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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집에서 오곡밥과 나물, 탕을 가져가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대보름을 맞이하여 인근의 자식들에게 나눠 줄 요량으로 듬뿍 했다며 시간 나는대로 왔다가라는 전갈을 받고 어린 아들 녀석과 함께 시골집에 갔습니다.

시골집에 가면 부모님 못지않게 가장 반갑게 맞이해주는 이는 사랑이입니다. 사랑이는 강아지 이름이죠. 시골집에 와서 지낸 지 근 6년 정도 됩니다. 녀석은 내가 타고 온 자동차 소리나 내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낑낑거리며 반갑게 꼬리를 흔듭니다. 마당에 들어서면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조금은 애절한 눈빛을 보내기도 합니다. 빨리 옆으로 와서 놀아주라는 표정입니다. 모른 척 그냥 지나치면 매우 실망한 눈빛을 하고 내 뒤꽁무니를 연신 따라옵니다. 그러면 미안한 마음이 들어 녀석 곁에 다가가며 '사랑아! 잘 있었어!' 하고 부르면 사랑이의 눈에서 생기가 돕니다.

딸아이와 사랑이.
 딸아이와 사랑이.
ⓒ 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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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나온 김에 사랑이의 은밀한 이야길 하나 하겠습니다. 작년에 사랑이에게 사랑하는 여인이 생겼습니다. 뒤뜸의 검둥이입니다. 산책 가려고 사랑이의 목줄을 풀어주면 녀석은 내 주변을 몇 번 빙글빙글 돌더니 이내 어디론가 쏜살같이 달려가 버립니다. 바람처럼 달려간 녀석은 근 한 시간이 다 지나서야 어슬렁거리며 집으로 돌아옵니다.

처음엔 그렇게 달아난 녀석을 잃어버린 줄 알고 찾아다니다 결국은 찾지 못하고 사랑이가 집 나갔다고 하자 아버지는 허허허 웃으시며 '그놈 좋아하는 처자 만나러 갔을긴게 쪼매 있으면 올기다' 그러면서 바람이 단단히 들었다고 웃습니다. 옆에서 콩을 까불던 어머니도 웃습니다. 지금도 녀석은 목줄만 풀어놓으면 사랑 찾아 갔다가 돌아옵니다. 그리곤 놀아달라고 흙묻은 발바닥을 연신 들어 올립니다. 그런데 근래 들어 밥을 통 먹지 않는다고 아버지의 걱정이 많습니다. 사랑이의 밥 당번은 아버지거든요.

내 여덟 살쯤 되었을 때입니다. 여름입니다. 몸이 아파 한 달 가까이 학교에 가지 못하고 병든 강아지마냥 마당과 토방을 서성이던 때였습니다. 그날도 아버지와 어머니는 날이 깜깜해서야 집에 들어왔습니다. 아버지는 지게를 잿간 한쪽에 세워두고, 어머니는 씻는 둥 마는 둥 하고는 저녁을 지었습니다.

온 가족이 마당에 펴놓은 멍석에 앉아 저녁을 먹는 시간 난 오도카니 앉아 가족들의 모습과 빈 하늘을 바라봐야만 했습니다. 그런 내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아버지는 밥을 먹다 말고 ‘내 강아지 많이 아프노’ 하며 당신의 등을 내밀었습니다. 내 기억에 처음으로 업혀보는 아버지의 등, 조금은 어색했지만 참으로 따뜻했습니다.

당신의 등을 내준 아버진 내 손에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고소한 깜밥(누룽지)을 쥐어주었습니다. 밥을 먹지 못하는 아들에게 먹이려고 어머니가 훑은 말랑말랑하고 고소한 누룽지 맛, 나이가 든 지금에도 그 맛을 잊지 못합니다. 지금도 종종 아내가 훑어준 누룽지를 먹을 때마다 그때 아버지의 등에 업혀 먹었던 그 누룽지를 생각합니다. 평소 아들들과 살가운 대화 한 번 제대로 하진 않았지만 말없는 가운데 당신의 등을 내밀었던 아버지의 애틋한 마음도 떠올려 봅니다. 

그런 아버지가 이제 많이 늙으셨습니다. 사람들은 정정하다고 하지만 요즘 들어 종종 병원을 찾습니다. 팔순을 훌쩍 넘긴 아버지와 중년의 나이가 된 아들은 서로 말이 없습니다. 건강은 어떠하냐고 묻고는 이내 데면데면하게 됩니다.

사십 년을 넘게 살아왔는데 늙은 아버지와 장성한 아들이 마주 앉아 있으면 왠지 모를 어색함이 묻어납니다. 함께 텃밭을 일구거나 깨를 털거나 논일을 할 땐 사라지던 어색함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마주보면 꼬물꼬물 일어섭니다. 말없이 앉아 있어도 어머니와는 그 어색함이 없는데 아버지완 있습니다. 그런 날 두고 아내는 종종 면박을 주곤 했습니다. 왜 어머니만큼 아버지한테 곰실거리지 않느냐고. 왜 살갑게 굴지 않느냐고.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아버지에게 미안해지기도 합니다.

아버지와 마주 앉아 제수씨가 내놓은 생강차를 마십니다. 못 본 척 하며 아버지 얼굴을 바라보았습니다. 말없이 차를 마시는 아버지의 굵은 이마주름살이 힘이 없어 보입니다. 얼굴도 붓기가 있어 보입니다. "안 아프세요?" 했더니 괜찮다고 합니다. 어머니도 그렇지만 아버지도 늘 괜찮다고만 합니다.

시골 사는 노인들이 대부분 그렇습니다. 웬만큼 아파도 아픈 척 하지 않습니다. 병원비 아낀다고 병원도 가지 않습니다. 젊은 사람들 눈에 궁색 맞아 보이지만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쓰러질 정도나 돼야 병원에 가려고 합니다. 아버지도 늘 그랬습니다. 다행히 병원에 몇 주 입원하고 나오면 다시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와 줌이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래도 시간이 흐를수록 굳어가고 힘이 풀린 아버지의 주름살이 마음을 쓸쓸하게 합니다.


태그:#아버지, #정월대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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