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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 초하루. 가진 게 없어도, 정부의 개발정책으로 하루아침에 철거민이 됐어도 이날만큼은 가족과 따뜻하게 지내고 싶었다. 다가올 날들이 잘 닦인 탄탄대로가 아니란 걸 뻔히 안다. 비록 허망한 절망으로 변할지라도 떡국 한 그릇 먹으며 미래의 작은 희망을 그려보는 것도 설날의 미덕이 아닌가.

 

하지만 용산 철거민 노 아무개씨(여·52)에게는 그 모든 게 사치였다. 노씨는 많은 사람들이 고향으로 향할 때 용산 철거민 참사 현장을 지켰다. 누군가는 떡국을 끓이고 있을 26일 새벽에는 참사로 숨진 5명의 영정 사진 앞에 향불을 붙였다. 그리고 그들 앞에 조촐한 차례상을 차렸다.

 

노씨의 설날 "우리 그냥 살게 해달라"

 

다행히 거리 분향소에는 간간이 사람들이 들렀다. 듣도 보도 못한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영정 앞에 고개를 숙였다. 노씨는 "세상이 밉고 원망스럽지만 그래도 그런 사람들 때문에 견딘다"고 했다.

 

노씨는 26일 설날 저녁 7시 용산 참사 현장에서 열린 희생자 추모집회에서 마이크를 잡았다. 무대도 마이크도 여전히 어색하다. 노씨는 "얼마 전 홀로 천막을 지키며 도저히 잠을 이루지 못해 적어본 것"이라며 종이 한 장을 들고 나왔다. 한 자 한 자 천천히 차분하게 읽었지만 떨리는 목소리는 어쩔 수 없었다.

 

"희생된 분 중에는 이곳 용산에서 함께 아래 위층에서 장사했던 분이 있다. 왜 선량했던 사람을 이렇게 만드나. 도대체 개발이 누구를 위한 것인가. 초가집에 살아도 사람답게 사는 게 좋은 것이다. 우리가 뭐 대단한 걸 요구했다고 거지 취급을 하는가."

 

이명박 대통령에게도 한 마디 던졌다.

 

"백성을 다 폭도로 만들고 있는 이명박 대통령도 과거 어렵게 살았다던데, 그 때를 생각해서라도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해 달라. 우리 그냥 살던 그대로 살고 싶다. 그렇게 해달라."

 

저녁 8시 설날의 집회를 끝마치고 나서야 노씨는 떡국 한 그릇을 입 속으로 떠넣었다. 시민 자원봉사자들이 자발적으로 현장에서 끓여준 떡국이었다. 노씨의 정월 초하루는 그렇게 저물어 갔다.

 

27살 대학생의 설날 "연대할 사람이 누군지 알겠다"

 

어느덧 서울에서 홀로 자취를 한 지 7년째다. 사먹는 음식은 예전에 질렸고 가격도 비싸다. 가끔 집에서 요리를 하지만 그럴 때마다 생각나는 건 광주광역시에 사는 어머님 해주는 음식이다. 

 

이번 설날에는 집에 내려가고 싶었다. 그냥 가는 게 아니라 직장인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가고 싶었다. 대학 5학년이지만 취업은 여전히 멀리 있고, '미래 백수' 신세로 집에 갈 수 없었다. 무엇보다 부모님에게 미안했다. 

 

결국 부모님에게 세배도 못했고, 떡국 대신 라면 하나로 설날 아침 때우며 서울을 지켰다. 조씨는 "라면을 먹으며 지난 2007년 대선에서 이명박 대통령을 찍은 손가락을 부러뜨리고 싶었다"고 했다. 그는 '경제 발전' 그리고 '취업 성공' 약속만 믿고 이 대통령을 지지했다고 했다.

 

조씨는 이제 곧 함께 백수가 된다는 여자친구와 함께 26일 설날 저녁 용산 참사 현장을 찾았다. 조씨는 "할 일 없어서 온 게 아니고 사회 공부 좀 하고 나왔다"며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연대할 사람이 누군지, 백수 아니면 비정규직이 돼야하는 나의 눈길이 향할 곳이 어딘지 이제 알겠다. 이젠 속고 싶지 않다. 두 눈 감고 귀 막고 나만 챙기기에는 세상이 참으로 기막히게 돌아간다."

 

조씨는 이날 현장을 찾은 100여 명의 시민들과 함께 "학살정권 이명박 정권 퇴진!" "김석기를 구속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구호를 외치는 목소리도, 하늘로 뻗는 팔뚝질도 어색했지만 그의 얼굴은 진지했다.

 

'미래 백수' 조씨는 2009년 설날 떡국을 저녁 8시 돼서야 용산 거리에 서서 먹었다. 그의 곁에는 여자친구도 있었지만 철거민들도 있었다. 떡국은 듣도 보도 못한 시민이 끓여준 것이었다.

 

이날 집회에 참석한 시민 100여 명은 오는 31일 서울 청계광장에서 열리는 2차 범국민 추모대회 때에는 1만명이 모일 것을 다짐했다.


태그:#용산 철거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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낸시랭은 고양이를, 저는 개를 업고 다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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