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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란다 한 자리를 꿰차고 있는 들깨가 눈에 띌 때마다 신경이 쓰였다. 내일, 내일 하다가 방앗간에 가는 걸 계속 미루던 터였다. 지난 가을 시골형님 댁에서 들깨 한 말을 부탁할 때만 해도 물건이 오면 당장에 기름을 짤 것 같았는데, 먹던 기름이 똑 떨어져서야 몸이 움직였다.

들깨 한말 3만원 주고 시골에서 사왔어요.
 들깨 한말 3만원 주고 시골에서 사왔어요.
ⓒ 한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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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여물었어요.
 잘 여물었어요.
ⓒ 한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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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재래시장의 단골로 드나드는 방앗간에 가니  70대로 보이는 할머니 두 분이 먼저 와 계셨다. 내가 들어서니 어서 와서 불을 쬐라고 자리를 만들어 주신다. 그날은 춥고 바람마저 부는 날씨여서 방앗간에 놓인 주홍빛 가스난로가 무척 반가웠다.

“기름 짤 거유? 한 말에 얼마 줬슈? 이거 안 씻어온거네. 그럼 저 통에다 쏟아야 혀. 저기 기계가 알아서 다 씻겨주거든.” 

방앗간에서 들깨를 세척해줘요.
 방앗간에서 들깨를 세척해줘요.
ⓒ 한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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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기름 짜고 있어요. 방앗간은 지금 고소한 냄새가 그득해요.
 들기름 짜고 있어요. 방앗간은 지금 고소한 냄새가 그득해요.
ⓒ 한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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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에 걸러지는 기름.
 체에 걸러지는 기름.
ⓒ 한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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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앗간 아주머니는 들락날락 하며 일을 보는데 할머니들이 마치 주인처럼 내 들깨를 보고 이것저것 묻는다.

두 할머니도 참깨를 갖고 와서 기름을 짜는 중이었다. 한 분은 벌써 기름을 다 내려 병에 담아 놓고 친구할머니 기름을 짜는 동안 얘기를 하고 있었다. 할머니들은 구즉동 새 아파트가 들어서기 전, 묵마을로 유명했던 곳에 터를 잡고 살았던 주민이었다. 묵마을에 살던 사람들은 보상을 받고 마을을 떠나거나 새로 짓는 아파트 분양을 받았을 것이다.

묵마을 얘기는 계속됐다. 그러면서 한 할머니가 ‘늙으면 돈 힘 밖에 없다’고 말했다. 할머니가 잘 알고 지내던 이웃 노친네라는 분이 보상으로 나온 돈을 모두 큰 자식에게 줬단다. 그 후에 사이좋던 5남매가 뿔뿔이 흩어지고, 큰자식에게 의지하고 홀가분하게 살 줄 알았던 노친네는 큰자식에게 대접받기는커녕, 다른 자식들도 자기 어머니를 소홀히 여긴다는 것이다. 그 얘기를 하는 할머니가 나를 바라보며 확신하듯 말씀하셨다.

“그러게 돈은 자식한테 다 주는 게 아녀. 다 맡기고 나니까 맘이 싹 달라졌지 뭐. 노인네가 그거 도로 달라고 할겨? 주지도 않어. 안 줄 핑계가 을매나 많것어. 젊은 사람들 머리 돌아가는 거 노친네가 어뜨케 따라가? 노친네만 불쌍혀. 그래서 나는 죽을 때, 그때 내놓을 거여. 내 꺼, 내가 갖구 있어야 혀. 그래야 애들도 무시하지 않어.”

올여름에 입주할 묵마을 터에 올라선 고층아파트는 현재 내부공사중이다. 두 할머니는 같은 동네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계속 이어졌는데, 거의 보상금으로 얽힌 얘기들이었다. 할머니는 다행히(?) 보상금 때문에 그리 속상해 할 일은 없어 보였다. 

나중에 기름을 짠 할머니가 핸드폰을 눌렀다. 기름을 다 짰으니 차를 갖고 오란다. 잠시 후,  죽을 때까지 ‘돈’은 갖고 있어야 된다고 했던 할머니의 며느리가 왔다. 두 할머니가 나가자 방앗간이 휑하다.

소줏병으로 여섯병하고  조금 더 나왔어요.
 소줏병으로 여섯병하고 조금 더 나왔어요.
ⓒ 한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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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깨 한 말 살짝 볶아서 기름으로 짜니 소줏병으로 여섯 병 하고, 조금 더 나왔다. 한 말 짜는 데는 6,000원을 줬다. 병에 담긴 들기름을 보고 있자니 명절 앞두고 일거리 하나를 해치운 것 같다. 들깨가 기름으로 나오기까지 ‘지키고 앉아’ 처음부터 끝까지 확인하고 먹는 안전한 맛, 그 맛을 어디에 비하리. 네 병 정도는 고마운 사람들에게 선물로도 나눠줄 수 있겠다.

집으로 걸어가는 내내 가진 돈 없어도 구순의 꼬부랑 시엄니를 행복하게 하는데 마음을 쓰는 여러 가족들 생각이 났다. 돈 힘을 크게 믿고 있는 할머니 마음도 헤아려졌다. 특히나 요즘 ‘경제’를 떠받드는 세상에 돈은 거의 신이다. 그래도 칠순을 넘게 살고 계신 할머니가 여직 살면서 ‘돈 힘밖에 없다’라고 말하는 건 참 쓸쓸한 일이다.

덧붙이는 글 | sbs u포터에 송고합니다.



태그:#들기름, #방앗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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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가면을 줘보게, 그럼 진실을 말하게 될 테니까. 오스카와일드<거짓의 쇠락>p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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