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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밤에 아기가 자꾸 낑낑거리며 얼굴을 긁으려 해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옆에서 손을 붙잡느라 애먹습니다. 아기가 얼굴이 간지럽다고 한다면 밤에라도 닦아 주어야겠다 싶어 나무숯물을 조금 탄 물로 귓등까지 얼굴 구석구석 닦은 다음, 엽록소물로 넓게 문지릅니다. 아기는 비로소 간지러움이 가라앉은 듯 새근새근 잡니다. 잠든 아기를 보고 나서 아기 아빠는 새벽나절 기저귀를 빱니다. 빨래를 하는 김에 방에는 불을 넣습니다. 기저귀 아홉 장과 반바지 한 벌과 아기 모자 하나를 빨고 시계를 보니 네 시 반. 밀린 글을 부랴부랴 쓰고 있자니 아기가 다시 낑낑대며 꼼지락꼼지락. 다시 한 번 얼굴을 닦고 엽록소물을 바릅니다. 다섯 시 반. 그러고 나서 다시 한 시간이 지난 여섯 시 반에 또 낑낑 꼼지락. 이번에는 얼굴닦기는 그만두고 아기 한쪽 팔에 고리를 끼웁니다. 빈 페트병을 잘라서 아기 팔에 꼭 끼도록 만든 고리입니다.

 

 겨우 한숨을 돌리며 책상 앞에 앉습니다. 밤에 몇 시간이나 제대로 잤는가 싶어 하품과 눈물이 끊임없이 나오지만, 잠자리에 다시 눕기 두렵습니다. 아기가 아침에 일어나 놀아 달라고 하면 다른 일은 거의 할 수 없기 때문에, 이렇게 아기가 잠들어 준 뒤에 눈 비비면서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 아기가 앞으로 무럭무럭 자라나면서 저희 아빠 엄마가 잠 못 이루고 너를 돌보느라 얼마나 눈이 빠진 줄 알까 궁금하지만, 조금 더 생각하면 저를 낳아 기른 어머니 아버지도 이와 마찬가지였으리라 생각합니다. 돌고 도는 아이 키우기이고, 돌고 도는 삶입니다. 다만, 우리 아기네 아빠는 사진찍기를 하는 사람이라서 '아빠가 아기 키우는 모습'은 따로 담지 못하지만, '엄마가 아기 키우는 모습'은 차곡차곡 담깁니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모습이 사진으로 담기고, 한 달 두 달 무럭무럭 크는 모습이 사진으로 남습니다.

 

 흔히들, 아기가 귀여워서 찍는다고 말하는데, 저 또한 우리 아기가 안 귀여울 수는 없습니다만, 아기가 귀엽다고 찍지는 않습니다. 그저 아기이기 때문에 찍을 뿐입니다. 아기이니 아기 모습을 담고, 우리 아이니 우리 아이 모습을 담습니다. 우리 옆지기이니 옆지기가 아기와 함께 지내는 모습을 담고, 우리가 사는 집을 바탕으로, 또 우리가 살고 나들이 다니는 동네를 함께 나오도록 담습니다.

 

 

 지금 사는 집에서 앞으로 며칠이나, 또는 몇 달이나, 또는 몇 해나 더 살아갈 수 있을지는 모릅니다. 하루아침에 헐릴 일이야 없겠지만, '도시정화'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온갖 재개발 바람은, 우리 같은 사람들 삶터는 그예 콧방귀입니다. 거들떠보지 않아요. 낮나절, 아기를 안고 생협에 나들이를 다녀오면서 "아기야, 이제 몇 해 뒤면 다 없어져 버릴 모습일지 모르니, 잘 봐 두렴." 하고 이야기했습니다. 아기가 이 말을 알아듣는지 못 알아듣는지 참 모르는 일인데, 아무튼 아기는 저를 안고 돌아다니면 두 눈 말똥말똥 뜨고 두리번두리번 살펴봅니다. 이 골목길 골목집 골목이웃이 아기 눈과 머리와 가슴과 몸에 어떻게 새겨질는지 모르지만, 아기는 아기대로 잘 받아먹는다고 느낍니다. 어쨌든 아기한테는 아기 몫으로 주어진 삶이 있습니다.

 

 혼자 마실을 다닐 때, 그러다가 둘이 마실을 다닐 때, 그러다가 아기를 안고 마실을 다닐 때, 사진찍기가 크게 다릅니다. 혼자 마실을 다닐 때에는 홀가분한 몸이니, 으레 조리개값을 무한대로 놓고 셔터빠르기를 1/15초니 1/30초니 맞추곤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삶터는 어마어마한 환경오염 때문에 환하고 맑은 날에도 '감도 100, 조리개 무한대'로 놓았을 때 셔터빠르기가 제대로 안 나오기 일쑤입니다. 골목길 안쪽이 조금 어둡다고 하지만 모든 곳이 다 어둡지 않기에, 적어도 1/60초나 1/90초는 나와야 하는데, 이렇게 나오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눈 내린 낮에도 이만큼 나오기 힘듭니다.

 

 그런데 혼자 다니며 벽에 기대기고 하고 쪼그려 앉기도 하며 1/15초나 1/20초로 찍었던 사진이 살짝살짝 흔들려 있곤 했습니다. 찍을 때에는 거의 못 느꼈지만, 집으로 돌아와 셈틀로 사진파일을 꼼꼼히 들여다보면 아주 살짝 흔들린 느낌이 잡혀서 '이런 젠장, 다시 찍어야 하네.' 하는 말이 절로 나오곤 합니다. 둘이 다니며 사진찍기를 할 때에는 혼자 한곳에 오래 머물며 찍을 수 없는 노릇이라, 조리개를 좀 덜 열고 셔터빠르기를 더 높였는데, 마음이 바쁜 채로 찍은 탓인지 셔터빠르기를 높였음에도 손떨림을 느끼게 됩니다.

 

 

 좋은 사진이란 손떨림 하나 없는 사진이지는 않습니다. 손떨림이 있어도 좋은 사진은 많습니다. 그러나 제 마음에는 손떨림 사진을 보아주기 어렵습니다. 그야말로 기막히게 훌륭하다 싶은 모습을 담았으면 조금 봐주지만, 이런 모습이라 하여도 손떨림이 없는 가운데 훌륭하게 찍어야 마음에 찹니다.

 

 제 사진찍기는, '내가 아닌 남이 보아도 참으로 훌륭한 모습'이라는 소리를 들었어도, 이 '훌륭하다는 모습'을 다시금 찍는 매무새로 꾸려 나갑니다. 두 번 찍고 세 번 찍고 열 번 백 번을 새로 찍습니다. 제 사진찍기가 '다큐 사진'이라고들 말씀을 하지만, 저는 다큐멘터리 사진이라기보다 '삶 사진'이라서, 어제 찍은 모습은 어제 모습이고 오늘 찍는 모습은 오늘 모습입니다. 훌륭하게 나왔다는 사진은 그저 어느 한날 어느 한자리 모습일 뿐 더도 덜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그 자리에 다시 가고 그 사람을 다시 만나며 그때와 그 느낌을 다시 떠올리고 살펴봅니다.

 

골목길을 봄 여름 가을 겨울로 담았어도 비온 날과 눈온 날과 안개 낀 날을 다시 담습니다. 흐린 날과 맑은 날과 갠 날을 다시 담고, 새벽과 아침과 낮과 저녁과 밤을 다시 담습니다. 이런 사진을 서로서로 겹치기로 놓고 본다면, '봄날 새벽 안개 낀 골목'이 있고, '여름날 비오고 환하게 갠 때 골목'이 있으며, '가을날 아침 뿌연 먼지가 가득한 골목'이 있으며, '겨울날 하늘에 별이 보이는 맑은 골목'이 있습니다. 한 곳에서 사진을 찍어도 수십 수백 가지 모습이 새삼스럽게 태어납니다. 아니, 제 눈에는 수십 수백 가지 다 다른 모습이 보이고, 제 머리에는 수십 수백 가지 다 다른 모습을 차근차근 서두르지 말면서 찍자는 생각이 깃듭니다.

 

 

 요사이, 아기 안고 다니며서 사진을 찍을 때에는 셔터빠르기를 아주 높입니다. 이러다 보니 조리개는 f5.6이나 f4.0으로만 열어 놓을 때가 늘어나고(더 낮추고 싶어도 값싼 렌즈로는 f4.0이 끝이라), 셔터빠르기는 1/125초나 1/250초라든지 1/400초로 맞출 때도 있습니다. 십 킬로그램쯤 나가는 아기를 한손으로 안으면서 몸이 덜덜 떨리고 다리가 후들거리는데, 이런 몸으로 사진기를 들고 있으니, '몸이 세발이와 같다'고 할지라도 손떨림이 안 나오기 어렵습니다. 아기가 '아빠 뭐 혀? 어서 갈 길을 가라구?' 하면서 꿈틀꿈틀이니 '그래 그래 얼른 찍을게.' 하면서 셔터빠르기를 높이게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셔터빠르기를 높여도 자잘하게 흔들리기도 합니다.

 

 집으로 돌아와 사진을 만지면서 히유 한숨이 나오며 또다시 '이런, 젠장, 이 사진 안 되겠네.' 싶은데, 어쩔 수 없는 노릇입니다. 더 나은 장비를 못 쓰는 한숨이나 푸념보다는, 좀더 홀가분하게 사진을 찍을 수 없는 아쉬움과 안타까움보다는, 내 삶과 내 사진찍기 그대로 '아기와 함께 나들이를 다니면서 사진찍기를 할 때'에는 앞으로 아주 달라지거나 새로워져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눈길을 가다듬고 손길을 추스르며 매무새를 고쳐야겠다고 생각합니다.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아기를 한쪽 무릎에 살며시 얹은 다음 등과 팔을 벽에 붙여 되도록 손떨림이 없도록 하면서 찍든지, 등과 몸을 벽에 찰싹 붙이면서 사진을 찍든지, 그때그때 가장 알맞춤한 매무새를 알아보면서 찍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제 주제대로 사진을 찍어야지, 제 주제를 잊고 여느 사진쟁이와 마찬가지로 찍으려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가진 장비로 가장 흐뭇할 만한 사진을 생각해야지, 저한테 없는 장비로 이곳을 찍으면 어떻게 나올 텐데, 하고 생각할 까닭이 없다고 다짐합니다. 이런 다짐은 화각 좁은 값싼 장비를 쓰는 슬픔에 자주자주 젖어들어 흔들리지만, '이 녀석아, 그런 생각이 들면 어떻게 해서는 돈을 더 벌어 새로운 장비를 마련하든가. 그리 하지 못하겠다면, 이 장비로 네 나름대로 새로운 화각을 만들든가.' 하고 눈물을 곱씹고 다시 다짐을 하면서 주먹을 불끈 쥡니다.

 

 

 언뜻 보기에는 '멈춰 있을 뿐이라 구태여 손떨림이 나올 까닭이 없다고 여길 수 있는 골목길 사진'입니다만, 바람에 나부끼는 빨래를 찍거나, 빛이 안 들어와 아주 어두운 대문간 사자고리나 이름패를 찍거나, 추운 겨울 새벽 눈길을 누비며 언손으로 골목꽃과 골목나무를 찍을 때면, 제아무리 셔터빠르기를 높여도 손떨림이 나오게 됩니다. 그렇다고 세발이를 들고 다닐 수 없습니다. 한 번 골목마실을 하면서 사진찍기를 할 때면 몇 시간이고 걸어다녀야 하는데 무거운 세발이는 더욱 무겁기도 하지만 아기 안는 다른 손은 사진기를 쥐어야 하니 세발이를 못 씁니다. 그때그때 빛흐름과 사람흐름을 잡아채야 하니 세발이를 세우고 수평을 맞추고 할 겨를이 없습니다. 그저 몸에 맡기고 벽에 맡기고 땅바닥에 맡길 뿐입니다.

 

 엊저녁, 지난 며칠 동안 찍은 사진을 갈무리하면서 새삼 또다시 다짐을 합니다. 이제부터는 조리개를 덜 열 수밖에 없어 뒷모습이 많이 날아가게 되더라도 셔터빠르기를 좀더 높여야겠다고. 낮은 셔터빠르기로 사진을 찍으며 '어둡고 힘든 데에서도 용케 찍어내는 훈련'을 앞으로도 이어나갈 수 있지만, 다닐 수 있을 때 한 걸음이라도 더 다니면서 한 번이라도 더 골목을 쏘다니도록 하자고. 헌책방 나들이를 하면서도 책시렁 한 번 더 둘러보도록 하자고. 멋진 사진이나 훌륭한 사진이나 재미난 사진이 아닌, 그날그날 이곳저곳 이 사람 저 사람 삶자락을 꾸밈없이 담아내도록 하는 데에 가장 깊이 마음을 쏟아야 할 사진이니까. 이제는 한 번 놓친 모습을 되찍으려 다시 찾아가기가 힘드니까.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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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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