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1.

가톨릭이라는 종교를 넘어서 한국 사회의 큰 어른이었던 김수환 추기경이 한국 시각으로 2월 16일 오후 6시 조금 넘어 87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가톨릭에서는 선종(善終)이라고 한다.

조문 행렬이 지금도 끊이지 않고 있다. 일반인이 조문을 하려면 2시간 넘게 기다려야 할 정도다. 전직 대통령들부터 밑바닥 인생을 사는 이들에 이르기까지 존경과 애도의 마음을 보내고 있다.

그의 삶을 돌이켜보건대, 한국 사회가 함께 슬퍼하고 그의 빈자리를 허전해하는 것은 당연하다. 박정희, 전두환의 군사 독재에 맞서 '종교인의 살아 있는 양심'을 보여줬지만, 김대중, 노무현 때는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사회적인 문제에서 보수적인 견해를 드러내 평소 존경하고 신뢰하던 사람들을 혼란스럽고 힘 빠지게 만들기도 했다. 그의 평생 행보 속에 담긴 공과(功過)의 경중을 냉정하게 따질 것은 따져야겠지만, 지금 그의 죽음을 슬퍼하고 빈자리를 아쉬워하는 모습이 그리 지나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김수환 추기경 선종 소식을 들으면서, 종교 성직자들의 죽음과 관련한 몇 가지 이야기가 떠오른다.

2.

2003년 12월 2일, 50대 중반의 어느 목사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사인은 '과로'. 목회를 얼마나 열심히 했으면 한창 나이에 과로사란 말인가. 온종일 교인들을 심방하다 저녁에 갑자기 쓰러져 병원으로 이송됐으나 10시쯤에 사망했다고 교회는 발표했고, 한국기독교총연합회는 자기네 공동회장 출신이라고 그걸 받아서 언론에 알렸다.

여기서 끝났으면 "열심히 목회하던 목사 하나 아쉽게 일찍 세상을 떴네" 하고 말 일이었다. 그러나 진실은 너무 쉽고 어이없게 드러났다. 알고 보니 과로사가 아니라 추락사였다. 나는 그의 별명이 '에어장'이라는 걸 한참 뒤에나 알았다. '에어장'은 에어컨에 매달렸다가 추락사한 장아무개 목사를 말한다.

새벽 1시경 혼자 있는 여자 교인을 만나러 오피스텔에 갔다가, 남편에 의해 간통 현장이 들킬 상황이 되자, 베란다로 빠져나가 에어컨 실외기에 10분 정도 매달렸다가, 30미터 높이에서 아래로 떨어져 죽은 것이다.

화려한 직함 덕분에 그의 죽음은 일간지에도 보도됐다. 그의 장례식장에 어떤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왔는지 모르겠다. 알 맘도 없다. 그는 이 세상에서 누릴 거 다 누리고 즐길 거 다 즐겼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사람들에게 감동과 아쉬움을 준 것이 아니라 6년이 넘도록 지금까지 조롱과 비웃음거리가 되어 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늘 찝찝한 기분을 갖고 있다. "하필이면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

목사였던 나의 아버지도 2년 동안 췌장암으로 투병하다가 2003년 12월 2일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장에서 상주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문상 온 누군가가 "장 아무개 목사도 네 아버지랑 똑같이 어제 돌아가셨다"하고 일러주었다. 그럴 듯한 기독교 단체장 직함을 주렁주렁 달고 있어서 그의 이름은 알고 있었지만, 남의 죽음에 신경 쓸 틈은 없었다.

아버지 장례식을 끝낸 뒤 나는 <뉴스앤조이>에 이런 글을 썼다.

"아버지는 끝까지 자식들을 고생시키셨습니다.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은 조문객들의 발길 때문에 저를 비롯해 상주들은 10초라도 앉아서 쉬기가 어려울 지경이었습니다. 저희들끼리는 농담처럼 "자정이 넘으면 장례식장도 문을 닫아야 한다"고 푸념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만나러 오신 한 분 한 분 얼굴을 바라보면서, 아버지께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남겨주신 감화를 다시 한번 절감했습니다."

아버지의 개인 재산은 교회를 은퇴하면서 받은 퇴직금으로 장만한 신림동 언덕 위의 아파트 한 채가 유일했다. 자동차는커녕 운전면허증도 없었다. 주머니에는 늘 버스 토큰 수십 개가 묵직하게 담겨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통장이 3개 있었다. 두 개의 통장에는 1억 4000만 원 정도의 돈이 들어 있었다. 다른 통장 한 개에는 3만 원이 들어 있었다.

두 개의 통장은 아버지가 관여하는 있는 청소년 단체를 위해 10년 넘게 꾸준히 모금해서 모은 것이었다. 어머니와 나는 그 단체 관계자들을 만나서 두 개의 통장을 고스란히 넘겨주었다. 3만 원 남은 통장은 개인 것이었다.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기 이틀 전 내 아내를 불러 당신 친손녀 생일 선물로 2만 원, 교회에 헌금하라고 1만 원을 주었다. 그렇게 통장까지 톡톡 털었다.

평생 부흥회를 인도했지만 짭짤한 수입을 챙기기보다는 갖고 있던 차비까지 다 내놓고 돌아오곤 했다. 대학 등록금이 없어서 융자를 받아야 할 때도 아버지는 신학교에 장학금을 냈다.

평생 가족들로 하여금 돈에 찌들어 살게 하더니 마지막 순간에 큰돈을 가족에게 남겼다. 장례를 다 치르고 남은 돈이 3000만 원이나 된 것이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생전 가장 사랑하던 신학교에 1000만 원을 장학금으로, 암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난 남편을 보고 덜컥 겁이 났는지 1000만 원을 다섯 자녀 부부의 건강 검진 비용으로, 나머지 1000만 원은 당신 생활비로 나눴다.

아버지 장례식에는 사람들이 많이 왔다. 유명한 김수환 추기경을 조문하려면 2시간 기다려야 했지만, 이름 없는 아버지 장례식 때도 조문하려고 30분 넘게 기다려야 할 때도 있었다. 은퇴한 지 10년이 지났기에 담임하는 교회도 없었는데 어떻게들 알고 왔는지.

그의 순수하고 청빈한 삶을 잘 아는 사람들의 안타까움의 농도는 가족 못지 않았다. 그의 마지막을 보기 위해 문상 온 사람들을 보니 그 인생이 값진 것이었음을 의심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아쉬운 것이 있다. 문상 온 이들의 대부분은 신자들이었다. 예수를 안 믿는 일반인들은 5%도 안 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마지막 순간에 만나는 사람들을 보면 그가 평생 누구와 어울려 살았는지를 알 수 있다.

아버지는 성경과 교회 외에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래서 그의 비석에는 "평생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한 사람 여기 잠들다"고 쓰여 있다. 맛이 간 형광등을 갈아 끼우는 법도 몰랐고, 라면 끓이는 법도 몰랐다. 성경 읽는 데 골몰한 나머지 교회에서 신던 슬리퍼를 그대로 신고부흥회를 인도하러 가기도 했다. 그럴 정도니 자동차 운전은 할 줄 알았겠는가.

어느 여름 개천에서 물놀이를 하다가 가족 모두 까무러친 적이 있다. 아버지가 수영을 하는 것이었다. 하모니카를 불 때는 더 놀랐다. 아버지가 할 줄 아는 게 그나마 몇 개는 있었던 거다.

형광등 갈고 라면 끓이는 거야 다른 사람이 대신하면 되는 일이다. 문제는 몰라도 너무 심하게 몰랐다는 것이다. 소소한 일상에는 무관심했고, 시대 문제에는 무지했다.

박정희 시대에 삼선 개헌을 반대했던 김재준 목사를 자유주의, 용공 신학자로 인식하고, 김 목사를 반대하고 삼선 개헌을 지지하는 데 서명했던 적이 있다. 나중에 물어 보니,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잘 몰랐고, 보수주의 기독교계 선배 거목들이 이름을 올리니 당연히 함께했다는 식으로 설명했다. 여기에 선뜻 동의하기 어려울 만큼 머리가 제법 커버린 아들과 대화하는 그 순간에도 그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교회 울타리 안에서는 존경 받고 사랑 받는 목사요 아버지였다. 하지만 그 울타리를 벗어나는 순간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어린아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니, 평생 교회 울타리를 벗어난 적조차 없다.

수백 명 교인의 생일에 일일이 생일 축하 엽서를 손으로 써서 보내주는 정성은 있었지만, 교회 바깥에 있는 사람들의 삶의 현실은 잘 몰랐다. 술 먹는 것이 죄라고만 생각했지, 술의 힘을 빌리지 않고는 도저히 견뎌낼 수 없을 것 같은 인간의 고통은 잘 몰랐다.

아버지의 죽음을 교회 안 사람들은 슬퍼하고 안타까워할지 몰라도, 교회 밖 사람들에게는 별다른 의미가 없을 수밖에 없었다. '에어장'과 똑같은 죽음이 아니어서 감사하다고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아버지 문재린 목사의 임종을 앞두고 잠시 감옥에서 나온 문익환 목사. 아들을 제대로 알아보지도 못하던 아버지는 "다시 감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얘기를 듣고는 벌떡 일어나 아들을 끌어안았다.
 아버지 문재린 목사의 임종을 앞두고 잠시 감옥에서 나온 문익환 목사. 아들을 제대로 알아보지도 못하던 아버지는 "다시 감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얘기를 듣고는 벌떡 일어나 아들을 끌어안았다.
ⓒ 사진 제공 도서출판 삼인

관련사진보기


3.

1985년 12월 29일 어느 목사가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장은 서울 수유리에 있는 한신대 강당. 그는 50대까지 북간도에서 살았기에 남한에서 연고가 그리 깊고 넓지 않았다. 게다가 그때는 연말연시였다. 그런데도 장례식장에는 1000명이 넘는 문상객이 왔고, 장지까지 동행한 이는 300명이나 되었다.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문재린 목사를 배웅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었다. 문재린 목사를 잘 모를 수는 있어도, 문익환 목사의 아버지라 하면 알 수 있겠다.

상주 문익환 목사는 당시를 이렇게 얘기했다. "특히 흐뭇했던 것은 교회와는 관계가 없는 분들이 (문상객의) 반을 넘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교회의 울타리를 깨려고 살아오신 아버님의 마음이 교회 안팎에 고루 울려 퍼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문재린 목사는 지금부터 110년 전 북간도로 올라가 명동촌을 개척한 인물들 중 한 사람이다. 4살의 어린 나이에 부모 등에 업혀서 북간도로 간 그는 정재면 선생과 김약연 목사에게 감화를 받아 목사가 되었고, 민족의 통일과 민주주의를 위해 북간도와 한반도에서 평생을 바쳤다.

자신도 네 번의 옥살이를 했지만, 자식들도 수시로 감옥에 보냈다. 1976년 3·1 구국 선언 사건으로 아들 문익환, 문동환이 옥에 갇히고, 며느리 박용길과 손자 문호근이 중앙정보부에 끌려갔을 때, "우리 집에 애국자가 넷이 있으니 흐뭇하다"고 했다. 김신묵 사모는 한술 더 떠 "두 아들이 3·1운동과 4·19 정신을 이어받아서 조국의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예언자처럼 외치다가 감옥에 들어갔으니 장한 일이다"고 했다. 그러면서 "내 아들들은 유명해서 고문도 안 받겠지만, 학생들은 불쌍해" 하면서 민주주의를 위해 피 흘리는 수많은 젊은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가며 기도했다.

문재린 목사는 죽음을 앞두고 "의정부는 지났지? 동두천도 지났지? 평양은 아직 멀었지?" 했다 한다. 1990년 9월 김신묵 사모는 손을 번쩍 들고 "통일은 다 됐어" 외치고는 눈을 감았다 한다. 이것을 그저 의식이 혼미한 상황에서 내뱉는 헛소리로 치부할 수 있을까.

문재린 목사는 한 교회의 목사가 아니라 한 시대의 목사였다. 그래서 그가 세상을 떠날 때 종교를 불문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슬퍼했다. 문재린 목사의 일생에 대해서는 회고록 <기린갑이와 고만녜의 꿈>(도서출판 삼인)에 자세히 나와 있다.

 <문익환 평전>(왼쪽)과 문재린·김신묵 부부의 회고록 <기린갑이와 고만녜의 꿈>(오른쪽)
 <문익환 평전>(왼쪽)과 문재린·김신묵 부부의 회고록 <기린갑이와 고만녜의 꿈>(오른쪽)
ⓒ 실천문학사 / 도서출판 삼인

관련사진보기


4.

1994년 1월 22일, 문익환 목사와 정일권 총리의 장례식이 같은 날 다른 곳에서 열렸다(여기까지 쓰고 보니 종교 성직자들은 특히 겨울을 조심해야 할 것 같다). 둘은 태어난 해(문익환은 1918년, 정일권은 1917년), 북간도에 있는 광명중학교라는 친일 학교를 함께 다닌 것, 하루 차이로 세상을 떠난 날이 비슷했다. 그러나 세상을 살아간 평생은 정반대였다.

정일권은 일본 육사에 들어가 수석으로 졸업하고 일본 관동군 헌병대 대위 계급장을 달았다. 시대가 바뀌자 독립군 행세를 했다. 남쪽으로 내려와서는 친일 세력을 중심으로 한국군 창설 작업을 주도했다. 이승만의 총애를 받은 그는 한국전쟁 발발 5일 만에 32살의 나이로 육군참모총장이 되었다. 합참의장, 육군대장을 거쳐 터키, 프랑스, 미국 대사가 되었다. 박정희의 군사 쿠데타를 돕고, 외무부장관을 거쳐 국무총리가 되어 7년 가까이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권세를 누렸고, 국회의장까지 6년을 지냈다. 사생활 얘기는 생략하자.

정일권씨의 화려함은 그가 살아 있을 때까지만이었다. 후손들이 지금도 떵떵거리면서 살고 있지만, 그의 삶과 죽음이 지금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의미는 아무것도 없다. 지금 어느 누가 그의 부재(不在)를 그리워하고 아쉬워하고 있겠는가.

문익환 목사는 정일권 총리가 화려한 시절을 보내는 동안 감옥을 여섯 번이나 들락거렸다. 아버지의 기록을 뛰어넘었다. 11년이 넘는 시간을 감옥에서 지냈다. 빨갱이 목사, 좌경 신학자라는 오명을 평생 벗지 못했다.

마지막 순간에는 동지들로부터 '프락치'라는 누명도 썼다. 그게 화근이었다. 이제까지 온갖 고난은 다 견딜 수 있었는데, 이처럼 억울한 누명은 감당하기 힘들었다. 심장의 고통을 느꼈다. 그는 그날 그렇게 동지들의 오해 속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마지막 순간까지 그는 억측과 비방과 누명 속에서도 자기에게 주어진 고단한 길을 흔들림 없이 걸어갔다.

문익환 목사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사람들은 커다란 충격에 휩싸였다. 영안실이 있는 한일병원에 하루 수천 명의 조문객이 몰려드는 바람에 서둘러 한신대 강의실로 빈소를 옮겼다. 그러나 비좁기는 거기도 마찬가지였다. 장례 기간 동안 전국 각지 곳곳에서 자발적으로 빈소가 차려졌다.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 민주 묘역에 있는 문익환 목사의 묘와 비석.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 민주 묘역에 있는 문익환 목사의 묘와 비석.
ⓒ 뉴스앤조이

관련사진보기

<문익환 평전>의 저자 김형수씨는 "사회의 최하층에서 최상류층까지 각자가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일들을 떠맡아 온 국민을 장례식에 모시는 듯한 참으로 진귀한 풍경이었다"고 했다.

"상여가 수유리 한신대를 출발해서 대학로, 종로5가, 동대문을 지날 때 하늘에서는 탐스러운 눈이 다습게, 참으로 예쁘고 다습게 내렸다. 고인이 그렇게도 좋아했던 온 나라의 젊은이들이 수없이 많은 만장을 들거나 상여 앞뒤에 매달렸다. 사람들은 다들 목사님이 가시는 길에 눈에 예쁘게 내렸다는 것으로 그 억장이 무너지는 슬픔을 아름답게 달랬다." (<문익환 평전>, 788쪽)

김형수씨가 평전을 쓰기 위해 취재할 무렵 한신대 총학생회에서 '늦봄 문익환'의 신분적 정체성을 묻는 여론조사를 했다. '통일 할아버지', '문익환 선생', '문익환 목사' 중에서 두 번째 호칭이 가장 많이 득표했다.

하지만 5년 넘게 문익환의 흔적을 캐고 또 캐들어갔던 저자는 "나는 '목사님!'이 옳다고 보았다"고 했다. '통일 할아버지'도 좋고, '선생님'도 좋지만, 그의 정체성은 '목사'였다는 것이다.

"문익환은 그리스도인이요, 그가 추구해온 가치는 정치 사회적으로 인권 운동, 민중 운동, 통일 운동 등으로 보이지만, 내면적 실체는 '그리스도적 가치의 실현'이 아니었겠는가. 중년을 넘기면서 관심의 초점을 '교회에서 세계로' 옮겨가지만, 그러한 '동력'을 준 것도, 또 그러한 삶을 통해 도달하고자 한 곳도 '그리스도적 가치의 구현'이었다. 그는 재야의 실천을 통해 끝없이 그리스도인의 자리로 회귀한다. …… 다른 이들이 '불의와 싸웠다!'고 이야기할 만한 곳에 뛰어들어 그는 '양들을 섬겼다!'" (<문익환 평전> 806쪽)

당시 안동교회 담임이었던 유경재 목사는 94년 3월 '한 예언자의 죽음'이라는 제목으로 칼럼을 썼다. (전문은 하단 박스 기사에 있음)

"하나님의 사람인 예언자의 삶은 살아있을 때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죽음조차도 그 말씀을 전하는 도구로 사용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하는 한 예언자의 죽음이 지난 1월에 있었다. 그것은 마치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 구원의 성취였던 것과 흡사하다."

"문 목사님의 장례에는 교인들만 따라간 것이 아니라, 각계각층의 사람들과, 특히 각 대학의 젊은이들이 함께하면서 그분의 가심을 아쉬워하였다. 그분이 목사였지만 교회만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온 민족을 위하여 살다가 가셨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난 장례였다."

평양을 방문한 문익환 목사가 두 팔을 한껏 벌리고 김일성 주석을 덥석 안은 것을 가지고 당시 남한에서는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가뜩이나 곡하게 여겼는데 뭔들 예쁘게 보였겠는가. 재판정에서 어머니 김신묵 사모는 "문 목사가 김일성이를 안아줬다고 뭐라 하는데, 여보시오, 문 목사가 아니면 김일성이를 안아줄 사람이 없어요!" 하고 외쳤다. 그가 김일성 주석을 끌어안은 것은 목사였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도 자신의 아버지처럼 한 교회의 목사가 아니라, 한 겨레의 목사, 한 시대의 목사로 생을 바쳤다.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그걸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그의 장례식은 교회장이 아니라 겨레장으로 치러졌다. 온 겨레가 그의 죽음을 슬퍼하고 아쉬워했던 것이다.

 문익환 목사가 김일성 주석을 덥석 끌어안는 장면은 남한뿐 아니라 북한 사람들에게도 충격을 주었다. 재판정에서 어머니 김신묵 사모는 "문 목사가 김일성이를 안아줬다고 뭐라 하는데, 여보시오, 문 목사가 아니면 김일성이를 안아줄 사람이 없어요!" 하고 외쳤다.
 문익환 목사가 김일성 주석을 덥석 끌어안는 장면은 남한뿐 아니라 북한 사람들에게도 충격을 주었다. 재판정에서 어머니 김신묵 사모는 "문 목사가 김일성이를 안아줬다고 뭐라 하는데, 여보시오, 문 목사가 아니면 김일성이를 안아줄 사람이 없어요!" 하고 외쳤다.
ⓒ 텔레비전 화면 캡처

관련사진보기


5.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에 누워 있는 아버지를 만나러 갈 때면 공원 입구에 있는 민주 묘역을 들르게 된다. 아버지 무덤가에 머무는 시간보다 민주 묘역을 거니는 시간이 더 길 때도 있다. 거기에 문익환 목사의 묘가 있다. 혈연의 아버지를 만나면서 시대의 아버지를 함께 만나는 즐거움이 작지 않다.

똑같은 모란공원에 누워 있지만, 문익환 목사는 민주화 운동, 통일 운동, 노동 운동을 했던 사람들 틈에 있다. 아버지 묘 주변에는 이름 없는 기독교인들의 묘가 많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유유상종인가 보다.

종교가 있든 없든 누구든지 그 이름만 들어도 알 법한 유명한 목사들 중에 머지않아 부음이 날아올 만한 사람들 얼굴을 머리에 떠올려본다. 당사자는 '재수 없다' 할 테니까 이름은 생략한다.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 '세계에서 제일 큰 선교단체', '세계에서 제일……'.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일반인들 중에는 기껏 정치인들이나 올 일이지, 이 땅의 밑바닥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시대의 죄인들이 몰려와서 "아이고, 우리를 버려두고 왜 벌써 가셨어요?" 하고 슬퍼할 것 같지는 않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만큼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이 찾아와 아쉬워하는 목사의 장례식을 언제 다시 볼 수 있을까. 이 땅의 교회가 그들만의 교회이듯, 목사의 죽음도 그들만의 죽음에 불과하다. 이것이 한국 교회와 목사의 현실이고, 우리 시대의 비극이다.

'한 예언자의 죽음'
하나님의 사람인 예언자의 삶은 살아있을 때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죽음조차도 그 말씀을 전하는 도구로 사용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하는 한 예언자의 죽음이 지난 1월에 있었다. 그것은 마치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 구원의 성취였던 것과 흡사하다고 하겠다. 지난 1월에 있은 늦봄 문익환 목사님의 죽음과 장례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진정한 예언자

그분은 모든 사람이 아쉬워할 그때에 유언 한 마디 없이 훌쩍 우리 곁을 떠나셨다. 마치 사명을 마친 엘리야가 불 병거를 타고 홀연히 하늘로 올라가듯 그는 어느 날 갑자기 우리에게서 떠나가셨다. 그분의 이런 죽음은 정말 하나님께서 이 민족을 위해 보내셨던 그의 예언자임을 말해준다.

하나님은 필요한 때에 보내셨다가 그 사명이 끝나면 훌쩍 데려가시는 그의 방법대로 문 목사님을 데려가셨다. 그의 이런 죽음은 그분이 분명 하나님이 이 민족을 위해 보내셨던 정의의 예언자 아모스요, 눈물의 예언자 예레미야요, 환상의 예언자 에스겔 같은 예언자이었음을 증명하였다.

겨레의 사랑을 받은 예언자

 1994년 문익환 목사의 방북을 지지하는 설교를 하고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칼럼을 썼던 안동교회 유경재 현 원로목사.
 1994년 문익환 목사의 방북을 지지하는 설교를 하고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칼럼을 썼던 안동교회 유경재 현 원로목사.
ⓒ 뉴스앤조이

관련사진보기

문 목사님의 장례에는 교인들만 따라간 것이 아니라, 각계각층의 사람들과, 특히 각 대학의 젊은이들이 함께하면서 그분의 가심을 아쉬워하였다. 그분이 목사였지만 교회만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온 민족을 위하여 살다가 가셨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난 장례였다.

같은 날 사회장으로 치른 한 정치인의 장례와는 너무 대조를 이루었다. 화려하게 일생을 출세 가도로 달린 그의 장례는 가지 않을 수 없는 정치인들만 들러리처럼 참석하여 치른 아주 공식적인 행사였다.

언론들이 애써 축소 보도함에도 문 목사님의 장례는 그 이름 그대로 겨레장이었다면, 사회장으로 치러진 정치인의 장례는 마지못해 치른 것처럼 초라해 보였다.

문 목사님의 장례는 자발적인 민중들에 의해 치른 장례인데 비해, 정치인의 장례는 정부 주도에 의해 형식적으로 치른 것이었다. 문 목사님은 가시밭길을 걸은 생애였지만, 그렇기에 사랑을 받았고, 다른 한 사람은 화려한 정치인의 길을 걸었지만, 별로 사랑받지 못한 채 이 세상을 떠났다. 권력 지향적인 삶과 민족을 위해 십자가를 지고 간 삶이 선명하게 대조된 장례로서 우리에게 큰 교훈을 주었다.


언론이 알아보지 못한 예언자


문 목사님의 죽음은 또한 이 시대의 언론들이 얼마나 허구적이고 권력 지향적인가를 우리에게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작년에 세상을 뜬 한 승려의 죽음은 필요 이상으로 크게 보도하던 언론들이 문 목사님의 죽음은 애써 축소 보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 나라의 언론들이야말로 가진 자들을 위한 부패하고 타락한 집단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해주었다.

문 목사님은 가진 자들에게는 껄끄럽고 다루기 어려운 뜨거운 감자 같은 존재였기에, 언론 특히 텔레비전 방송들은 애써 외면하여 갈 수밖에 없었는지 모른다. 예언자들은 언제나 그 시대의 가진 자들에게는 껄끄러운 존재로 박해당하고 외면당하였던 일을 기억한다면, 문 목사님이야 말로 이 시대의 참 예언자였음에 틀림이 없다.

문 목사님, 이제 편히 쉬소서. 그리고 우리에게 이 시대를 분별할 수 있는 예언의 능력을 칠 배나 더하소서!

(안동교회보 46호 / 94년 3월)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