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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의 한 자동차 부품업체 회계팀에서 근무하는 이규봉(41)씨는 마라톤 마니아다. 가끔 시간이 날 때 동네 한 바퀴 뛰는 정도가 아니라 거의 매일 시간을 내서 연습을 한다. 실제 아마추어 마라톤 대회에도 나간다. 이씨는 지난 10월에 열린 동아마라톤 하프코스 대회에서 2시간 안에 결승점을 통과했다. 그 때 받은 참가메달을 손님들 눈에 가장 잘 띄는 거실 벽에 걸어두고 있다.

"요즘 회사 분위기가 많이 좋지 않아요. 특히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하루하루가 바늘방석일 정도로 회사 공기가 살벌하죠. 숨이 막힐 듯한 이런 회사 생활을 견딜 수 있게 해 주는 게 저에게는 마라톤입니다. 21km를 뛰다보면 업무 스트레스가 확 날아가고 마지막에는 무념이 되기도 하지요."

이규봉씨는 마라톤이라는 취미활동을 통해 업무 처리를 위한 에너지를 충전한다.

경기도 포천의 한 중소기업에 다니는 김태순(48)씨는 매주 바위산을 탄다. 고등학생 때 입문한 암벽등반이 그에겐 이제 생활이다. 포천의 산정호수가 내려다보이는 명성산 책바위에 슬랩(경사 70도 이하의 바위를 말하는 암벽등반 용어) 루트를 개척한 사람이 바로 김태순씨다.

김씨 회사에도 최근 감원바람이 불었다. 다행히 김씨는 살아남았지만 대신 함께 일하던 동료 몇 명이 회사를 떠났다. 이 때문에 김씨에게 돌아온 업무량은 자연스럽게 많아졌지만 월급이 오르는 걸 기대하기는 힘든 형편이다. '회사에 계속 다닐 수 있는 것 자체가 행운'이라고 말하는 김씨는 금요일 잔업처리를 마치고 나면 바로 배낭을 꾸린다.

동두천에서 분식점을 운영하는 하승원 씨는 배스낚시 동호회 활동을 통해 삶을 재충전한다.
 동두천에서 분식점을 운영하는 하승원 씨는 배스낚시 동호회 활동을 통해 삶을 재충전한다.
ⓒ 김동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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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악회원들과 함께 바위를 오르면서 속옷까지 흠뻑 젖을 정도로 땀을 흘리면 삶에 대한 새로운 의욕이 솟습니다. 그러면 도저히 못 버텨 낼 것 같은 힘든 일도 해 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죠."

김태순씨는 암벽등반이라는 자신만의 탈출구가 없었다면 회사에서, 혹은 거래처에서 받는 업무스트레스를 견뎌내지 못할 것이라고 한다.

경기침체 계속 될수록 북적거리는 낚시터와 등산로

이처럼 최근 많은 직장인들은 자신만의 스트레스 탈출구를 취미활동에서 찾고 있다. 과거에는 선술집이 이들의 스트레스 해소 공간이었다면 이제는 산이나 낚시터, 혹은 기타 동호회 활동 등이 이들의 스트레스 해방구 역할을 하는 것이다.

지금 10년 째 낚시잡지 기자로 일하는 나는? 남들이 보기에는 가장 복 받은 직장인 중 하나일 게다. 최소한 낚시꾼들이 보기에는 그렇다. 그들은 내가 전국 낚시터를 두루 섭렵하고 다니며, 실컷 낚시를 즐길 수 있다고 부러워한다.

나는 이들의 이런 말을 일부 수긍한다. 지금 나는 낚시터에 가면 취재 겸 스스로 낚시를 즐길 줄 안다. 그러나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나는 그다지 낚시를 즐기지 않았다. 수년 전 낚시란 나에게 있어 그저 일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새벽에 낚시회 버스를 타고 물가를 찾아가는 게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이런 고역을 이기기 위해 언제부턴가 나는 일이 아니라 여행을 한다는 생각으로 낚시터를 찾아다녔다.

그리고 실제로 낚시터 취재와는 별도로 낚시터 주변 여행지나 볼거리 등을 취재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렇게 취재해서 쓴 여행기사 등을 다른 매체 등에 보내어 짭짤한 원고료 수입을 챙기기도 했다. 그리고 쉬는 날이면 암벽등반을 하거나 등산을 하면서 내 일의 피로(?)를 풀었다.

나는 지난 여름 거의 매주말 6살짜리 딸과 함께 산을 오르면서 다시 한 주를 살아낼 힘을 얻곤 했다.
 나는 지난 여름 거의 매주말 6살짜리 딸과 함께 산을 오르면서 다시 한 주를 살아낼 힘을 얻곤 했다.
ⓒ 김동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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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지금은 일이 곧 취미가 되고 있다. '어차피 가야 되는 낚시터, 나도 한 번 해보자'는 생각을 했고, 한두 번 손맛을 보게 되자 이 또한 재미가 붙었던 거다. 그래서 지금 나는 낚시와 암벽등반을 하면서 여행을 즐긴다.

경기 침체가 길어지면 서민들 지갑은 닫히기 마련이다. 특히 당장 '먹고사는 것'과 무관한 지출이 줄어든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경제가 어려울 때일수록 산이나 낚시터를 찾는 사람들은 더 늘어나는 경향이 있다. 실제 지난 1997년 외환위기 때는 주말 낚시터마다 꾼들이 북적거렸고, 서울 근교 등산로에도 먼지가 일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산을 찾았다고 한다.

취미활동 넘어 준프로급 실력자도 수두룩

지금 우리나라는 '제2의 외환위기' 운운할 정도로 서민경제가 흉흉하다. 그리고 여전히 주말이면 낚시터와 산이 많은 사람들로 붐빈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산이나 낚시터를 찾은 지금 현상은 97년 외환위기 때와 약간 다른 측면이 있다. 97년 외환위기 때는 실직자들이 더 많이 산과 물을 찾았다면 지금은 앞에서 든 예처럼 일터에서 버텨낼 수 있는 활력을 얻으려는 사람들이 적극적인 '마니아'층을 형성하고 있는 거다.

경기도 광명에서 노인요양시설을 운영하고 있는 김명주(32)씨는 지난 5월 처음 낚싯대를 잡은 후 이제는 준프로 낚시인이 돼 버렸다. 실제로 김씨는 지난 9월 열린 한국다이와정공 헤라마스터즈 대회(떡붕어 중층낚시 대회)에 출전해서 쟁쟁한 남자 선수들을 제치고 결승까지 진출하는 녹록지 않은 실력을 보였다.

지난 5월에 처음 낚싯대를 잡은 김명주 씨. 이제는 전국 규모의 낚시대회에서 남자 선수들과 당당히 어깨를 겨루는 준프로 낚시인이 됐다.
 지난 5월에 처음 낚싯대를 잡은 김명주 씨. 이제는 전국 규모의 낚시대회에서 남자 선수들과 당당히 어깨를 겨루는 준프로 낚시인이 됐다.
ⓒ 김동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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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지금 젊은 직장인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찾으면서 일터에서 '살아남기' 위한 에너지를 충전하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통해 삶의 팍팍함을 위안 받고, 더 나아가 그 성취감까지 맛보고 있다.

좀 다른 경우이긴 하지만 봉사활동 등을 통해 생활의 활력을 얻는 사람도 많다. 대구의 한 공구회사에 다니는 최호중(31)씨는 회사 내 봉사활동 동아리 '책임 파랑새 봉사단' 활동을 통해 삶의 여유를 느낀다.

"장애인이나 독거노인들을 도우면서 느끼죠. 직장이 있고 신체 건강한 나는 참 복이 많은 사람이라고. 그래서 봉사활동을 하고 나서 집으로 돌아오는 저녁이면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지요."

최씨는 지난 11월 초 봉사동아리에서 모은 회비와 회사 지원비로 마련한 연탄 3000장을 독거노인들에게 직접 배달했다.

이처럼 지금 시대를 사는 젊은 직장인들은 이제 더 이상 회사 앞 선술집에서 한주의 피로를 풀지 않는다. 자신이 즐겁게 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아 나선다. 그래서 이들에게 낚시와 등산, 마라톤 같은 레저활동은 소비행위가 아니다. 자신을 추스르고 스스로에게 에너지를 불어넣는 일종의 생산적 주술행위이다.

이들은 이번 주말에도 산과 낚시터, 봉사단체 등에서 '난 내 인생을 즐기고 있다'는 주문을 걸고 그 주문의 힘으로 다음 한 주를 버틴다.


태그:#낚시, #등산, #레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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