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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근일 전 <조선일보> 주필이 28일 서울 강북구 창문여고에서 '현대사 특강'을 하고 있다.
 류근일 전 <조선일보> 주필이 28일 서울 강북구 창문여고에서 '현대사 특강'을 하고 있다.
ⓒ 이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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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근일 전 <조선일보> 주필이 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어떤 이야기들을 풀어놓을까. 평소 <조선>에 써온 칼럼을 보면 류 전 주필의 현대사 특강은 '좌파의 수정주의 사관'에 대한 강성 발언이 주를 이뤄야 맞다.

류 전 주필이 누구인가. 그는 '식민지 근대화-건국-산업화-선진화'라는 뉴라이트의 역사관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한 자유주의연대(지금은 '시대정신'으로 개칭)의 상임고문을 역임했다.

지난 2004년 출범해 뉴라이트 운동의 출발점 역할을 했던 자유주의연대는 일제시대 근대화의 기반을 닦았다는 식민지 근대화론, 이승만-박정희 복권, 과거청산 반대 등을 주창하며 노무현 정부와 역사 논쟁을 벌였다.

류 전 주필은 지난 10월 1일 <조선> 칼럼에서 "일부 근·현대사 교과서의 정신적 침식 작용은 이제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심각한 '교육 재난'으로 떠오르고 있다, 왜곡된 현대사 교육 퇴출을 위한 국민운동이 거세게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래서 내심 기대(?)가 컸다. 나름 준비했다. '역사란 과거를 극복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식민지배와 반공·독재를 미화해 결과적으로 역사적 공과를 균형있게 보지 않는 뉴라이트의 사관은 문제 아니냐' 같은 질문들 말이다. 학생들에게 질문의 기회가 보장되지 않을 것이 뻔하니 나라도 특강이 끝나고 물어볼 참이었다.

내심 기대했던 류근일 전 주필의 강성 발언

하지만 28일 서울 강북구 창문여자고등학교에서 진행된 류근일 전 주필의 특강 '청소년을 위한 현대사 이야기'는 예상을 한참 빗나갔다. 그는 이날 수능시험을 마친 고3 여학생들 앞에서 만큼은 사회주의자에서 전향한 영락없는 자유주의자였다. 이날 50여분간 이어진 그의 특강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역사를 균형 잡힌 시각으로 바라보자'였다.

류 전 주필은 "모든 역사에는 빛과 그림자가 있는데 빛만 이야기하고 그림자는 없는 것처럼 이야기하거나 그 반대로 이야기하는 것은 역사 왜곡"이라며 "고등학생 여러분은 역사의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공부해 '지적 조망권'을 넓혀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는 한국 근현대사의 빛과 그림자의 구체적 사실에 대해서 학생들에게 설명했다. 그는 대한민국의 건국과 자유민주주의 헌법 제정, 산업화의 성공, 민주화 이룩 등을 우리 역사의 빛으로 꼽았다.

"삼권분립, 자유선거, 언론출판의 자유 종교의 자유를 규정한 자유주의 헌법 체계가 도입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헌법이 없이 박정희 시대의 유신체제가 (건국 후)63년 동안 계속 됐다면 어쩔 뻔 했느냐. 이런 헌법이 있었기 때문에 박정희 유신체제에 대해서도 '헌법은 그렇지 않은데 왜 그래'라고 비판할 수 있었다. 빈부격차도 있고 IMF사태도 있었지만 어쨌든 국민소득 80달러를 2만달러로 만든 산업화도 성공했다. 또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린 덕택에 민주화가 이루어진 것도 다행이다."

"역사의 빛과 그림자 동시에 공부해야"

류근일 전 <조선일보> 주필.
 류근일 전 <조선일보> 주필.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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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에 대한 설명도 덧붙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삼선개헌과 야당탄압, 부정선거를 한 과오를 범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유신체제를 지속하고 가발공장 여공들이 사장이 돈 떼먹은 것에 대해 항의하니까 깡패 동원해서 똥물을 투척하기도 했다. 전두환 대통령은 탱크를 밀고 들어와 체육관 선거로 대통령이 됐다. 권력의 정당성이 없었다."

류 전 주필은 "역사에 대해서 긍지를 갖는 동시에 성찰을 해야 한다"며 "사회가 보다 발전하기 위해서는 과오에 대해 부끄러워하고 그것을 거울삼아야 잘못이 반복되지 않고 사회가 앞으로 나갈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산업화·민주화를 모두 이룩하고 더 좋은 사회로 가는 과정에서 지금 갈등이 일어나는 것"이라며 "인간 사회에서 갈등은 당연한 것이고 오히려 토론이 일어나고 사회가 창조적일 수 있다, 그래서 민주주의가 좋은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강의를 마무리하면서 "여러분들 나이가 이제 18~19살인데 역사를 함부로 노란색·파란색·빨간색으로 칠해버리는 것은 위험하다"며 "한 사람 말에만 빠지지 말고 여러 사람 말을 듣고 독서를 더 많이 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강의 내용이 '역사의 공과를 균형있게 바라보자'라는 보편적 시각을 담다보니 학생들의 반응도 나쁘지 않았다. 특강을 들은 한 학생은 "역사의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보라, 청소년 시기에 한쪽의 사실에만 매몰되지 않고 다양한 시각을 가져보라는 내용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며 "유익한 내용이었다"고 평가했다.

강의가 끝나고 마음 속에 남은 의구심... 류근일의 진짜 모습은?

이날 강의 내용만 보면 그가 역사교과서 수정을 강력하게 옹호하는 칼럼을 쓰는 '류근일'과 동일인물이라고 믿기지가 않았다.

그동안 중고등학교 역사교육은 국정 교과서 체계에서 획일적인 반공교육과 역사 발전의 모든 공을 최고 통치자에게 돌리는 영웅주의 사관만을 강요받은 것이 현실이었다. 학계의 오랜 요구로 겨우 교과서 검인정 제도가 시작되고 나서야 학생들이 스스로 판단하게끔 다양한 자료와 시각을 담은 역사 교과서들이 나왔다. 그 덕분에 학생들은 류 전 주필이 말한 '지적 조망권'을 조금씩 넓히기 시작했다.

그러니 이날 류 전 주필의 강의 내용대로라면, 뉴라이트가 문제삼는 역사 교과서들을 "심각한 교육 재난"으로 볼 것이 아니라 환영하는 게 논리적으로 일관성 있는 모습 아닐까.  

칼럼에서는 '올드라이트'의 극우적 시각을 마다하지 않는 그의 모습과 이날 여고생 앞에서 보여준 자유주의자의 모습, 어떤 것이 류 전 주필의 진짜 모습일까.


태그:#류근일, #현대사 특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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