는다. 우리가 가장 많이 아는, 가장 유명한 '안네 프랑크'는 네덜란드에 살던 유대인이다. (난 독일인 줄 알았다.) 안네 프랑크는 나치의 세력이 강해질 때, 집 책장 뒤 비밀 문을 설치하고 안으로 숨었다. 여기서 그런 사례가 안네 프랑크뿐만 아니라, 따로 많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유대인 수를 표시한 암스테르담 지도. 동쪽에 많이 몰려있다. 이 기념관 역시 암스테르담 동쪽에 위치해있다. 핏줄 등록을 통해 표시된 지도다. 이 기념관 외에도 유대인이 독일로 이송되기 전 대기하던 장소도 기념관으로 보존되고 있는데, 이 곳 역시 동쪽에 위치해있다. 원래는 유대인들이 자주 가던 극장이었다고 한다.
▲ 네덜란드 저항기념관 유대인 수를 표시한 암스테르담 지도. 동쪽에 많이 몰려있다. 이 기념관 역시 암스테르담 동쪽에 위치해있다. 핏줄 등록을 통해 표시된 지도다. 이 기념관 외에도 유대인이 독일로 이송되기 전 대기하던 장소도 기념관으로 보존되고 있는데, 이 곳 역시 동쪽에 위치해있다. 원래는 유대인들이 자주 가던 극장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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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로 유배되면서 인사하는 장면을 찍은 동영상이다. 인사하는 모습이 여행가는 것 같다. 미래를 예측하지 못한걸까.
▲ 네덜란드 저항기념관 독일로 유배되면서 인사하는 장면을 찍은 동영상이다. 인사하는 모습이 여행가는 것 같다. 미래를 예측하지 못한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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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는 건, 나치 지배에 순응하는 네덜란드인들도 똑같이 학살에 일조했다는 것, 그 역사를 인정했다는 것, 두 가지이다. 아무리 나치에 반대하는 연합에 많이 가입했다고 해서, 나치가 싫다고 암호로 집 앞에 "나치가 싫어요"라고 썼다고 해서, 그 혐의가 벗겨지지 않는다. 유대계 공무원 등록과 같은 행정적 접근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누구든 이 정책이 나치의 유대포비아에서 비롯되었단 사실은 예측할 수 있었을 거다. 주변의 협조가 아니었으면 이처럼 대량 유대인 등록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안네 프랑크도 결국 이웃의 배신으로 적발되었고, 아우슈비츠로 보내졌다. 집 안에 숨어지내는게 집만 있다고 가능한 것이 아니다. 먹고 살 식량을 보내줘야 하고, 그 외의 생필품들을 공급해줄 공모자가 있어야만 가능하다. 평소 아는 사람에게 이러한 원조를 부탁하기 마련인데, 실제 생활하다보면 이 비밀을 담보로 자신에게 더 수당을 높여달라는 비열한 거래를 강요한 네덜란드인도 있었다고 한다. 그건 좀 슬프다.

그 유명한 '다비드의 별'이다. 유대인들은 강제적으로 이 표식을 옷에 붙여야 했다.
▲ 네덜란드 저항기념관 그 유명한 '다비드의 별'이다. 유대인들은 강제적으로 이 표식을 옷에 붙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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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는 2차대전 막바지에 위기에 몰리면서 폭력 정책을 과도하게 실행했고, 그 결과는 네덜란드에도 마찬가지였다. 과도한 사살 및 정치범 투옥, 언론 탄압이 진행되었고, 그에 반항한 기록들이 있다. 어떤 여성 운동가가 나치의 모 주요인물을 사살했다고 주변 민간인을 단체로 사살했다는 기록 역시 2차대전에서의 식민지배가 어디든 비슷한 양상을 띠고 있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독일이 전쟁에 패배한 뒤, 독일군이 네덜란드에서 물자를 빼가는 것을 막기 위해, 왕족이 철도직원들에게 단체 파업을 명령했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독일군들은 자기네 기차로 결국 집에 다 갔고, 정작 들어와야 할 물품들이 움직이지 못한 탓에 네덜란드 주민들은 가스도, 음식도 없어 추운 겨울을 보내야 했고, 기아로 죽기도 했단다. 하여간 지배층이 자기 생각만 하는 성격은 '보편적'이다.

비록 5년 남짓한, 짧다면 짧은, 지배 기간이었지만 그 쿨한 역사 기록의 여유는 부럽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물론 중간중간,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나치를 싫어하고 투쟁했어요, 라고 말하고 싶어하는 부분들이 분명 있지만, 이 정도면 어딜까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사실 안네 프랑크 기념관의 경우, 나치의 비극적 억압 및 감수성 풍부한 소녀의 '자유'를 짓밟은 현실에 분개하는 기분이라 그냥 그랬다. (아 그렇지만, 안네의 아버지가 실제로 인터뷰하면서, "부모는 실제로 아이에 대해 아는게 많지 않다"라고 말하는 부분은 눈물이 글썽했다. 안네 집안에서 아버지만 살아남았다.)

그렇게 나의 역사투어는 일단락되었다. 과거의 영광으로 국가의 정체성을 구성하던 네덜란드의 사고방식은 나치의 지배로 상처를 입었다. 역사기록의 초점은 여전히 17세기 전성기에 맞추어져있지만, 네덜란드의 이미지는 '개방' 및 '일탈'로 변화에 성공했다. 이에 대한 얘기는 다음에 또 할 기회가 있을 것 같다.

전쟁이 끝난 후, 나치에 협력했는지를 묻는 질문들이다. 나치에 협력했는가? 저항했는가? 단체에 가입했는가? 이런 류의 질문을 묻고 있다.
▲ 네덜란드 저항기념관 전쟁이 끝난 후, 나치에 협력했는지를 묻는 질문들이다. 나치에 협력했는가? 저항했는가? 단체에 가입했는가? 이런 류의 질문을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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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네덜란드, #역사, #나치지배, #17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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