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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죽었다. 화염에 휩싸여 그렇게 생을 접었다. 어제만(19일) 해도 화염병이 등장했다는 가십 정도의 이야기려니 하고 넘겼던 용산 상가 철거민들의 투쟁은 20일, 최후의 보루로 옥상 가건물에 진을 친 철거민중 5명과 무리한 강제진압에 내몰린 한 경찰의 죽음으로 끝을 맺었다.

 

어떤 이들은 아직도 철거민이 있냐며 놀라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화염과 건물 잔해에 들어붙은 시신을 보며 울먹였다. 높고 큰 새 빌딩을 지어 올리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는 몰라도, 그것이 사람의 생을 앗아가는 일까지는 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그럼에도 철거하는 사람과 철거되는 사람 간의 치열한 싸움은 항상 힘없는 이들의 아귀다툼으로 시작되고 끝을 맺었다. 이 싸움에서 분명 막대한 이익을 볼 사람들은 온 데 간 데 없고, 다만 하루 벌어먹고 사는 이들로 이루어진 철거민과 역시 하루 벌어먹고 살아야 하는 이들을 동원해서 만든 철거반, 그리고 국방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영문도 모르고 그 자리에 서 있는 이 땅의 젊은 청춘들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잔인한 진압 와중에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보다 용산 인근 교통체증이 풀렸다는 소식을 먼저 들어야 하는 서글픈 2009년의 대한민국에서, 철거하는 사람들과 철거되는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화마의 흔적들은, 누군가에겐 뻥 뚫린 도로 만큼이나 큰 구멍을 가슴 속에 만들었을 것이다.

 

12년 전 찾았던 철거지역의 기억

 

내가 철거지역에 가본 경험은 대략 4번~5번 정도였던 것 같다. 모두 '공식적(?)' 행보가 아니라 개인적인 방문이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철거지역은 12년 전 전농동인가에 있던 철거지역의 골리앗을 방문했을 때였다.

 

당시 대학에 다니던 나는 어떤 영상을 찍어 편집해 오는 과제를 해결해야 했는데, 그 대상으로 도심 한가운데 외로이 서 있는 골리앗, 그리고 철거지역 사람들을 담고자 했다. 빌딩숲 속에 자리 잡은 거대한 망루, 그 어울리지 않는 고독감이 주는 메시지는 어쨌든 강렬한 것일 테니까. 

 

당시 내가 찾아간 철거지역은 겉으로 보기에는 처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깨어진 유리창과 낙서, 그리고 온갖 쓰레기 더미. 사람이 살고 있다는 흔적은 골목 깊숙하게 들어가지 않았다면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철거대책위 위원장이라는 분은 우리가 찾아가자 소외받았던 그들의 일상을 영상으로 담는다는 것이 고마우셨는지 일일이 함께 다니며 자세한 설명을 해 주었다.

 

우리가 방문했을 때는 모든 문제가 거의 해결된 상황이었다. 결과는 철거민들의 승리, 즉 영구임대아파트의 쟁취였다. 우리는 연신 싱글벙글 웃으시는 아주머니들의 안내를 받으며 부담 없는 기분으로 여전히 굳건히 서 있는 골리앗을 찍고 무너진 담벼락을 찍고 그 뒤에 엄청난 위용을 뽐내며 집을 부수고 있는 포클레인을 찍었다.

 

그리고 염치없이 밥도 얻어먹었다. 철거지역 어르신들은 우리가 음료수를 사오자 꾸짖으시며 '앞으로 이런 거 들고 오려면 다시는 오지 마라'고도 했다. 서로가 쑥스런 웃음을 지으며 철거투쟁 과정을 담은 사진첩을 보고 지붕위에 올라가 있는 철거민, 돌을 던지는 철거반원을 가리키며 흘러간 추억인 양 이야기꽃을 피웠다.

 

당시 철거 투쟁 지역 중 거의 유일한 승리한 지역이라는 그 곳을 떠나며, 발걸음은 가벼웠었다. 학교로 돌아와 찍어온 필름을 보기 좋게 자르고 붙여 하나의 작품(?)을 완성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우리 조는 나쁘지 않은 점수를 받았고, 다 만들면 다시 한번 찾아뵙겠노라는 약속은 기억 저 멀리에 묻혀 버렸다.

 

되살아난 악몽, 철거되는 사람들

 

우리 조가 촬영을 할 때 반갑게 맞아 주시던 아주머니들, 아저씨들, 그리고 남아 있던 동네 꼬마 아이들을 다시 본 것은 얼마 뒤 어느 시사 잡지 표지에서였다. 우리에게 정말 맛있었던 저녁을 차려 주셨던 바로 그 아주머니는 마스크를 하고 한 손에는 쇠파이프를 들고 있었는데 그 아주머니 뒤로는 비슷비슷한 파마머리에 비슷비슷한 쇠파이프를 들고, 비슷비슷하게 연기에 그을리고 아주 비슷비슷하게 눈물을 흘리는, 바로 그 동네 아주머니들의 사진이 있었다.

 

"철거반원 철거 다시 시작", "철거민들과 약속 위반", "철거반원들 성추행" 등등의 자그마한 소제목이 달려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지금은 이름이 잘 기억나지 않는 아주머니 한분이 돌아가셨다는 기사를 보았다.

 

그 아주머니였을까? 나에게 '밥 더 줄까?'라고 물어보시던?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알기가 두려웠다. 정말 많이도 당황스럽고 혼란스럽고 멍해졌었지만, 우리는 그곳을 다시 찾아가지 못했다.

 

또 다른 과제를 하느라 바빴었는지, 아니면 그냥 용기가 없었었는지, 아니면 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아서였는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완성된 작품을 들고 찾아오겠노라는 약속을 아무도 지키지 않았다.

 

그리고 몇 년 후, 우연히 어떤 집회에, 정말 우연히 참여하게 되어 다시 그곳을 찾았다. 온갖 쓰레기와 연기에 그을린 담, 무너진 집들, 골리앗은 온데 간 데 없고 깨끗하게 지어 올린 아파트가 위로 쭉 뻗어 있었다.

 

우리는 어디 어디를 돌아서 넓은 공터 비슷비슷한 곳에 서 있는 추모비 앞에 섰다. 곧 추모행사가 있었고, 술과 안주가 돌려지고, 철거민의 아파트 입주를 축하하는 발언이 이어졌다. 몇몇 분들은 얼굴이 익었지만, 더 얼굴이 익었던 많은 분들은 보이지 않았다.

 

다른 분들은 어디에 계실까? 다른 약속이 있어 여기에 참석을 못하신 걸까? 아니면, 철거에 못 이겨 변두리로, 변두리고 이사를 다니고 있는 것일까? 알 수가 없었다. 알기도 두려웠다.

 

너무도 많이 달라진 그 공간에서, 난 동행했던 이들에게 예전에 이곳에 와본 적이 있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난 그 치열했던 철거의 현장에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그냥 그렇게 스쳐 간 것뿐이기 때문이다.

 

12년의 간격... 바뀐 것과 바뀌지 않은 것

 

12년 전 내가 본 것은 주택가의 골리앗에서 건물 옥상 위의 가건물로 바뀌었지만, 오늘도 어떤 이들은 단지 살아남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여전히 어떤 이들은 철거민을 보상금을 원하는 이기주의자로 지칭하고, 어떤 이들은 왜 저항하는가보다 도로의 정체가 언제 풀릴지에 더 관심이 많다.

 

정권을 바꿔야 한다기에 바꿨고, 누구는 꼭 대통령이 되면 안 된다기에 못 되게 했고, 또 이제는 먹고 살려면 좀 싫어도 경제를 살리는 누군가가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기에 그렇게 했던 것 같은데, 마스크에 쇠파이프, 화염병을 든 이들에게 바뀐 것은 망루 뒤의 배경뿐이다. 

 

인간보다 개발과 수익이 중시되는 세상에서는 언제 어디서건 철거되는 사람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노동자의 일터에서, 가장의 지위에서, 정상적이고 평범한 삶의 여러 경로에서 '철거되는 사람들'은 이제 어디서 망루를 치고 결사항전을 부르짖어야 하는가?

 

검게 솟아오르는 연기 속에 울부짖는 철거민들에게서, 없이 사는 것 자체가 죄가 되는 그 잘난 신자유주의 시대의 철거민으로 살아가야 하는 우리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 이상스런 신기루만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빌딩 옥상에 망루를 친 철거민으로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2004년 일산풍동 철거를 다룬 오마이뉴스 기사를 보고 끄적여 놓았던 글을 다시 정리해서 실은 것입니다. 1997년, 철거촌의 경험이나 2004년 일산풍동의 경험, 그리고 2009년 철거민의 죽음은 다만 잊혀지고 있었을 뿐, 여전히 우리사회에 존재하는 분명한 현실입니다. 


태그:#철거민, #골리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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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보다는 공통점을 발견하는 생활속 진보를 꿈꾸는 소시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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