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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살아 있었다. 그들은 미국 내 도미니카 이민자라는 오명으로 디아스포라의 인생을 살아야 했다. 소설의 한 구절처럼 “아프지 않은 곳은 없었지만” 그들은 분명 “살아 있었다”.
 
1996년 첫 단편 소설집을 낸 후에 11년 만에 발표한 첫 장편 소설이라는, 주노 디아스의 <오스카 와와의 짧고 놀라운 삶>은 다소 낯선 땅, 서인도제도의 도미니카 공화국 출신의 한 가족에 관한 이야기다.
 
30여 년을 숫총각으로 살아온 오스카를 중심으로 동생과는 달리 남성편력이 다분했던 누나 롤라와 암으로 투병중인 어머니 벨리시아, 그리고 도미니카공화국의 독재자 트루히요에 의해 암살된 그녀의 아버지 아벨라르에 이르기까지, 삼대를 아우르는 가족사다.
 
살기위해 달아나고 아등바등 거리며 생의 악다구니를 쳐야하는 박복한 여인네들과 여복 없는 찌질한 남자 오스카가 이야기가 중심에 있다. 또한 이 소설은 트루히요 독재가 부른 ‘푸쿠’라는 저주에 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다.
 
독재정치의 폭압의 사슬이 대를 거쳐서 한 가정을 옭아맨다는 기본 설정은 이 소설을 탐독하게 하는 주요인이다. 이런 이야기의 힘은 비극적인 가족의 드라마에서 그치지 않고 도미니카 공화국의 소역사서로 거듭난다. 물론 정치적 알레고리를 제거하고 단순히 말하면 누군가의 삶에 관한 이야기라 해도 무방하다. 

 

 오스카는 지지리 복도 없는 놈이다. 그는 소싯적 천재라는 소리를 듣던 촉망받는 아이였다. 한 때 여자 친구도 있었다. 물론 아주 오래 전 이야기다. 첫 사랑에 배신당한 이후로 이 아이는 미친 듯이 책에 빠져들고 전자 게임에 몰두했으며 영화에 푹 빠졌다.

 

두문불출하고 책과 씨름하면서 성장하는 사이 자연스럽게 판타지소설을 쓰는 경지에 이른다. 소설의 전반부는 오스카의 오타쿠적인 삶과 그가 도미니카인이면서도 숫총각으로 살아가야하는 찌질한 삶에 대해서 묘사한다. 오스카의 삶은 연애와는 거리가 멀었다. 포르노 잡지를 뒤적이며 여자에 관한 과대망상에 빠지지만 어디까지나 자위에 머물 뿐이다.

 

몇몇 여자를 만나지만 그녀들에게는 언제나 애인이 있었다. 게다가 그녀들의 남자는 늘 강했다. 오스카는 100kg이 넘는 거구였고, 비계 냄새가 진동하는, 그래서 보통 사람이라면 가까이하기 꺼려하는 ‘기피남’에 가까웠다. 반면 오스카가 사랑한 그녀들의 남자는 모든 여성들의 눈길이 머무르는 근육질 몸에 매력적인 웃음을 가진 ‘훈남’들이었다.

 

그들과 마주하고 나면 오스카는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그리고 자기는 숫총각으로 죽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자아비판에 들어간다. 오스카는 그냥 오타쿠이지 영화 속 매력남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냥 적당히 자기 삶에 만족하면서 살아야 되는 운명. 지지리 복도 없는 삶이다.

 

 소설은 오스카의 방대한 이력에 주목한다. 그가 읽고 있는 책, 그가 보고 있는 영화, 그가 즐겨하는 전자오락에 대한 방대한 언급은 이 소설을 각종 주석과 함께 읽기를 권한다. 하위문화 대중문화에 대한 작가의 관심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하게 하는 것은 이 책 끝머리에 붙어 있는 주석이 상당하다는 것만 보아도 짐작이 간다.

 

아마 작가는 문학에서부터 다양한 장르의 대중문화, 고급문화를 구별없이 먹어치우는 폭식가일지도 모른다. 한편으로 이 책은 난독증에 걸렸던 독서가가 쓴 것 같다는 뉘앙스를 곳곳에서 풍긴다. 물론 그런 작가나 캐릭터가 가지고 있는 수집벽, 잡식성 기질만이 이 책의 백미라고 할 수는 없다.

 

오스카의 모습이 작가의 삶을 투영한 것인지는 부차적인 문제다. 단지, 오스카를 중심으로 함축되고 풍자되고 있는 하위문화와 대중예술권에 대한 세상의 무관심과 냉소를 재반박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는 듯하다.

 

또한, 소설의 문체는 때로는 저급하고 상스럽고, 그런 힘이 문장 자체를 다분히 풍자적이고 위트 있으며 때로는 독설적인데다가 지나치게 염세적으로 보이게 한다. 독한 문체는 매료되기에 딱 좋다. 이렇게 독한 문체에서 어떻게 아름다운 소설이 나올 수 있느냐고 반박할지도 모르지만, 끝까지 읽어야 한다. 이 소설은 식상하게 말하면, 사랑에 관한, 인생에 관한 소설이기 때문이다.

 

 삼대에 걸친 가족사는 우울하다. 오스카의 외조부는 독재정치의 희생양으로 사탕수수밭에서 죽었고, 정치적 희생양이 되었던 외할아버지의 가정은 순식간에 파탄난다. 그 와중에 오스카의 어머니만이 살아남았고, 박복한 인생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어머니는 늘 친척으로부터 “너의 아버지는 의사였다”는 말을 귀에 못에 박히도록 듣고 살아왔지만, 그녀에게 그런 자부심은 살아가는 데 일절 도움이 되지 않았다. 살아가는 건 하루하루 죽어가는 것과 매한가지였다. 남편 없이 두 자식을 길렀던 어머니의 불우한 삶은 대를 이어 자식들에게로 넘어간다.

 

롤라와 오스카가 그 불행을 고스란히 이어받는다. 이는 한 가정에 뿌리 깊게 박힌 저주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소설이 한 가정의 풍비박산을 다룬다는 점에서는 전통적인 소설들이 취하고 있는 모양새와 같이한다. 또한 환상적 리얼리즘이라는 틀에서는 G.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과도 비교해봄직하다.

 

그러나 도미니카공화국에서 30년간 이어져온 독재정치가가 한 가정에 저주를 심어준다는 설정은 다분히 신화적이다. 그래서 한 가정은 독재의 희생양으로 형상화되어 비극으로 치닫는다. 눈물 없인 볼 수 없는 감동의 드라마라는 식상한 틀은 절대 아니다.

 

반대로, 오스카라는 비정상적인 부류의 사람들을 통해서 그가 사회에서 홀대받고 과정을 그려나가는 사이에 어쩌면 오스카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비정상적임이 드러난다. 오스카가 30년 동안 키스 한 번 못했다는 설정은 얼마나 기발한 발상인가. 얼마나 끔찍해 보였으면 30년 동안 그 흔한 키스 한번 못해봤다는 것일까, 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반대로 오스카야말로 우리 사회의 통념과 고정관념에 편승하지 않은 순수한 사람이라는 주장도 가능하다. 그는 소위 말하는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독보적인 인생을 살았던 것이다. 오스카 와오야말로 천연기념물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은 방대한 자료를 토대로 쓰여진 내용, 시점을 명백히 드러내지 않는 문체, 독설적인 어휘들과 유려한 문장들로 구성되어 있다. 현기증을 유발하는 어지러운 묘사와 속사포 같은 이야기 전개는 오스카 와오의 삶을 짧았지만, 그를 둘러싼 사건들은 경천동지할 일들로 묘사한다.

 

오스카 와오는 자신은 비온 날의 죽순처럼 쑥쑥 자라고 변화하지 못했지만, 세상이 자신을 바라보는 관점을 터득하면서 내적으로 성장해간다. 오스카가 그 후 어떻게 살았냐고? 키스는 제대로 해봤냐고? 섹스는? 어쨌든 오스카는 멋진 삶을 살았다. 소설이 말하듯 “세상에 진정한 결말이란 없거든.” 고로 오스카의 굴곡 많은 삶도 그리 간단히 정의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소설 속 한 구절.

 

“인생이란 그런 거다. 아무리 열심히 행복을 모아봤자 아무것도 아닌 듯 쓸려가버린다. 누군가 나한테 묻는다면, 난 세상에 저주 따윈 없다고 대답하겠다. 삶이 있을 뿐. 그걸로 충분하다.” p246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

, 문학동네(2009)


태그:#주노디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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