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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가 1380년(고려 우왕 6) 남원 황산에서 왜적을 무찌르고 선조가 살았던 종친들을 모아 잔치를 베푼 오목대
 이성계가 1380년(고려 우왕 6) 남원 황산에서 왜적을 무찌르고 선조가 살았던 종친들을 모아 잔치를 베푼 오목대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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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잘 때를 제외하곤 영어로 생활하며 연수에 여념이 없던 전라남도 중등 영어 26기 연수생과 스탭들을 포함한 150여명은 잠시 머리도 식히고 한국문화를 영어로 소개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기 위해 전주 한옥 마을을 방문했다. 

한옥마을은 1930년을 전후해 일본인들이 전주시 중앙동 일대에 진출하자 일인들에 대한 반발로 교동과 풍남동 일대에서 형성되기 시작했다. 공업단지를 짓고 커다란 빌딩과 높은 아파트를 짓는 것도 중요하지만 고장의 전통과 역사를 지키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전주시가 1977년 4월 건설부 장관의 허락을 받아 한옥 보존지구를 지정한 이유이다.

오목대는 이성계가 남원 황산에서 왜적을 무찌르고 돌아가던 중 자신의 선조가 살았던 이곳에 들러 여러 종친들을 모아 잔치를 베푼 곳이다. 오목대에 올라 사방을 바라보면 그 언저리에 무리를 지어 들어선 한옥들의 까만 기와지붕이 고풍스런 아름다움을 전해준다. 

전주 이씨의 시조인 이한은 신라 때 사람으로 이성계의 20대 조상이다. 이성계가 조선을 세운 뒤에 여러 이씨 임금들이 건지산 기슭에 있다는 시조의 무덤을 찾았으나 실패했고 영조가 이성계의 초상화를 모시기 위해 1410년에 세워진 경기전 안에 조경묘를 세워 이한의 위패를 모셨다.

조선 태조 이성계의 어진(영정)을 봉안하기 위해 세워진 경기전의 모습은 거북이 형상을 하고 있다.  거북은 장수를 의미하고 물을 의미하기 때문에 화재를 예방하려는 뜻이 담겨있다. 

조선 태조 이성계의 어진(영정)을 봉안한 경기전의 모습으로 거북이 형상을 하고 있다.
 조선 태조 이성계의 어진(영정)을 봉안한 경기전의 모습으로 거북이 형상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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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전 입구의 하마비를 둘러보고 있는 교사들. 날씨가 몹시 춥다.
 경기전 입구의 하마비를 둘러보고 있는 교사들. 날씨가 몹시 춥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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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전 입구 하마비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있다. '지차개하마 잡인무득입(至此皆下馬 雜人毋得入)'. 태조어진을 봉안한 곳이니 이곳에 이르는 자는 계급의 높고 낮음이나 신분의 귀천을 떠나 모두 말에서 내리고, 잡인들은 출입을 금한다는 뜻이다.

'잡인(雜人)'? '잡인'이라!

절대왕조시대의 글귀이니 이해가 된다. 그런데 문득 며칠 전 차 속에서 들은 여당과 야당의 젊은 국회의원들이 벌인 한 치 양보도 없었던 치열한 라디오 토론이 생각나 피식 웃음이 났다. 토론 주제는 여당의 몇몇 의원이 제출한 복면착용금지법에 관한 찬반 토론이었다.

'가면이나 마스크 등 복면 착용을 금지하되 이를 위반할 경우엔 1년 이하의 징역이나 5백만원 이하의 벌금이나 구류 등 처벌을 할 수 있도록 한다.'

세계가 웃을 일 아닐까? 다른 나라 사람들 데모하는 모습을 보면 별별 복장으로 웃으며 자기 의사를 표현한다. '집회 참가자의 참가의 형태와 정도 복장을 자유로이 결정할 수 있다'는 헌법재판소의 2003년 결정은 어떻게 할 것인가? 아마 지금도 국민을 잡인으로 보는 것은 아닐까? 

폭력에는 가시적 폭력과 비가시적 폭력이 있다. 깡패들의 무법적 폭력도 폭력이지만 비가시적인 제도의 폭력도 있다. 제도의 폭력에는 권력가진자들의 정치적 폭력, 돈 많은 자들의 경제적 폭력, 거대 족벌언론의 문화적 폭력, 교육을 통치의 수단으로 삼는 교육의 폭력이 비가시적 폭력에 해당한다.

하마비에서 고개를 들어 몇 발짝만 더 가면 사적 제288호인 전동성당이 있다. 한국 최초 순교자의 숭고한 뜻을 받들어 세운 성당인데, 비잔틴 양식과 로마네스크 양식을 절충한 건물 형태다. 이곳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로 꼽히기도 한다.

전동성당 - 비잔틴 양식과 로마네스크 양식을 절충한 아름다운 성당으로 김수환 추기경의 서거를 알리는 현수막이 걸려있다.
 전동성당 - 비잔틴 양식과 로마네스크 양식을 절충한 아름다운 성당으로 김수환 추기경의 서거를 알리는 현수막이 걸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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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오늘이 김수환 추기경의 장례식이 있는 날이다. 독재자의 통치에 맞서 힘없는 서민들 편에서 서서 살다가 끝까지 안구를 기증하고 영면하신 분이다. 한쪽은 백성을 잡인이라고 하고 한쪽에는 백성을 하늘처럼 떠받들었던 장소가 공존한다. 참! 아이러니다. 아이러니는 또 있다. 잡인이라고 불렀던 경기전과 지배계층에 대한 신분제의 타파를 외쳤던 동학혁명기념관도 한옥마을에 있다. 
 
거리를 조금 내려가다가 묘하게 생긴 글귀에 끌려 집으로 들어갔다. "보는 서예, 읽는 그림"을 추구하는 중하 김두경의 서예문화원이었다. 그의 서예 작품은 문자의 뜻을 모르고 보더라도 쉽게 서예의 그림 같은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대학에서 중국어를 전공했다는 그에게 문자를 어떻게 디자인하는 가를 들었다.

김두경씨가 운영하는 '문자향'으로 김지하 시인의 시가 적혀있다. "밥은 하늘입니다. 하늘은 혼자 차지하지 않듯 밥은 함께 나눠서 먹어야 하는 것. 별을 함께 보듯이 밥은 함께 먹어야 하는 것 입니다"라는 글귀가 보인다.
 김두경씨가 운영하는 '문자향'으로 김지하 시인의 시가 적혀있다. "밥은 하늘입니다. 하늘은 혼자 차지하지 않듯 밥은 함께 나눠서 먹어야 하는 것. 별을 함께 보듯이 밥은 함께 먹어야 하는 것 입니다"라는 글귀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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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한지를 만들고 있다.
 전통한지를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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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는 고대에 사물을 간단히 나타내는 형태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글자에 표정을 주는 것이라고 봐야죠. 글자를 형상화할 때는 첫째 획에 주안점을 둡니다. 둘째, 살아있는 생명체의 표정을 이미지화합니다. 여기는 일종의 선비문화 체험관입니다. 진정한 선비는 고리타분한 것처럼 보이지만 자기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닌 이타적인 삶을 살아온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전통한지 체험관에 들렀다. 닥나무 재료로 만든 종이원료로 계속 물질을 하는 장인에게 장갑을 끼지 않고 일하는 이유와 기계화 문제에 대해 물었다.

"사람에 따라서 체질이 다릅니다. 하지만 종이를 건조시킬 때 한 장씩 뜯기 쉽도록 '벼개'라는 실을 집어야 하는데 장갑을 끼면 집을 수가 없어요. 아저씨 기계화가 많이 이뤄졌네요? 이일도 사양길에 접어들고 힘이 들어서 배우려는 사람이 없어요. 옛날에는 손으로 다 했지만 이 정도가 기계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것입니다. 더 이상 기계화가 이뤄지면 '한지'가 아니라 '양지'죠."

예원예술대 한지문화연구소에서 운영하는 지담을 방문했다. '지담'은 '종이 이야기'라는 의미다. 지담에서는 한지 등 공예체험과 관광객 특별 체험 코스 운영, 한지 조명등 전시 및 판매, 한지 디자인 상품 등으로 한지를 산업적이고 대중적 공간으로 이끌어내는 작업을 하고 있다. 작년 8월에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관저 게스트룸과 UN 한국 대표부를 한국의 전통종이인 전주 한지를 활용해 공간을 연출했다. 

자연친화적인 소재의 상품개발은 물질문명 속에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끝없는 과제이다. 한지천은 환경을 오염시키지 않으며 아토피 등의 질병으로부터 자유로운 인체에 무해한 소재로 개발됐다. 또한 통기성과 보온성이 탁월하고 대량생산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한지를 가공 처리하여 일반섬유화한 넥타이는 실크 40%, 한지사 60%를 혼합하여 만든다. 찢어지고 물에 들어가면 녹아버리지 않느냐는 물음에 그러면 상품화가 불가능하다고 대답한 담당자는 다만 처리과정 때문에 일반 원단보다 비싼 게 흠이란다.  

한지로 만든 벽걸이 장식들과 넥타이 옷 등의 공예품들이 전시돼 있다. 오른쪽 벽에는 반기문 총장 사진이 걸려 있다.
 한지로 만든 벽걸이 장식들과 넥타이 옷 등의 공예품들이 전시돼 있다. 오른쪽 벽에는 반기문 총장 사진이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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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마지막 황손인 이석씨가 사는 승광재
 조선의 마지막 황손인 이석씨가 사는 승광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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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마지막 황손인 이석씨가 머물고 있는 승광재에 들렀다. 조선 왕조의 역사를 직접 체험할 수 있는 민박시설 속에서 궁중다례를 직접 체험하고 황손으로부터 황실 이야기를 듣고 싶었지만 출타 중이었다.

출입구 쪽에서 기거하는 방을 바라보니 처마 밑에 왕손임을 증명하는 여러 장의 흑백사진이 걸려있다. 사진을 찍으려는 데 처마 밑 풍경 아래 고기가 자꾸 눈에 거슬린다. 고기는 낮이나 밤이나, 또는 죽었을 때도 눈을 뜨고 있기 때문에 항상 깨어있으라는 의미다.  어쩌다 일본한테 나라를 빼앗기고 여기까지 내려와서 살꼬. 진작 깨어있었더라면….

전주천에 흐르는 물을 끌어들여 도로주변에 실개천을 만들고 로마처럼 조그맣게 깬 돌을 깔아 만든 은행로는 전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다. 한옥과 물레방아와 정자, 나무가 어우러진 시골의 옛 추억을 되살려 주는 길이다. 시간이 있어 '이름없는 카페'라는 곳에서 커피를 시켰다. 마음씨 좋고 예쁘게 생긴 주인아주머니와 대화를 나눴다.

대도시에 실개천이 흐르고 물레방아와 정자가 있는 아름다운 은행로
 대도시에 실개천이 흐르고 물레방아와 정자가 있는 아름다운 은행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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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좋아해 작품 전시를 하기도 한다는 그녀는 거리 분위기가 좋아 여기서 가게를 열었는데 일부 시민들이 물이 깨끗하지 않다며 탐탁해 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시속 30㎞이하로 차를 제한하는 데도 과속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 시끄러울 때가 있어요. 특히 밤에 사람이 없을 때 속도를 내고 달리면 돌과 차가 내는 마찰음 때문에 2층에서는 잠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다만 흐르는 물소리는 자장가처럼 들려 좋기도 하지만요."

삶의 질은 뭘까?

대전에 갈 일이 있어 전주역으로 갔다. 역사 앞에 걸린 현수막이 눈에 거슬린다.

"정동진 해돋이 보go~ 울릉도 가go~" 웃자고 한 걸로 이해는 하는데 불특정 다수가 보는 공공장소의 표현들은 신중해야 한다. 외국인들이 웃을까? 영어를 모르는 할머니 할아버지는 어떻게 받아들일까? 어린이들은 백지에 그림을 그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국어와 영어는 저렇게 혼용해도 되는 구나"하고 당연시 하지 않을까?

전주역사에 걸려 있는 현수막.
 전주역사에 걸려 있는 현수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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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수많은 나라들은 민족마다 고유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그 토대 위에서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고 계승해 오고 있다. 외래문화를 수용해야 할 때 일수록 민족 문화유산에 대한 주체의식은 강조되어야 한다. 어디나 마찬가지겠지만 고유문화를 강조한 전주에서 저런 현수막은 좀 더 신중해야 한다.

덧붙이는 글 | 남해안신문에도 송고합니다



태그:#한옥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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