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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고 이영권 선생)은 죽음으로 우리에게 희망을 찾아주려 했으나 일년여의 시간이 지났어도 도무지 희망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어. 지난 겨울이 힘들었지만 앞으로 닥칠 이번 겨울은 몇 배 더 힘든 겨울이 될 것 같아. 도대체 어떻게 살까 걱정에 잠도 안오네요."

 

11월의 마지막 날인 지난 30일 오전 11시경 충남 태안군 소원면 의항리 해수욕장 진입로 언덕 길에 위치한 비닐하우스에서 연신 굴을 까고 있는 네 명의 아주머니들 사이에 있던 고 이영권 선생의 부인 가재분(62)씨는 긴 한숨 속에 한 마디를 내던지고는 또 다시 침묵 속에 굴을 까고 있었다.

 

시간이 돈인지라 기자와의 눈이라도 마주치고 대화를 하면 굴 까는 시간을 놓치게 될 정도로 가씨는 촉각을 다투며 주위의 아주머니들과 경쟁이라도 하듯 굴을 까고 있었다. 기자도 한 시간 넘게 그의 굴 까는 모습을 지켜보며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이렇게 한 시간여를 기다린 기자는 가씨가 직접 깐 굴을 넣고 손수 끊인 칼국수를 함께 굴 까는 작업을 하던 아주머니들과 어울려 두 대접이나 맛있게 얻어먹었다. 순식간에 식사를 마친 아주머니들은 그릇을 치우자마자 다시 장갑을 끼고는 굴을 다시 까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시간을 다투는 육상 선수를 보는 듯 했다.

 

가씨는 커피 네 잔을 끊여 아주머니들과 마시고는 다시 작업을 시작했다. 인터뷰 하러 온 기자가 미안할 정도로 조용한 가운데 서로 경기를 하듯 굴을 까는 모습 속에서 이들에게 닥친 삶의 위기의식을 확인 할 수 있었다.

 

"그 좋던 내 굴 밭을 빼앗기고 남의 굴(이원면에서 가져온 굴)을 까야 한다니 이게 말이 됩니까?"

 

기름으로 망쳐진 굴 밭을 모두 철거당하고 겨울이 다가 오자 호구책으로 인근 이원면의 굴을 날라와 kg당 2000원의 까는 품삯으로 굴을 까고 있으니 속으로 열불이 난다는 얘기다. 하루 종일 까야 3~4만원의 일당을 챙길 수 있단다. 그것도 잘 까고 자는 시간을 빼고는 새벽부터 늦은 저녁까지 까야 받을 수 있는 돈이다.

 

"지난해 같으면 내 굴 밭에서 따다가 작업을 하면 하루에 14~15만원은 벌였어요"라고 말하는 가씨의 목소리는 서러움과 분노가 가득 차있었다.

 

 

마을 굴밭 망가지고 난 후 방제 작업으로 연명

 

가재분씨를 비롯한 의항 2리 사람들은 그나마 이번 주까지는 6~7만원의 일당을 받으며 평일 방제 작업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인원이 60명으로 제한되어 한 집에 1명씩 14일 정도 차례가 온다고 한다. 방제 작업이 없는 날이면 어김없이 이곳에 보여 굴을 깐다. 아니 방제 작업이 있는 날도 아침 저녁으로 또 모여 굴을 깐다. 그래도 도무지 삶의 희망이라고는 보이지를 않는다고 한다.

 

그나마 이번 주에  방제 작업을 마치고 나면 굴이라도 계속 까야 하는데, 이마저 여의치 않아 보인다. 그동안 자존심에 남의 굴을 안 간다던 사람들도 방제 작업이 끝나면 굴을 까는 작업에 나선다고 한다. 그만큼 작업 물량이 없어진다는 얘기이다.

 

"도무지 희망이라고는 보이지 않네요."

 

한동안 말을 못하고 고개를 떨구고 있는 가씨의 모습을 보노라니 누가 이처럼 절망의 터널로 점점 빠져들게 만들고 있는지 화가 치밀 정도였다. 하우스 안에 들어온 굴을 까는 작업을 마치고는 함께 일을 하는 아주머니들의 배려로 가씨와 본격적인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큰 아들 장가가 직장생활하고, 딸에 시집가서 잘 살고 있고 단지 막내아들만 생각하면 미안해 죽겠네요."

 

지난해 발생한 원유 유출 사고는 가씨의 가정에 돌이킬 수 없는 불행을 안겨주었다. 동네에서 어느 정도 굴 밭을 가지고 있었고 두 부부의 굴 까는 실력은 동네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소득이 높았었는데, 사고 이후 남편은 깊은 절망에 죽음을 선택했고, 막내  아들은 아버지도 잃고 결혼식도 못 올리고 살아야 하는 처지다.

 

"지금도 막내아들만 생각하면 부모로 제 역할을 못해 주어 미안해 죽겠어요. 기름 사고만 안 터졌으며 남편이 죽음을 선택할 일도 없었을텐데. 작은 아들이 떳떳하게 결혼식도 못 올리고 동거 생활을 하게 만들었으니."

 

가씨의 눈에는 일순간에 회한과 분노의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가씨를 더욱 힘들게 하는 것은 가족들과 마을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희망의 돌파구를 마련해 주기 위해 죽음을 선택한 남편의 죽음 이후에도 딱히 나아지기는 커녕 점점 절망으로 내몰리고 있는 것. 자신과 주민들의 모습을 보면서 혹여 남편과 같이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또 다시 생길까하는 두려움이 앞선단다.

 

"말도 마세요 이제 이번 주에 방제 작업을 끝나면 그야말로 이 동네 사람들은 할 일이 없어요. 일이 없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요."

 

옆에 있던 한 아주머니의 말씀은 의미심장한 말로 다가왔다. 이어 "미안한 얘기이지만 데모를 한다고 해도 살기 위해 굴을 까야 하는 심정을 이해할지 모르겠네요"라는 말은 이들의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이었다.

 

 

"남의 굴이라도 까야 살 수 있어"

 

가씨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영결식에서, 국회 특별법 공청회장에서, 국회 농식품위 국정감사장에서, 소원면민화합체육대회장에서 마을 주민들과 흥겹게 춤을 추던 모습을 기억한다. 그러고 보니 가씨는 의항2리 부녀화장을 맡아 동네일에도 열심을 하고 있어 동네 사람들의 칭찬을 듣고 있었다.

 

"남편을 먼저 보내고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고 남들 앞에서는 웃었지만 집에 와서는 많이도 울었지요."

 

한국 사회에서 사별한 부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그것도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남편을 앞세워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끝내 말을 흐리고 있었다. 가씨는 사고 1주년을 기념해 열리는 자원 봉사 대회에 대해서도 "동네가 다 망했는데 무슨 기념식을 한 대요. 그런 행사 할 돈이 있으면 우리 동네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먼저 아닌가요"라고 할 정도다.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주민들은 이제 굴까는 작업마저 곧 중단이 되면 기본적인 생활비(전기세, 기름값 등)를 대기에도 힘든 형편이에요. 새로운 일자리가 시급합니다. 안 그러면 우리 동네 사람들은 삶 자체가 막막해져요"고 말하는 가씨의 모습에서 자신의 어려움을 넘어 이제는 동네를 위해 무엇인가 하려는 일종의 책임감을 느낄 수 있었다.

 

두 시간이 넘는 시간 중에 고작 말을 나눈 것은 30여분이 조금 넘는다.

 

하지만 가씨의 굴까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가 우리들에게 무엇을 말하려는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시간이였다. 다른 언론의 인터뷰를 거절하면서도 흔쾌히 시간을 내주고 자신의 속내를 내비쳐준 가씨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인터뷰 하는 시간에 굴 작업을 했다면 그에게 얼마의 경제적으로 소득이 생겼을 것을 생각하면 송구스럽기까지 하다.

 

"사는 것이 제일 힘들다"는 가씨의 마지막을 들으며 돌아서려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제 그의 얼굴에 웃음을 주는 일과 고 이영권 선생의 죽음의 의미에 대해 진지한 재평가와 추모 사업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시간이 되었음을 확인하고 돌아왔다.

덧붙이는 글 | 바른지역언론연대 태안신문에도 실립니다


태그:#태안기름유출사고, #고 이영권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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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자치시대를 선도하는 태안신문 편집국장을 맡고 있으며 모두가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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