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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사는 세상>은 전문직 드라마가 무엇인지를 확실히 보여줬다.
 <그들이 사는 세상>은 전문직 드라마가 무엇인지를 확실히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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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희경표 드라마에 흔히 따라붙는 딜레마는 '작품성은 좋은데, 대중성이 부족하다'는 지적이다. 그래서 노희경 드라마는 '마니아 드라마'의 전형으로도 불린다. 좋은 드라마인데 시청률은 안 나온다? 시청률이 곧 드라마의 가치를 모두 대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TV 드라마가 지향하는 가치를 감안할 때 대중성이 부족한 작품을 좋은 드라마, 명품 드라마라고 변호할 수 있는지는 아쉬움이 남을 법하다.

<그들이 사는 세상>은 노희경표 마니아 드라마에 또 한 번의 숙제를 남겼다. 송혜교와 현빈이라는 청춘스타와의 만남, 깁갑수, 윤여정 배종옥, 김창완, 김여진 등으로 이어지는 탄탄한 캐스팅, 여기에 최근 드라마의 트렌드인 방송가 이야기를 정면으로 다뤄낸 매력적인 소재와 표민수-노희경 콤비의 재회라는 화제성까지. <그사세>는 인기 드라마가 될 수 있는 조건을 두루 갖췄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드라마는 마니아층의 한계를 넘지 못했다. <그사세>는 방영 내내 한 번도 두 자릿수 시청률을 넘지 못했다. 경쟁작 <에덴의 동쪽>의 인기에 눌린 탓도 있겠지만, 단지 그것만으로 <그사세>의 부진을 설명하기에는 개운치않다.

전문직 드라마의 미덕은 가졌지만, '매력'은 없는 <그사세>

동시간대 방영되는 <그사세>와 <에덴>은 정확히 다른 목표를 지향하는 드라마였다. 대하서사극 <에덴>은 한마디로 '낡은' 드라마다. 화려한 스타캐스팅과 거대한 서사적 스케일, 액션으로 무장했지만 드라마의 정체성은 결국 70~80년대적 통속신파극의 구성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한 복고풍 드라마다. 극중설정의 진부함이나 배우들의 연기력 논란으로 끊임없이 네티즌의 조롱거리가 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덴>은 매회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승승장구하고 있다. 마치 불륜일색의 일일·아침극처럼 '욕하면서도 보는' 아니 어쩌면 '욕하는 재미로 보는(?)' 드라마의 반열에 올라섰다는 평가다. <에덴>의 인기 원동력은 곧 <그사세>의 흥행실패 이유와도 이어진다. 반대로 <그사세>가 찬사를 받는 이유는 곧 <에덴>이 욕을 먹어야하는 이유와도 같다.

<에덴>은 시청자가 보고싶어하는 것을 가장 자극적인 방식으로 표현하는 드라마였다. 그러나 <그사세>는 시청자가 원하는 것을 보여주지 않았다. 오히려 작가나 배우들이 보여주고 싶은 주제를 전달하는 드라마였다. 이점은 비슷한 방송가 이야기를 다룬 <온에어>와도 대조되는 부분이다. <온에어>는 시청자들의 궁금해하는 연예계 가십의 이면을 재구성했다면, <그사세>는 화려한 연예계가 아니라, 드라마 제작이라는 일터를 무대로 활동하는 직업인들의 이야기를 보여줬다.

어떤 의미에서 <그사세>는 <스포트라이트>와 함께 올해 방영된 작품중 몇 안 되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전문직 드라마'라고 할 만했다. 말랑말랑한 삼각관계나 출생의 비밀, 억지스러운 흥행공식에 휩쓸리지 않고, 특정분야의 일상적 리얼리티와 디테일이 살아있는 '미드'(미국드라마식)나 일드(일본드라마)식 진짜 전문직 드라마를 얼마나 많은 팬들이 이야기했던가.  

그러나 다수의 시청자들은 오히려 정작 진짜 전문직 드라마가 안방극장을 찾아왔을 때는 차갑게 외면했다. <그사세>는 전문직 드라마의 미덕은 가지고 있었지만, 매력은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시청자들이 기대한 것은 '직업의 현실'이 아니라, 직업의 재구성이었다. 전문직 드라마의 리얼리티는 드라마의 극적 재미를 높이기 위한 수단일뿐, 그 자체가 목표가 되어서는 대중적으로 어필하는데 한계가 있음을 확인한 것이다.

끝없이 고민하고 사색하는 <그사세> 캐릭터들

<에덴>이나 <온에어>가 핫하고 감상적이라면, <그사세>는 쿨하고 차분했다. 등장인물과 무대배경은 꾸준히 이어지지만, 커다란 중심플롯 없이 매회 일상적인 에피소드가 조금씩 이어지는 미드의 옴니버스식 구성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자극적인 사건과 캐릭터 위주의 구성에 익숙한 국내 시청자들에게는 '심심하게' 다가왔다.

송혜교·현빈의 멜로 구도와 통속적 구성이 전혀 없지는 않았지만 궁극적으로 드라마의 차분하고 정적인 분위기를 바꿀 정도는 아니었다. 이런 작품은 한두회 정도를 놓쳐도 스토리를 따라잡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매 장면에 담겨진 풍부한 의미와 극적 재미에 몰입하기는 오히려 어렵다. 아무 때나 채널을 돌려서 중간 정도부터 봐도 재미있는 <에덴>이나 <온에어>와 달리, <그사세>는 처음부터 인물과 스토리에 깊숙이 몰입할 준비가 되어있지않으면 그냥 볼거리 없는 밋밋한 드라마로만 인식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들이 사는 세상>
 <그들이 사는 세상>
ⓒ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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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황기에는 흔히 원초적인 감성을 자극하는 아이템들이 잘먹힌다는 마케팅 자료들도 있다. 코미디나 액션, 신파 멜로같이 확실한 장르적 색채와 매력을 지닌 작품들이 환영받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관객들은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짧은 순간 그 이야기나 비주얼에 가볍게 몰입했다가 금방 빠져나올 수 있는 작품들을 선호한다. 

<그사세>의 인물들은 어찌보면 비주얼보다는 텍스트적이고, 일상인이라기보다는 감수성 뛰어난 문학도스러운 캐릭터들이다. 끊임없이 고민하고 사색하며, 시청자들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존재들이다. 일상 속에서 일터 속에서 부딪히고 겪게되는 수많은 사람과 사연들 속에서 그들은 일의 가치, 드라마의 가치, 사랑의 본질, 인간의 근원적인 고독감에 대하여 고민한다. 그속에는 직접 드라마를 생산해는 주체로서의 치열한 자아비판과 반성적 의미도 담겨있다.

물론 이런 시도가 꼭 좋은 결말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보는 이에게 사색을 권유하는 드라마는 충성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는 시청자들에게는 피곤하다. 가끔식은 작가의 지나친 자아가 극중 캐릭터의 행동이나 대사를 통하여 표출되는 순간에는 어설픈 '설교주의'로 흐르거나 자기 변명의 냄새가 묻어나 거부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명품 드라마라는 찬사를 받는 만큼이나, <그사세>에서 드러나는 드라마의 지나친 자의식이 주는 함정은 비판받을 부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사세>는 나름의 존재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이 드라마의 대중적 한계는 곧 이 작품만의 장점이기도 했다. 시청자들의 입장에서 재미있다는 표현은 상대적이다. 드라마는 불특정 다수를 위한 드라마지만, 다수를 위한 드라마만이 꼭 좋은 드라마는 아니다. 

오직 대중성만을 지향하는 드라마들이 넘쳐나는 최근의 추세속에서 <그사세>의 등장은, 한국 드라마가 빈약하나마 최소한의 다양성을 지키고 있다는 일종의 상징이기도 했다. <그사세>가 비록 대중적으로 성공하지는 못한 작품으로 기억될지라도, <그사세>가 던진 화두와 드라마적 의미는 다른 전문직 이야기나 마니아 드라마로 계승되어 하나의 좋은 교훈과 노하우로 남게 될 것이다.


태그:#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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