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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크 전시관.
 탱크 전시관.
ⓒ 오승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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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도 하면, 끝없이 펼쳐진 은빛바다위로 살며시 고개를 내민 무수한 섬들, 바다와 하늘이 만나 하나를 이루고. 기암절벽에 부서지는 파도소리가 정겹게 들리는 곳이라는 이미지가 먼저 떠오른다.

어부들의 힘찬 뱃노래가 풍요로움을 더해주고, 맑은 공기, 깨끗한 물, 쪽빛바다의 청아함이 사시사철 색다른 장관으로 펼쳐지는 관광휴양도시 거제시를 지난 17일 지인들과 함께 방문했다.

거제시는 한반도의 동남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10개의 유인도와 64개위 무인도로 이루어져 있다. 면적은 401.45㎢에 해안선은 386,74㎞로 우리나라 섬 중에서 제일 긴 리아스식 해안선을 가지고 있는 제주도 다음으로 큰 섬이다.

디오라마관.
 디오라마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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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강 철교.
 대동강 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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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해금강, 대·소병대도, 외도보타니아, 내도, 공곶이, 바람의 언덕, 신선대, 학동흑진주몽돌해변, 구조라 해수욕장 등 아름다운 절경들이 남도 7백리 길에 즐비하고, 대우조선과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 등 굴지의 조선 산업과 관광산업이 거제시의 지역발전과 경제를 견인하고 있다.

거제시는 섬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도시냄새가 풀풀 나는 대규모 해양관광도시 같은 느낌을 준다. 사람들의 표정도 밝고 활기차다. 년 1만 명 이상의 인구가 증가하고 있는 현상에서 보듯, 거제시는 활력 넘치는 도시로 날로 발전하고 있다.

포로생활관내 전시물.
 포로생활관내 전시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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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수송관.
 포로수송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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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런 거제시에도 과거의 커다란 아픔과 슬픈 역사가 있다. 특히 민족의 비극인 6.25, 그 지워지지 않는 전쟁의 상처가 깊은 상흔으로 남아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가 그 아픔의 중심지다.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끊어 북한군의 남침 선봉에 섰던 소련제 T-34탱크 모형을 하고 있는 탱크전시관으로부터 포로수용소 관람을 시작했다. 탱크전시관 안에는 김일성과 스탈린 모택동, 이승만과 루먼, 맥아더의 입체상이 양쪽에 서 있다. 그 사이를 지날 때 묘한 기분이 들었다.

먼저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배치상황, 생활상, 폭동현장을 생생하게 재현해 놓은 디오라마관을 방문했다. 이곳은 그야말로 당시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현장상황을 축소해서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일대장관이요, 절묘한 연출기법이었다. 영상물의 시각 효과도 눈길을 끌었다.

포로막사.
 포로막사.
ⓒ 오승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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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라마관을 나와 6.25역사관으로 갔다. 이곳에는 전쟁발발에서 휴전에 이르기까지 한국전쟁의 참전 16개국 현황, 피해현황, 전쟁속 삶의 모습 등이 재현되어 영상물과 함께 6.25 전쟁의 피맺힌 역사를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었다. 이어 6.25 전쟁관에 앞에 섰다. 이곳에는 자유를 찾아 남한 행을 택한 피난민들이 파괴된 대동강 철교를 건너는 모습이 실물로 전시돼 있었다.

헌병초소가 지켜선 다리로서 포로출입의 주요관문이었던 M.P다리를 건너 제네바협정에 의거하여 자치적으로 수용소 생활을 영위했던 포로들의 일상생활의 모습을 당시의 사진과 모형, 영상자료를 통해 엿볼 수 있는 포로생활관과 국군과 유엔군의 강력한 반격과 공세에 투항하는 북한군의 모습이 생생하게 재현되어 포로생포 상황의 긴박감이 온몸으로 다가오는 포로생포관을 관람하면서 6.25전쟁의 비극을 새삼 절감했다.

친공포로와 반공포로의 사상대립이 매직비전을 통해 설명되는 포로사상대립관, 포로수용소에서 벌어졌던 친공포로들의 폭동과 친공·반공포로들 간의 격돌장면이 최첨단 복합 연출기법으로 재현되어 긴박감과 위기감을 생생하게 느께게 해주는 포로폭동체험관, 공산포로들의 지휘본부역할을 했던 포로수용소 막사, 부상당한 포로의 의료를 담당했던 64야전병원. 당시 17만 여명의 포로들의 음식을 배급했던 취사장 등도 인상적이었다.

취사장.
 취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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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도 포로수용소는 1950년 6월25일 한국전쟁에 의한 포로들을 수용하기 위하여 1951년부터 고현, 수월지구를 중심으로 설치되었다. 이 시설에는 인민군 포로 15만, 중공군 포로 2만, 여자 포로와 의용군 3천 명 등 최대 17만 3천 명의 포로가 수용됐다. 그 당시 거제에는 주민 10만 명, 피난민 약 15만 명, 포로 17만 등 약 42만여 명이 거주했다.

그러나 '반공포로'와 '친공포로'간에 유혈살상이 자주 발생하였고, 반목이 극심했다. 국제연합군측이 1949년에 체결된 제네바 협약의 송환원칙을 위반하고 포로들에게 본국귀환을 포기시키려고 협박과 고문을 하자, '친공포로'들은 격렬하게 저항했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또한 5월 7일 아침에 수용소 사령관 돗드 준장이 76포로수용소 시찰 중 납치 감금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후임인 찰스 콜슨이 돗드의 석방을 촉구하면서 5월 9일 고현지구 민간인 1116세대에 대해 24시간 이내에 다른 곳으로 가라고 강제 소개명령을 내렸다. 명분은 납치사건 및 폭동은 민간인과 포로 간의 접촉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주민들은 정든 땅과 집을 버리고 3년 동안 피난 아닌 소개민으로 생활하였다.

전세계가 주목했던 이 폭동은 돗드 준장이 납치된 지 4일 만에 석방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그 후에도 수용소 내에 이러한 크고 작은 폭동이 계속되었으나, 1953년 6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이 '반공포로' 2만7389명을 석방시키고, 7월 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되자, 수용소는 폐쇄되었다.

전쟁의 상흔.
 전쟁의 상흔.
ⓒ 오승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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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잔존건물 일부만 곳곳에 남아 있는 이곳은 당시 포로들의 생활상, 막사, 사진, 의복 등 생생한 자료와 기록물들을 바탕으로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으로 다시 태어나 전쟁역사의 산 교육장 및 세계적인 관광명소로 각광을 받고 있다.

6.25 한국전쟁의 아픔을 딛고 통일을 희망하는 역사의 현장으로 거듭나고 있는 거제도 포로수용소. 구석구석 돌아보며 잊혀 가는 6.25의 실상들을 후손들에게 역사의 교훈으로 물려 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다시는 한반도에서 이러한 비극이 일어나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포로설득관.
 포로설득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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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거제포로수용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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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와 국민을 위한 봉사자인 공무원으로서, 또 문학을 사랑하는 시인과 불우한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것을 또 다른 삶의 즐거움으로 알고 사는 청소년선도위원으로서 지역발전과 이웃을 위한 사랑나눔과 아름다운 일들을 찾아 알리고 싶어 기자회원으로 가입했습니다. 우리 지역사회에서 일어나는 아기자기한 일, 시정소식, 미담사례, 자원봉사 활동, 체험사례 등 밝고 가치있는 기사들을 취재하여 올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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