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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바람의 화원>에서 신윤복역을 열연하고 있는 문근영.
▲ 문근영 드라마 <바람의 화원>에서 신윤복역을 열연하고 있는 문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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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여 년 전. 이 땅에 살다간 화가 신윤복이 살아서 돌아온 느낌이다. 그의 작품을 제일 많이 소장하고 있는 간송미술관이 '만원사례' 비명을 지르고 모든 매체가 신윤복을 다루고 있다. 가히 혜원 신드롬이다.

SBS 드라마 <바람의 화원>이 신윤복을 남장 여자로 그려내면서 불을 지폈다. 여기에 신윤복 역을 맡은 배우 문근영이 6년간 8억5천만원이라는 거금을 익명으로 기부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열풍이 불고 어쭙잖은 색깔논쟁까지 붙으면서 상승기류를 타고 있다.

여기에서 한 가지 분명히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신윤복은 분명히 남자다. 이정명의 동명소설을 드라마화 한 <바람의 화원>은 드라마일 뿐이다. "역사왜곡이다", "상상이 발칙하다"며 딴지 걸지 말고 드라마는 드라마로 봤으면 좋겠다. 또한 천사의 선한 가슴에 왜 주홍글씨를 새기려 하는가? 추악한 날갯짓이다. 오른쪽에도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은 것 같다.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화가에 김홍도와 신윤복이 있다.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가 질박하고 투박한 반면 혜원 신윤복의 그림은 도시적이고 세련된 느낌이다. 불과 열세 살 나이차인데 어디에서 이런 화풍의 차이가 나왔을까?

신윤복은 집안의 세습으로 궁중에 들어가 그림을 그렸다. 김홍도는 김응환으로부터 그림을 배워 궁궐에 진입했다. 그림 입문 동기는 신윤복이 주류였고 김홍도가 비주류였다는 뜻이다.

최고급 스포츠카 뺨치는 인테리어

혜원 신윤복의 년소답청(年少踏靑).지본채색 (紙本彩色). 35.6x28.2cm/간송미술관 소장
▲ 년소답청 혜원 신윤복의 년소답청(年少踏靑).지본채색 (紙本彩色). 35.6x28.2cm/간송미술관 소장
ⓒ 간송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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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소답청(年少踏靑)을 살펴보자. 때는 바햐흐로 꽃피는 춘삼월. 새 봄을 맞이하여 젊은이들이 답답한 청루(靑樓-기생집)를 벗어나 봄놀이에 나섰다. 인원은 남자 셋 여자 셋. 딱 짝을 맞췄다. 타고갈 말도 준비했다. 이들이 타고 가는 말(馬). 이거 보통 물건이 아니다. 오늘날 의 최고급 스포츠카 뺨친다.

색깔도 흰색, 검은색, 황색 골고루 갖췄다. 발목이 날씬한 것으로 보아 왕실 목장에서 길러 임금으로부터 하사받은 말인 것 같다. 특히 흑마는 포르쉐 파나메라를 떠올리게 한다. 마구도 요란뻑적지근하다. 화려한 안장 아래 검은 언치를 덧댔다. 엉덩이를 휘감은 마대(馬帶)를 배 아래로 늘어뜨린 것이 스포일러를 연상시킨다. 철재 등자를 가죽으로 감쌌고 면식에 꽃을 꽂았다. 오늘날 졸부 자녀들이 억대가 넘는 외제 스포츠카에 갖은 인테리어를 한 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

여자 세 명 중 10대가 두 명이고 20대가 한 명이다. 배경을 중요시하는 혜원은 풀 한포기, 돌멩이 하나를 예사로 그리지 않았다. 바위 골짜기에 피어있는 진달래의 포기로 암시하고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짝을 맞춘 남자 셋, 여자 셋 중에서 이미 육체관계를 맺은 사이를 내밀히 표현하고 있다. 가채머리에 꽂아준 진달래 꽃이 운우의 징표다.

오른쪽 남자는 품새로 보아 마부 같지는 않다. 보라색과 옥색천으로 누빈 저고리에 향낭(香囊)을 달았다. 요새는 아무나 향수를 뿌릴 수 있지만 당시 향낭을 찰 정도면 권문세도가집 자제가 아니면 꿈도 못 꿨다. 홍록(紅綠) 주머니를 길게 늘어뜨리고 행전은 짧고 중치막의 뒤폭이 걸을 때마다 나풀거리게 한 것이 여간 멋을 낸 게 아니다. 최첨단 패션 감각을 살렸다.

한껏 멋을 부린 것으로 보아 대갓집 도령 같은데 머리에 벙거지를 쓰고 말고삐를 잡고 있다. 마부일까? 아리송하다. 하지만 맨 왼쪽, 맨 상투에 갓을 들고 뒤따라가는 남자를 연결 지어 생각하면 답이 나온다. 오른손에 갓을 들었지만 왼손에 말 채찍을 든 행색이 영락없는 구종(驅從)이다.

다시 설명하면 자기가 타고 다니던 말에 여자를 태우고 자신은 마부를 자임하고 나선 것이다. 오늘날로 해석하면 헌팅에 나선 젊은이가 자기의 스포츠카에 여자를 태우고 자신은 운전사를 자청한 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

두 번째 검은 말을 살펴보자. 역시 말에는 노란 바탕에 보라색 회장을 댄 저고리를 입은 기생이 타고 말 주인은 걷고 있다. 마상의 여자가 담배가 피우고 싶나보다. 요염한 자세로 손을 내미니 사내는 장죽에 불붙여 두 손으로 받들어 올리느라 여념이 없다.

아래 그림은 늦게 출발한 남자가 앞서간 일행을 따라잡기 위하여 눈썹이 휘날리고 갓은 벗겨져 있다. 마상에 있는 여인은 쓰게 치마를 뒤집어썼지만 바람에 휘날리고 가느다란 허리가 드러나 있다. 역시 여자의 세요(細腰)는 예나 지금이나 시대의 트렌드다. 이러한 상황 묘사는 실제 경험했거나 보지 않고서는 그려낼 수 없는 상황이다.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 <씨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씨름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 <씨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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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습화가 집안에서 태어난 신윤복

신윤복은 1758년(영조34년) 궁중화가 신한평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신한평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궁중화사가 되었듯이 그의 집안은 8대에 걸쳐 의원, 역관, 주서 등의 세습 중인집안이었다. 노비가 매매되고 종(從)이 세습되던 시대. 대궐을 드나들 수 있는 중인집안은 왕족이나 사대부처럼 상류층은 아니었지만 오늘날의 중산층보다 상위계층이었다.

혜원의 아버지 신한평은 1781년 한종유, 김홍도와 함께 정조의 어진작업에 참여할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는 궁중화가였다. 뿐만 아니라 건강하여 75세까지 도화서에 출사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장수가 신윤복에게 오히려 걸림돌이 되었다.

도화서에 출사한 혜원은 재능을 인정받아 아버지와 같은 종3품 첨사(僉使)에 올랐다. 여기에서 신윤복의 고민이 싹텄다. 아버지와 함께 동급벼슬로 도화서에 있기가 민망하여 스스로 도화서를 박차고 나와 민중 속으로 들어갔다.

이때부터 신윤복의 역사적 소명이 발동했다. 그는 사대부들이 좋아하는 산수, 인물, 화조 묵죽화를 그리지 않고 사람들의 모습을 그리기 시작했다. 때론 야하게, 때론 날카로운 그의 시선은 시대를 조롱하고 비판하는 반골정신이 번뜩인다. 사관이 붓으로 역사를 기록했다면 그는 붓으로 시대를 그렸다. 젊은이들의 봄나들이를 그린 년소답청도 그 중 하나다.

야간통행금지를 어기면 열음기막(閱陰氣幕)에 구치되었다가 파루가 지나면 곤장 10대를 맞고 풀려나던 시대. 청 소매로 보아 당상관 이상 벼슬아치가 통금위반으로 순라꾼에게 걸렸다. 위계질서 상 한참 아래인 순라꾼에게 갓 테를 숙여 사과하는 사대부 체면이 말이 아니다. 이 그림에서 혜원은 고관대작들의 법 무시 풍조를 그렸고 순라꾼의 화려한 관복과 통금위반자의 주머니를 가리키는 순라꾼의 손가락으로 부패한 관료를 신랄히 비판하고 있다.
▲ 야금모행 야간통행금지를 어기면 열음기막(閱陰氣幕)에 구치되었다가 파루가 지나면 곤장 10대를 맞고 풀려나던 시대. 청 소매로 보아 당상관 이상 벼슬아치가 통금위반으로 순라꾼에게 걸렸다. 위계질서 상 한참 아래인 순라꾼에게 갓 테를 숙여 사과하는 사대부 체면이 말이 아니다. 이 그림에서 혜원은 고관대작들의 법 무시 풍조를 그렸고 순라꾼의 화려한 관복과 통금위반자의 주머니를 가리키는 순라꾼의 손가락으로 부패한 관료를 신랄히 비판하고 있다.
ⓒ 간송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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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를 남겼으나 사망 연대도 몰라

기생과 악공을 동반한 세도가의 들놀이를 묘사한 상춘야흥(賞春野興). 계곡에서 머리감는 여인들의 모습을 그린 단오풍정,(端午風情) 대갓집 후원 별당에서 가야금소리를 듣는 청금상련(聽琴賞連), 통행금지 시간에 기생과 밤 나들이를 하다가 순라꾼에게 고초를 겪는 사대부를 그린 야금모행(夜禁冒行), 헤어지기 싫은 남녀의 심리를 절묘하게 묘사한 월하정인(月下情人) 등 걸작을 남겼으며 그의 화첩은 국보 제135호로 지정되었다.

허나, 풍속화의 백미로 꼽히는 그의 작품도 그 당시로서는 그닥 영양가 없는 그림이었다. 체면과 엄숙을 따지는 사대부들이 퇴폐스럽고 천박하다고 딱지를 붙일 수 있는 그의 작품을 누가 거금을 주고 소장했겠는가? 궁색한 그는 춘화를 그리기도 했지만 끝내 한 점 혈육 남기지 않고 사라져 갔다. 사망 연대도 밝혀진바 없다. 그는 진정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사족 하나. 년소답청(年少踏靑)이란 제목이 좀 거시기 하다. 미술평론가가 후대에 이름 붙였을 터. 혜원이 그림을 그릴 때에는 특별하게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이 작품은 혜원전신첩이라는 30폭 화첩의 일부라는 것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림에 등장하는 남자들이 상투를 튼 것으로 보아 관례를 치른 성인이다. 당시 사회 관습은 미혼이라 하더라도 관례를 치르고 나면 성인으로 대접해주었다. 청년답청이나 한량답청이 더 어울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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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문근영, #단원, #혜원, #풍속화, #년소답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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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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