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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민주노총의 성폭력 사건 얘기다. 가해자는 민주노총 조직강화위원장이었고, 피해자는 전교조 여성 조합원이었다.  더구나 피해자는 불이익을 감수하면서까지, 당시 수배 중이던 민주노총 이석행 위원장의 피신을 도왔다고 한다. 보호하지는 못할망정 이런 큰 상처를 입혔으니 그것만으로도 당사자가 입었을 충격은 상상 이상일 것이다.

 

그러나 더 큰 충격은 그 다음이다. 민주노총 지도부는 조직 전체로 불똥이 튈 것을 두려워 한 나머지, '대정부 투쟁'을 이유로 내세워 피해자에게 조직적인 입막음을 시도했다는 것이다. 물론 민주노총 지도부는 이같은 사실을 부인하고 있다. 그러나 이미 두 달 전에 벌어진 사건이다. 일이 이 지경이 되도록 정당한 조치가 없었던 것을 보면 지도부의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민주노총 지도부의 설득력 떨어지는 주장

 

물론 "민주노총이 없어져야 한다"느니, "좌파들은 원래 그렇다"느니 덜 떨어진 소리를 하며 떡 본 김에 제사 지내겠다고 나서는 군상들이 불편한 것은 나 또한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들의 망발을 막기 위해서라도 민주노총은 이 사건을 공정하고 신속하게 처리했어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여성의 육체가 아니라 인격을 파괴하는 성폭력이 옹호돼야 할 근거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사건을 엄중하게 다루고, 여전히 여성을 도구로 인식하는 가부장적 사고와 행태에 경종을 울리는 계기로 삼았어야 한다. 그랬다면 사태가 이렇게까지 확대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민주노총 지도부의 납득하기 어려운 대응으로 인해 이 사건은 노동운동 전체의 도덕성에 관한 문제가 되었다. 성폭력 그 자체도 문제지만, 피해자를 보호하기 보다는 이해할 수 없는 이유를 들어 실제 조직적인 입막음을 시도했다면 이것은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그동안 노동자들은 '국익'이나 '기업 전체의 이익'을 위한 희생을 그 누구보다도 가장 많이 강요당해 왔다. 그러니 긴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대를 위해 소가 희생해야 한다' 식의 논리는 전체주의의 논리다. 보수파들이 자신들의 책임을 사회적 약자들에게 전가하기 위해 상습적으로 동원하는 억압의 논리라는 얘기다.

 

진보가 아름다운 것은 그것의 철학적 뿌리가 휴머니즘이기 때문이다. 진보는 사람을 위한 것이지 사람 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진보를 위해, 혁명을 위해, 혹은 그보다 더한 어떤 것을 위해 무시해도 좋은 개인의 인권이란 없다. 진보가 보수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면 그 근거는 오직 여기에 있을 것이다.

 

'대정부 투쟁'과 '성폭력' 사이의 거리는 태양과 지구만큼 먼 것이다. 한 여성에게 씻기 힘든 상처를 입힌 범죄자를 처벌하는 것과 정권을 상대로 싸우는 것은 전혀 관련이 없는 문제라는 얘기다. 하지만 민주노총은 '대정부 투쟁'이라는 명분을 동원하고 '조직이 입을 상처'를 내세워서 피해자의 인권을 침해하고 희생을 강요했다. 그래서 큰 비판을 받게 된 것이다.

 

이번 기회에 지적하고 싶은 것은 민주노총, 나아가 한국의 노동운동이 안고 있는 한 가지 중요한 문제에 관한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노동운동이 본의 아니게 '공공의 적'으로 취급받게 된 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다. 나는 '자본가들의 탄압' 보다도 노동자들을 더 어렵게 하고, 노동운동을 더 힘들게 하는 것이 바로 '사회적 고립'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 주된 원인은 헌법이 보장하는 노동자들의 권리를 불온한 것으로 색칠하여 선전하는 자본가들과 보수언론의 행태에 있을 것이다. 노동조합을 좌경용공으로 매도하고, 노동자들의 집단행동을 시민들에게 불편을 끼치는 과격폭력으로 몰아 공격하는 것은 수구세력의 상습적이고도 고전적인 수법이다.

 

사람을 위한 진보가 사랑받기 위한 방법

 

그러나 중요한 것은 경위가 어찌되었든 저들의 수법이 먹혀들었고, 그 결과 노동운동은 사회적으로 매우 힘든 조건에 놓이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노동운동에 대한 한국사회의 왜곡된 인식과 그로 인한 사회적 고립이라는 조건은 노동운동 스스로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되는 또 다른 과제가 되었다.

 

노동운동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고 여론의 지지를 획득하지 못하면 노동운동 나아가 진보운동의 전진은 매우 어렵고 더딜 수밖에 없다. 더구나 이 문제는 자본가와 보수언론을 죽도록 비판하고 시민들의 낮은 노동의식을 개탄하는 것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다른 접근방법이 필요하다.

 

나는 한국 노동운동을 '국민의 사랑을 받는' 노동운동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어찌 보면 우스꽝스러운 얘기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또한 구체적인 해법을 마련하고 실천하는 것은 매우 고단한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 고립이라는 조건을 벗어던지기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 일이다.

 

노동자의 권익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이 '용기'를 요구한다면, 국민의 사랑을 받고 여론의 지지를 얻기 위해 필요한 것은 '지혜'라 하겠다. 오늘날 한국 사회의 반노동적 풍토는 '노동조합을 부정적으로 보지 말라'는 호소나 '노동자의 이익은 곧 국민의 이익'이라는 계몽만으로는 해결되기 어려운 지경에 있기 때문이다.

 

노동조합에 덧씌워진 여러 가지 부정적 이미지를 씻어내기 위한 다양한 사업들이 계획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동안 전개돼 왔던 노동운동의 내용과 방향에 대한 진지한 고민도 함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사건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탑을 쌓기는 어려워도 무너뜨리기는 매우 쉽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잘 수습해야 한다. 그래서 이번 사건이 민주노총과 한국 노동운동에 긍정적인 의미의 변화를 가져오는 계기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노동자의 이익은 곧 국민의 이익'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임종인 기자는 전 국회의원이며 변호사입니다. 


태그:#민주노총 성폭력 사건, #이석행, #민주노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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